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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壇] 근대화 현장의 사상가 박정희
[論壇] 근대화 현장의 사상가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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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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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주자학의 핵심명제는 “遏人欲存天理.”

60년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학생 지식인들의 사상은 주자학의 울타리를 멀리 벗어나지 못함

박정희와 군인들의 사상은 주자학의 전통을 철저하게 파괴

1) 박정희(와 군인들)의 사상의 핵심은 “민족주의(국가주의)와 자유주의(자본주의)의 결합”.

2) 학생과 지식인들의 사상의 핵심은 “민족주의(종족주의)와 민중주의(사회주의)의 결합”.

1)은 人欲에 대해 긍정적, 그래서 현실주의, 실용주의, 부국강병을 지향함.

2)는 人欲에 대해 부정적, 그래서 이상주의, 도덕주의, 反부국강병을 지향함.

5.16은 위로부터의 근대화혁명이자 한국의 명치유신

[최진덕 칼럼] 근대화 현장의 사상가 박정희

(국가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에서)

 

최진덕(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철학)

 

1. 한강의 기적을 낳은 조국근대화의 영웅

필자는 5.16이 나던 1961년 초등학교 1학년, 10.26이 나던 1979년 대학을 마치고 군복무중이었다. 그래서 박정희 집권시기는 내 학창시절과 겹친다. 그런데 단 한 번도 박정희를 칭송하는 말을 주위로부터 들은 적이 없었다. 필자 역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존경의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고 오히려 지겨워했고 증오하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19876.10항쟁 무렵 과격한 좌익구호가 쏟아지는 것을 보고서야, 위기감을 느끼면서 박정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2016~17년 태극기 시위에 참여한 분들 대부분이 저처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박정희의 진가를 인정하기 시작했음. 하지만 아직도 좌파는 박정희를 원수로 보고 있다.

비극적 영웅 박정희는 어떤 인물인가?

식민지와 분단과 전쟁의 비극은 처참한 빈곤을 남겼음. 5.16군사혁명이 일어난 61년 국민소득 82달러, 농업 외에 제대로 된 산업이 거의 없었음. 정부 예산의 절반은 미국원조. 박정희는 5.16 뒤 정부의 실상을 보고는 도둑맞은 폐가와 같다고 하면서 혁명한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제대로 된 시장도 없고 중산층도 없었다. 자유당 정권의 부정부패에 항거해서 일어난 4.19의 주체세력은 시민이 아닌 학생이었다. 4.19는 과연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의거였다고 볼 수 있을까? 게다가 희망마저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좁은 땅에 인구는 많고 천연자원은 거의 없으며 강대국들에 의해 둘러싸인 분단국가의 안보위험이 상존한다. 박정희는 집권 18년 만에 이 가난한 농촌사회를 일으켜세워 부강한 산업사회로 탈바꿈시켰다그러나 좌파의 박정희에 대한 비판은 다음 두 가지다. 첫째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그 정도 할 수 있었다. 둘째,  민주주의를 희생하면서 이룬 경제발전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러나 1) 60년대초 시장경제와 수출주도발전을 이해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었나? 설령 있었다고 해도 산업화에 반대하는 학생 지식인 세력을 통제할 수 있었나? 2) 희생된 민주주의는 도대체 어떤 민주주의인가?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듯함. 산업화 없이 민주화에 성공한 나라는 없다. 박정희는 자유의 민주의 기초를 닦은 인물이다.

