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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준 교수의 忘憂里 戀歌
이성준 교수의 忘憂里 戀歌
  • 관리자
  • 승인 2017.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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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년 전 3월 타계한 천재 시인 ‘박인환'
(이성준 한국기술교육대학교 산업경영학과 겸임교수)
 
명동 지인들 술자리서 종이에 끄적거린 “세월이 가면”
즉석에서 곡 붙이고 나애심 콧노래…명곡 탄생의 순간 
 
1970년대 통기타 가수 박인희가 불러 히트한 <세월이 가면>이란 노래가 있다. “지금 그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으로 시작되는 이 노래의 노랫말은 서른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박인환(朴寅煥, 1926-1956)의 시다. 
 
 
이 노래는 6.25전쟁이 끝나고 3년쯤 지난 1956년 초봄에 만들어졌다. 명동에 경상도집이라는 주점이 있었다. 여기에서 어느 날 시인 박인환을 비롯해 극작가 이진섭, 언론인 송지영, 가수 나애심 등 몇 사람이 술을 한잔 하고 있었다. 참석한 사람들이 나애심에게 노래를 한곡 불러달라고 졸랐다. 나애심이 ‘부를 노래가 없다’며 꽁무니를 뺐다. 나애심은 ‘과거를 묻지 마세요’ ‘미사의 종’ 등 히트곡을 낸 당시 유명했던 가수이자 배우다. 이때 박인환이 종이에 뭔가 끄적이더니 앉은 이들에게 보여줬다. <세월이 가면>이란 제목이 붙은 시였다.
 
이 시를 읽고 샹송에 일가견이 있고 작곡도 할 줄 아는 이진섭이 즉석에서 샹송풍의 곡을 붙였다. 후에 히트곡이 된 <세월이 가면>은 이렇게 태어났다. 처음엔 나애심이 콧노래로 흥얼거리며 가락을 따라불렀는데, 나중에 합석한 테너 임만섭이 우렁찬 목소리로 이 곡을 노래하자, 지나가던 행인들이 노래 소리에 끌려 걸음을 멈추고 박수를 보냈다고 한다. 6.25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던 1950년대 중반, 그 시절 명동이 만들어 낸 걸작이라는 평을 받는 시이자 노래다.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이것이 원래의 시이다. 우리가 아는 노랫말은 이와 조금 다르지만 문제 될 정도는 아니다. 
원본 시와 노래 가사가 눈에 띄게 다른 부분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을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으로 바꾼 것이고, 원본 시 맨 마지막 행의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을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로 바꿔 가사 마지막 행으로 붙인 것이다. 그리고 후반부를 후렴처럼 반복했다. 
 
가수 박인희가 부른 <세월이 가면>의 노래 가사를 아래에 다시 적는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이 노래는 나애심이 처음 불렀다고도 하고, 테너 임만섭이 처음 불렀다는 얘기도 있지만 공식적으로는 <신라의 달밤>으로 유명한 가수 현인씨가 이 노래를 부른 최초의 가수다. 공식적이란 말은 대중 앞에서 공식 레퍼토리로 불렀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러나 당시엔 히트를 못했다. 나이 드신 분들은 <신라의 달밤>으로 유명한 현인씨의 노래를 기억하는데, 현인씨의 노래는 독특한 바이브레이션이 특징이다. <세월이 가면> 같은 애상적인 노래에는 잘 어울리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러다가 10년도 더 지난 후 1970년대에 통기타 가수인 박인희씨가 다시 불러 히트를 했다. 
 
 
이름이 비슷해서 박인희가 박인환의 여동생이 아니냐는 말도 있었지만 사실이 아닌 것으로 알려졌다. 
노래는 어떤 가수가 어떤 창법으로 부르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박인희씨의 차분하고 서정적인 아름다운 목소리가 이 시와 노래의 정서에 잘 어울렸다고 할 수 있다. 박인환이 이 시를 즉석에서 썼다고 하지만, 시상은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 가다듬어지고 있었던 것 같다. 이 시를 쓰던 그날 박인환은 우울한 표정이었는데, 낮에 망우리에 있는 그의 첫사랑 여인의 묘소에 다녀왔다는 얘길 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는 자신의 시 ‘목마와 숙녀’를 좋아하던 여인과 피난통에 헤어졌다가 그 얼마전에 우연히 만났다고 하면서 시를 썼다는 얘기도 있다. 박인환은 이때 기혼이었다. 
 