 

2. 위대한 성취는 위대한 사상으로부터 나온다

박정희는 위대한 행동인이기에 앞서 위대한 사상가였다. 그의 사상은 <<우리 민족의 나갈 길>>(1962), <<국가와 혁명과 나>>(1963), <<민족의 저력>>(1971), <<민족중흥의 길>>(1978), 그리고 수많은 연설문을 통해 알 수 있다.  박정희의 글은 단정하고 간결하고 명쾌함. 화려한 수식이나 현학적인 데가 전혀 없으나 사태의 정곡을 찌르는 데서 오는 박력이 있음. 그리고 오랜 기간에 걸친 고뇌와 사색이 배경에 깔려 있어 읽을수록 깊이가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박정희의 글은 <<독립정신>>과 같은 이승만의 글과 필적할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박정희 연구자들조차 박정희의 글에 주목하지 않는다. 군인 출신한테 사상 같은 게 있을까 하는 지식인들의 의심과 오만이 있기 때문이다. 5.16 직후에 쓴 그의 글의 보면 국가의 진로에 대한 구상이 그때 이미 완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년 동안 자신의 사상을 실천에 옮겼던 것 같다. 공산주의의 유혹에 벗어난 50년대에 박정희는 자신의 사상을 완성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1) 박정희(와 군인들)의 사상의 핵심은 민족주의(국가주의)와 자유주의(자본주의)의 결합”.

2) 학생과 지식인들의 사상의 핵심은 민족주의(종족주의)와 민중주의(사회주의)의 결합”.

1)人欲에 대해 긍정적, 그래서 현실주의, 실용주의, 부국강병을 지향함.

2)人欲에 대해 부정적, 그래서 이상주의, 도덕주의, 부국강병을 지향함.

人欲은 인간의 본능적 욕망이 아니라 남과의 비교 속에서 남보다 더 많이 가지려는 인간의 자기중심적 욕망 즉 소유욕을 말한다. 서양의 근대는 인욕의 해방과 더불어 시작된 것이다. 존 로크 등 자연법론자들은 생명과 재산과 자유에 대한 권리를 자연적 권리(natural right)로 봄. 그런데 생명과 재산과 자유에 대한 권리주장하는 것은 모두 인욕에 속함. 권리주장보다는 권리의 포기와 이웃이나 공동체를 위한 헌신을 중시했다.

인욕(소유욕)의 중심에 자아가 있다. 데카르트의 코기토도 소유적 자아이다. 인욕의 구조는 나는 남보다 더 많이 가지고자 욕망한다이다.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나는 남보다 더 합리적으로 사유하기를 욕망한다로 풀이될 수 있다. 합리적으로 사유한다는 것은 진리를 남보다 많이 소유하고자 하는 것이므로, 재산을 남보다 더 많이 소유하려는 것과 구조적으로 동일하다조선조 주자학의 핵심명제는 遏人欲存天理.” 그런데 60년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학생 지식인들의 사상은 주자학의 울타리를 멀리 벗어나지 못한 반면, 박정희와 군인들의 사상은 주자학의 전통을 철저하게 파괴하고 있다.

 

3. 박정희는 평생 철저한 군인이었다.

박정희의 사상과 행동를 이해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건은 그가 시종일관 철저한 군인이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박정희는 조선조 5백년을 지배한 文士가 아니고 조선조 내내 천대받던 武士 혹은 戰士였다.

박정희는 1917년 경상도 벽촌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1932년 구미보통학교 졸업, 3년간 문경에서 교사생활, 1940년 만주군관학교 입학, 1944년 일본육군사관학교 졸업, 1945년 만주군 중위, 1946년 국방경비사관학교2, 같은 해 남로당 군사총책, 1949년 숙군에 걸려 해임되었으나 사형을 면함(반공국가 대한민국의 최대공로자 김장룡 장군-->백선엽 장군-->이승만 대통령)--->6.25중 소령으로 복직-->육군소장의 군복을 입고 5.16군사혁명-->18년 장기집권하게 된다.

박정희는 어린 시절부터 군인이 되고 싶어했다고 한다. 초등학교 시절 이순신과 나폴레옹의 전기를 읽고 매료되어 “긴 칼을 차고 싶어서교사직을 때려치우고 만주군관학교에 늦은 나이로 입교했다. 나이가 많아 일본육사는 안되고 만주군관학교에는 혈서를 보내도 안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사실이 만주의 신문에 보도되자 관동군 한국인 장교가 주선해주어 19402기로 입학했다.

군인이 뭐길래 박정희가 당시 수재들만 가는 사범학교 출신이라는 경력과 좋은 직장을 다 버리고 혈서까지 쓰면서 사관학교에 들어간 것일까? 친일하고 출세하기 위해서였다는 좌파의 저질스런 해석은 명예훼손이다. 19세기말 20세기초에 걸쳐 한국의 지식인들은 망국의 원인에 대해 반성을 했다. 유교국가 조선의 文弱이 망국의 원인이었다. 조선조에서는 군인은 상민 내지 노비나 하는 賤役이었는데 이것은 유럽이나 일본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본래 국가는 전쟁 속에서 태어나고 늘 전쟁을 대비해야 한다. 그러므로 국가는 전투조직이고 국가의 지배층은 항상 戰士들일 수 밖에 없다. 이것은 희랍과 로마 이래 근대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확고한 전통이고 일본의 오랜 전통이다.

중국이나 조선에 온  명말청초의 마테오 리치 등 예수회선교사들, 19세기에 조선에 온 서양선교사들과 같은 유럽인들은 가장 고귀한 신분에 속하는 군인이 천민에 불과한 것을 매우 이상하게 여겼다고 한다. 조선이 군인은 천민으료 여긴 원인 유교에 있다. 유교는 군인과 종교인과 상인을 천시하기 때문이다.

조선이 文弱으로 인해 망했다고 생각하는 한국의 지식인들은 1920년대 총독부에 각급 학교에서의 군사훈련을 요구했다. 그러나 총독부는는 이를 거절한다. 그러나 1930년대 만주사변 이후가 되면 총독부는 학교 군사훈련을 권장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많은 한국의 청년들이 일본군에 지원한다. 이런 시대적 흐름은 친일로 매도할 수만은 없고, 거기엔 미래적 의미가 있다. 다시 말해, 독립된 국민국가 건설을 위한 준비작업으로 해석될 수 있다. 식민지는 식민본국의 지식과 힘을 배우고 모방하지 않고는 독립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카터 에커트에 따르면 한국은 19세기 말 이후 조선의 유교전통에서 벗어나 계속 軍事化되고 있었는데, 청년 박정희는 1920,30년대의 이런 군사화의 흐름을 타고 있었다. 軍事學은 물리학이나 기계공학처럼 배워야 알 수 있는데 군사학을 어디서 배울 것인가? 1940년 무렵 미국의 사관학교는 식민지 청년을 안 받아주었다. 중국에는 제대로 된 사관학교가 없었고 독립군은 사라진 지 오래 되었다. 군사학을 배우려면 일본 사관학교에 가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던 시기였다. 당시 일본의 군사학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에도시대 250년 동안 일본에서는 다양한 학문이 발달하지만 학문의 중심에는 늘 兵學이 있었다. 일본이 명치유신 이후 자신들의 병학 전통과 유럽 특히 독일의 군사학을 접목시킨 것이다. 일본육사 시절 과묵한 박정희는 문득 이 시대에 군사학 말고 배울 게 있나라고 내뱉었다고 한다. 군번 1번 이형근의 증언에 따르면 충성할 조국이 없는 일본육사의 한국인 생도들은 휴일에는 육군중장이던 왕족 이은한테 놀러갔다고 한다. 해방된 다음 생도들이 찾아가자, 늘 일본어로만 말하던 이은은 유창한 한국어로 이씨조선이 군사력을 키우지 못해 미안하다고 생도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군사력을 키우기 위해 군사학을 배우러 일본의 사관학교에 간 것이 무슨 큰 죄라도 되는가? (일본육사의 한국인 생도는 일제말 이전에는 이은과 같은 경우 외에는 단 한 명도 없었음. 만주군관학교 1기부터 7기까지 총 47. 이들 극소수가 해방 이후 建軍의 주역이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음.) 그러나 한국의 軍事化라는 역사적 배경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군인의 精神이다군인이란 주군 혹은 조국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지는 자다. 군인정신의 가장 극명한 표현이 일본의 武士道다.

사무라이란 무엇인가. 죽는 것이다.”