그의 첫 시집이자 마지막 시집이 된 <박인환 선시집>(1955)에 ‘아내 이정숙에게 보낸다’고 헌사(獻辭)를 인쇄했을 정도로 부부는 금실이 좋았다. 1955년에 배를 타고 미국에 잠시 다녀온 적이 있는데 아내에게 거의 매일 편지를 썼다. 박인환은 <세월이 가면>을 쓴 일주일 후쯤 세상을 떠났다. 1956년 3월 20일 밤이었다. 세상 떠나기 3일 전인 3월 17일에 천재시인 이상(李箱, 본명 김해경. 1910-1937) 추모의 밤이 있었는데, 이날부터 매일 술을 마셨다. 그 당시 박인환은 경제적으로 매우 쪼들렸다. 세탁소에 맡긴 스프링 코트를 찾을 돈이 없어서 두꺼운 겨울 외투를 봄까지 걸치고 다녔다고 한다. 끼니를 거르기도 했다는데, 그런 상태에서 빈 속에 계속 술을 마신 것이 화근이 됐다고 보는 것 같다. 
 
세상 떠나던 그 날도 술을 잔뜩 마시고 밤 8시 30분쯤 집에 들어온 후에 가슴이 답답하다면서 생명수(활명수 같은 것)를 달라고 소리를 쳤다. 그리고는 9시경 숨을 거뒀다. 그의 아들 박세형은 20년 후인 1976년 아버지 박인환의 시들을 모아 ‘박인환 시집 <목마와 숙녀>’를 내면서 후기에 선친의 사인을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아버지께서 타계하신지 오래 되어 사인(死因) 등에 관하여 궁금해하시는 독자가 계실 것 같아 이 기회를 빌어 말씀해 둔다. 아버지께선 평소 약주를 좋아하셨는데, 그날도 친구분들과 함께 명동에서 약주를 드신 후 귀가, 심장마비로 별안간 돌아가셨다. 1956년 3월 20일 밤 9시경이었다.”
 
박인환은 훤칠한 키에 영화배우처럼 잘 생긴 용모였다. 친구와 영화와 스카치 위스키인 조니 워커를 좋아했다. “장례식날, 많은 문우들과 명동의 친구들이 왔다. 모윤숙이 시 낭독을 하고 조병화가 조시를 낭독하는 가운데 많은 추억담과 오열이 식장을 가득 메웠다. 망우리 묘지로 가는 그의 관 뒤에는 수많은 친구들과 선배들이 따랐고 그의 관 속에 생시에 박인환이 그렇게도 좋아했던 조니 워커와 카멜 담배를 넣어 주고 흙을 덮었다.” (박인환 평전, ‘아! 박인환’, 강계순, 문학예술사, 1983) 
 
<세월이 가면>은 세상 떠나기 불과 며칠 전에 쓴 시이기 때문에 첫 시집엔 없고, 앞에 언급한 사후 20주기에 맞춰 나온 시집 <목마와 숙녀>에 실려있다. 박인환의 가까운 선후배들은 박인환이 세상을 떠난 그해 추석에 그의 무덤 앞에 아담한 비석을 하나 세워주었다. 앞면에는 한자로 ‘시인 박인환지묘’라는 묘비명 아래에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된 <세월이 가면>의 일부 구절,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를 새겼으며 뒷면에는 그의 짧은 행장을 적었다.  4남 2녀중 맏이었던 박인환은 8살 때인 1933년 인제공립보통학교(초등학교)에 입학했다가 11살때인 1936년 가족들과 함께 서울 종로로 이주해 덕수공립보통학교를 다녔다. 졸업시 석차는 66명중 7등이었다. 
 
 
1939년 초등학교 졸업후 바로 경기공립중학교에 입학했으나 2년후 경기중학교를 자퇴하고 한성학교 야학을 다니다가 황해도 재령의 명신중학교를 1944년에 졸업했다. 이해 곧바로 3년제였던 관립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가 광복후 학업을 중단하고 상경해 종로3가 낙원동 입구에 <마리서사>라는 서점을 열었다. 
부인 이정숙(李丁淑)과는 1948년 결혼해 이후 종로구 세종로 135번지에서 살았다. 1948년 자유신문사에 입사해 기자가 되었으며 1949년 경향신문사로 옮겼다. 1950년 6.25 전쟁 발발시 피난을 가지 못해 9.28 수복 때까지 서울에서 숨어 지냈다. 이해 12월 가족과 함께 대구로 피난가 경향신문 종군기자로 활동했다. 경향신문사를 그만두고 대한해운공사에 취직한 것은 1952년이다. 서울 세종로 옛집에는 1953년 7월에 다시 돌아왔다.
 
박인환은 1955년 화물선 남해호의 사무장으로 미국을 여행한 후 돌아와 조선일보에 이해 5월 13일과 17일에 <19일간의 아메리카>를 기고했고 그후 대한해운공사를 그만두었다. 이해 10월 15일 박인환 선시집(朴寅煥 選詩集)을 출간했다. 이듬해 세상 떠날 때까지는 그는 직업이 없는 상태였다. 심한 생활고를 겪던 중 만으로는 서른이 채 안된 젊은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떴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의 작품들은 그의 사후 더욱 빛을 발했으며 지금도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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