박정희는 구미보통학교와 사범학교 시절부터 일본역사에 나오는 영웅적인 사무라이들에 매료되었다. 무사도는 동서고금 군인정신의 보편적 본질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그 무사도의 원형은 <<삼국사기>>열전에 나온다. 신라의 花郞道는 일본 무사도의 원조다.

일본문화 가운데 서양에 가장 먼저 소개되어 서양인들은 매료시킨 것은 禪佛敎(스즈끼 다이세츠)武士道(니토베 이나조). 선불교와 무사도는 소유적 차원의 자아를 스스럼없이 버린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자아포기의 전제조건은 죽음 앞에서의 초연함. 죽음 앞에 초연함 언제라도 죽을 각오를 하며 살아야 한다.

내가 죽는다고 생각하면, 남과 비교하면서 더 많이 가지려 하는 人欲은 무의미해진다. 군인정신은 人欲을 멀리 초극하는 것이다. 군인은 국가와 국가가 싸우는 세속 역사의 차원을 벗어나면 존재할 수 없다. 군인은 철저하게 인욕의 세계에 속한다. 그러나 동시에 군인은 언제나 죽을 각오로 살면서 죽음 앞에 초연하기 때문에 인욕의 세계를 멀리 초월하는 것이다. 군인은 인욕의 해방과 함께 시작되는 근대세계에 속하는 동시에 인욕을 멀리 넘어섬으로써 근대세계를 초월한다. 일본의 무사도는 선불교와 함께 이 점을 강조하는데 명치 이후 일본군은 이런 전통을 매우 소중하게 여긴다. 박정희에게도 군인정신의 초연한 측면이 강하게 나타난다. 군인정신의 양면성은 박정희의 사상과 행동을 이해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근대화(산업화+민주화)는 전적으로 인욕의 세계에 속한다. 박정희는 조국근대화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졌다박정희는 유신시절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라는 휘호를 자주 썼는데 이 점만 보더라도 군인정신의 본질에 박정희는 충실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박정희는 죽음의 고비마다 아주 초연했다. 1949년 숙군 때 살려달라는 부탁을 하는데도 삶에 대한 집착이 없었다고 한다. 19791026일 궁정동 안가에서 피격당할 때도 해탈한 표정이었다고 동석했던 모델 신모씨가 말했다죽음을 미리 각오한 사람은 소유적 삶에 대해 아무런 집착이 없으므로 어떤 두려움도 있을 리 없고 그의 마음은 거울처럼 맑고 평온한 것이다. 그런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엄청난 용기가 나오고 엄청난 지혜가 나올 수 있다.

자아와 인욕을 포함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면 아무것도 없는 바로 거기서부터 초인적인 힘이 나오는데, 그 초인적인 힘은 종교에서 말하는 기도나 명상의 힘과 일맥상통한다. 그런 힘이 박정희가 18년 동안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이승만 대통령도 늘 기도하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지도자는 세상 속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세상 밖에 있을 줄 알아야 한다.

박정희의 군인정신은 결사적인 조국애로 나타났다. 결사적인 조국애가 5.16 당시 박정희 이하 젊은 장교집단을 움직이는 근본적인 동력이었었다. 승진에 대한 불만이라든가 권력에 대한 욕망 때문이라는 기자들이나 학자들의 분석은 타인의 마음을 함부로 넘겨짚는 주관적 추측에 불과하다. 지식인들은 진정으로 목숨을 걸 때 사사로운 욕망에서 벗어난다는 사실을 체험해본 적이 없는데 이것이 文士武士의 결정적 차이ek.

 

4. 청년 박정희의 사상적 방황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에서의 박정희는, 다른 생도들과는 다른 가장 마지메한 모범적인 생도였다. 박정희와 같이 사관학교를 다녔던 한국과 만주와 일본의 생존자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를 했던 카터 에커트에 따르면 만주군관학교 교장 나구모 신이치로 중장은 박정희를 총애하여 자주 자기 집에 불러 식사를 했다. 보통의 생도들은 교장을 졸업할 때까지 몇 번밖에 보지 못했다.

나구모 신이치로 교장이 아들도 일본육사 출신의 장교였는데 어느날 만주에 와서 아버지를 찾자, 아버지는 오늘 박정희라는 생도가 오는데 너는 그 옆에 앉으라고 했다. 카터 에커트는 일본 동경에서 그 아들을 만나 인터뷰를 했는데 무엇이 가장 인상 깊었느냐고 물었더니 그 아들은 격렬한 에너지와 强悍氣魄이라고 답했다.

격렬한 에너지와 강한한 기백은 조선의 주자학자들이 결여했던 것이다. 그것은 맹자가 말하는 浩然之氣와는 다른 어떤 힘이라 생각됨. 맹자의 호연지기道義 즉 유교윤리에서 나오는 것인 반면, 박정희의 그것은 자신의 목숨을 던짐으로써 얻어지는, 도의를 초극한 차원의 호연지기라 할 수 있다. 철두철미한 군인이었던 박정희가 사회주의(공산주의)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설명이 잘 안된다. 사회주의는 본질적으로 이상주의, 도덕주의에 뿌리박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는 인욕의 해방에서 유래되는 근대적 세속주의와도 맞지 않고, 또한 죽음 앞에 초연해짐으로써 인욕의 세계를 멀리 넘어서는 군인정신의 초탈적 본질과도 맞지 않다.

 박정희는 대구사범 시절부터 사회주의에 노출되어 있었다. 만주군관학교 시절에는 만날 때마다 사회주의에 대해 말하더라는 증언(정일권과 이한림)이 있다. 만주군관학교의 중국인 생도들은 다수가 비밀조직에 가입했고 중국공산당과 연계되어 있었다. 박정희는 만주 시절 중국어가 유창했다고 한다. 그러나 박정희가 중국인 생도들을 통해 공산당과 연계되었다는 증거는 없다. 박정희가 원래 좌익이 아니었는데 둘째 형 박상희가 10.1 폭동 당시 경찰의 총에 맞아 숨지는 바람에 남로당에 가입했다는 통설을 재고되어야 마땅하다. 남로당 군사총책이었던 것은 맞지만 박정희는 늦어도 만주군관학교 시절에는 이미 사회주의에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어떻게 사회주의에서 벗어났을까?

1) 폭력과 살인을 일삼는 남로당 내부를 들여다 보고 환멸을 느꼈을 가능성. 2) 남로당과 북한의 소련에 대한 종속성과 비자주성에 환멸을 느꼈을 가능성. 3) 욕망하는 인간의 현실 즉 인욕의 현실에 대한 새로운 각성이 있었을 가능성. 4) 결사적 조국애로 무장한 그의 민족주의는 맑스레닌의 공산주의와는 안 맞았을 가능성. 5)숙군 작업에 걸려들자 박정희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원점에서 다시 생각했을 가능성 있다.

좌우간, 숙군 대상에서 풀려나는 것을 계기로 박정희는 공산주의와 작별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문관으로 복직해서 육군본부 작전국에서 일했다. 이때 박정희는 김종필과 함께 북한국의 남침 시기와 남침 경로를 6개월 전에 예측한 보고서를 올렸으나 한국군과 한국정부는 이를 무시했다.

6.25가 발발하자 박정희는 월북할지 모른다는 주위의 우려와는 달리 국군과 더불어 남하해 공산주의와의 결별을 가시적으로 보여주었다. 이제 박정희의 사상은 민족주의와 민중주의(사회주의)의 결합과는 멀어진 것이다. 아울러 그의 민족주의는 1930년대 일본의 마지메한 젊은 장교들이 벌인 소화유신의 파시즘과도 멀어졌다. 파시즘은 국가사회주의(national socialism=나찌즘)”로서 사회주의와 일정한 관계가 있다.

박정희에 대한 평가 중에 간혹 일본 청년장교들의 2.26사건에 대해 긍정적으로 회고한 적이 있고 이것이 그의 시월유신과 관련된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昭和惟新이 추구하던 일본 중심의 군국주의적 팽창에 대해서는 박정희는 매우 부정적이었다. 박정희의 꿈은 조국을 동방의 복지국가로 만드는 것이었다. 박정희의 民族中興은 군국주의 혹은 제국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인류공영에 이바지해야 한다고 늘 생각했다. 일본의 군국주의 혹은 제국주의는 국가와 민족만 강조하다 보니, ‘개인의 차원이 누락되어 있는 동시에 인류의 차원이 누락되어 있었다.

박정희는 1950년대 10년 동안 전쟁과 자유당정권의 난맥상을 경험하면서 울분 속에서 인간과 역사, 사회와 국가에 대해 전면적인 반성을 하고, 조국의 미래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 사색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결과가 5.16 이후 저서와 연설문 속에 드러났다. 박정희는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잘 준비된 대통령이었다. 박정희는 자신이 60년대초에 쓴 대로 대한민국을 이끌어갔으며심지어 10월유신도 그 속에 예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학생 지식인들의 저항이 그의 예상을 넘어 매우 심각했다. 설득이 불가능한 지식인들의 이상주의, 도덕주의, 사회주의를 박정희는 물리적 힘으로 돌파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10.26의 죽음은 실패의 단적인 증거라 할 수 있디. 하지만 그 죽음 또한 그가 사관생도 시절부터 각오했던 죽음이었디. 영웅은 자신이 죽어야 하는 그 길을 기꺼이 걸어갔던 것이다.

 

5. 근대화 이념과 군사력의 결합, 그리고 계속되는 쿠데타

思想史的으로 보면 박정희는 19세기말 개화파의 후예이고, 5.16군사혁명은 1894년 김옥균의 갑신정변을 계승한 것이다. 5.16과 갑신정변은 하나는 성공하고 다른 하나는 실패했다는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대화(=開化)”라는 목표를 공유하는 혁명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근대화=개화=서구화'다.

김옥균은 10년 넘게 일본을 왕래하면서 근대화된 일본의 위용을 익히 알았고 근대화의 이념에 투철했다. 하지만 머릿속 이념이 저절로 현실화될 수는 없다. 그 이념을 실현한 힘이 필요했지만 김옥균에게는 그 힘이 없었다. 그런데 강력한 군사력을 앞세운 5.16군사혁명을 김옥균의 꿈을 실현했다고 볼 수 있다. 5.16을 계기로 한국역사상 최초로 근대화의 이념이 자신을 실현해줄 힘과 만난 것이다.

힘, 즉 군사력의 유무가 명치유신과 갑신정변의 운명을 갈랐다. 명치유신은 20, 30대 변방의 젊은 사무라이들이 일으킨 존왕양이 운동이었다. 그런데 일본의 젊은 사무라이들은 칼을 차고 책을 읽는 자들이기 때문에 근대화의 이념과 그 이념을 실현해줄 힘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일본의 젊은 사무라이들은 막부를 타도한 다음 강력한 중앙정부를 세웠다. 그리고 나서 근대적인 시장과 기업을 만들었다. 유럽의 근대화는 대체로 시장이 먼저 발달한 다음 시장의 부르주아들이 정부를 새로 만드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반면 일본은 유럽의 후발국가 독일처럼 강력한 정부가 먼저 들어선 다음 이 정부가 시장을 만들고 확장했다.

젊은 사무라이들은 모두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면서 일본의 근대화를 위해 헌신했다. 조선후기 이른바 실학자들이 책상물림에 그친 것과는 천양지차다. 이것이 조선과 일본의 운명을 갈랐던 것이다. 젊은 사무라이들의 결사적 행동 덕분에 일본은 한 세대도 안 되어 세계열강 대열에 합류했다. 5.16은 위로부터의 근대화혁명으로서 한국의 명치유신이라 할 수 있다. 박정희 정부는 강력한 중앙정부를 구성하여 경제제일주의를 내세우고 산업화를 추진하여 명치유신보다 더 혁혁한 세계사적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명치유신은 에서 더 큰 를 창조했다면 5.16에서 를 창조한 점에서 더 위대하다.

그러나 박정희는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는 학생 지식인들과 싸우고 싸우다가 결국은 그의 격렬한 에너지와 강한한 기백마저 시들고 만다. 70년대 유신 말기의 박정희 모습은 예전의 패기와 총기를 잃어버린 듯한 느낌이다학생 지식인들의 민족주의가 이상주의, 도덕주의, 사회주의와 결합할 때 박정희의 모든 정책은 반대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북한이 보고만 있었을 리는 없었고 대한민국 안에서 남북대결이 벌어졌다.

6.3사태 당시, 서울문리대 지하써클 이스크라(불꽃)에 속해 있던 어떤 분(철학과)의 증언에 따르면 그들은 표면적으로는 한일협상을 굴욕외교라고 비난했지만 내면적으로는 한일협상이 진행되어 일본과의 경제협력이 이루어지면 한국경제는 좋아질 것이고, 그럴수록 혁명의 기회는 멀어져간다는 것을 염려했다고 한다. 이 분은 박정희의 수출주도 발전전략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과거를 회상했다고 한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김우중 회장의 대우에서 수출업무를 하면서 70년대 중반쯤 되어서야 박정희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학생이나 지식인들은 설득이 안 되는 존재다. 깡패는 설득이 되도 교수나 기자는 설득 안된다. 박정희에게는 빈곤과의 싸움, 북한과의 싸움보다도 학생 지식인들과의 싸움이 더 힘들었다. 사상가 박정희의 위대한 성취는 이런 싸움 속에서 이루어졌다. 5.16 이후 박정희는 3중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여러 차례의 쿠데타(6.3사태 때의 계엄령선포, 3선개헌, 10월유신)를 거쳤다. 이중에서도 10월유신은 5.16보다 훨씬 더 힘들고 훨씬 더 고독했던 쿠데타다. 박정희는 10월 유신에 목숨을 걸었다. 1975년경 청와대를 찾은 대구사범 시절 일본인 은사에게 박정희는 '자신은 살해당할 각오가 되어 있다'고 비장하게 고백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5.16 이후 제일 먼저 관료제를 정비했다. 그는 합리적인 국가 만들기로서의 내쇼날리즘에 충실했다. 그런 다음 박정희는 유능한 관료들과 함께 경제발전을 위해 자유시장을 확대하고 기업인을 육성했다(자유시장경제의 육성). 국제경쟁력이 있는 기업 육성을 위해 능력과 성취를 기준으로 철저하게 경쟁원칙에 따라 특정 기업을 집중 지원했다. 그리하여 재벌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재벌의 원조는 박정희 정부다.

그러나 이러한 국가주의는 자유시장경제의 원칙을 크게 벗어난 거이다. 대표적인 사례는 1972년 사채를 동결한 8.3조치. 사채업자들의 사유재산권을 정부가 침범 등이다. 그러나 그 덕분에 한국의 재벌기업들이 살아날 수 있었다. 박정희는 곧 이어 10월유신을 단행하고 재벌기업들과 함께 중화학공업에 뛰어들었다. 이것이 단기적으로는 한국경제를 어렵게 만들었지만 장기적으로는 오늘날 제조업 강국 대한민국의 기반이 되었다.

박정희의 사상의 핵심은 민족주의(국가주의)와 자유주의(자본주의)의 결합이라 할만하다. 박정희는 50년대 이후 개인의 자유를 근간으로 하는 자유주의(자본주의) 사상을 적극 수용했다. 이와 함께 박정희의 민족주의는 종족적 차원의 낭만적 민족주의(독일식 후진적 민족주의)에서 벗어나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제도로서의 국가건설을 중시하는 합리적 민족주의(프랑스식 합리적 국가주의)로 흘러갔다.

5,16 이후 박정희 정부의 정책은 국가주의(국가의 시장개입)와 자유주의(자유시장에 위임) 사이에서 오락가락했다. 따라서 박정희 정부를 단순히 군사독재정권이라 지칭할 수는 없다. 박정희 정부의 특징은 1) 핵심요직에는 군과 민을 가리지 않고 능력 위주 인사, 2) 시장경쟁의 원칙 철저, 3) 부정부패는 사실상 없음 이 3가지다. 박정희는 滅私奉公의 원칙에 완벽하게 충실했던 사람이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원칙에서 예외가 있다면 박정희 정부였다박정희 시대를 설명하기 위해 동원되는 이론적 틀은 박정희 정부를 권위주의적 정부로 보는 개발국가(developmental state)과 대중의 자발적 참여가 없는 독재는 있을 수 없다는 대중독재(mass dictatorship)”. 그러나 어느 것도 실제와 부합한다고 보기 어렵다.

박정희정부가 과연 권위주의 정부였던가?

박정희정부가 대중을 선동하는 독재정부였던가?

박정희정부를 권위주의적 정부 혹은 독재정부로 보는 개발독재론대중독재론속에도 여전히 학생 지식인들의 이상주의적, 도덕주의적, 사회주의적 편견이 들어 있다. 학생 지식인들의 이념적 편견과 오만에서 벗어나, 당시 한국 안팎의 경제상황과 안보정세를 면밀히 들여다본다면, 대한민국의 생존과 자유와 번영을 위한 박정희의 정책적 선택이 불가피했고, 불가피했다는 점에서 옳았음을 입증할 수도 있다(아직은 희망사항이지만 임반석의 자주국방에 관한 2017년 하버드 박사논문에서 희망의 싹을 볼 수 있음).

60년대엔 경공업중심의 수출주도발전: 국가주의와 자유주의가 혼용됨.

70년대엔 중화학공업 중심의 수출주도 발전, 그리고 농촌근대화운동으로서의 새마을운동: 유신이후 국가주의의 비중이 점점 더 커졌음.

60년대 말 이후 안보상황의 급변(미군철수와 북한도발)-->10월유신-->자주국방 목적의 방위산업육성을 위해 중화학공업 육성.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박정희는 자유를 제한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것이 바로 5.16 이후 박정희의 정책의 기조이고 일련의 쿠데타의 근본 동기였다.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라고 하면서 박정희는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는 학생 지식인들을 일방적으로 무시했다. 그러나 사람을 거의 죽이지 않았다. 그를 두고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성과를 낸 위대한 독재자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박정희는 자신의 권력만 추구했던, 김일성과 같은 나쁜 의미의 독재자가 절대 아니었다. 박정희는 자신이 길이 죽음에 이르는 길임을 알고도 기꺼이 그 길을 걸었다. 박정희는 자신이 낳은 자식들에 의해 살해된 비극적 영웅이었다.

자유주의와 국가주의의 결합, 자유와 규제의 결합은 애당초 모순적인 결합이다. 하지만 인간세상에서 자유는 스스로를 제한하지 않고는 존립할 수 없고, 국가 없는 자유도 있을 수 없다. 이 점에서 자유주의 철학은 한국적 상황과는 잘 맞지 않아 보인다. 이승만과 마찬가지로 자유민주주의의 확고한 신봉자였던 박정희는 5.16 당시부터 그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박정희를 위대한 사상가로 부를 수 있다. 박정희는 집권 18년 동안 자신의 사상을 정책으로 구체화시겼고 그 결과는 한강의 기적이었다. 

우리는 박정희가 남긴 글 속에서 그의 사상의 핵심에 해당하는 국가주의와 자유주의의 交織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풍부하게, 그리고 선명하게 엿볼 수 있다. 이승만 이후 자유를 제대로 이해했던 사람은 박정희 한 사람밖에 없을지 모른다. 박정희의 자유 이해는 이승만보다 진일보한 측면도 있다. 이 점을 많은 연구자들이 놓치고 있어 매우 아쉽다. 하지만 박정희의 글에 대한 독해와 분석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자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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