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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덤논평] 사실과 진실
[프리덤논평] 사실과 진실
  • 류종현 논설위원
  • 승인 2017.09.2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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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fact' 와 'the truth'
‘총체적 사실’이 ‘진실’이라면, ‘부분적 진실’은 ‘사실’에 해당

우리는 일상에서 종종 ‘사실’과 ‘진실’을 혼동하여 ‘사실’이 ‘진실’ 인양 착각하기도 하고, 때로는 ‘사실’이 모두 ‘진실’인 것으로 오해하기도 하여 심각한 혼란을 야기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쉽게 이야기 하자면 ‘사실’은 ‘실제로 있었던 일’ 이고, ‘진실’이란 ‘거짓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사실과 진실의 개념’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사실’에 해당하는 영어단어는 ‘fact’ 이지요. 그런데 이 ‘fact’라는 단어 앞에는 항상 부정관사 ‘a’ 가 따라 붙습니다.

반면 ‘진실’ 에 해당되는 영어단어는 ‘truth’이고, 거기에는 꼭 정관사 ‘the’ 가 따라 붙습니다. 'a fact' 그리고 'the truth.' 결국 ‘사실’과 ‘진실’의 차이는 부정관사 a와 정관사 ‘the’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부정관사 ‘a’에는 아시다시피 ‘one’의 뜻도 있고, ‘certain’의 뜻도 있고, ‘per’의 뜻도 있고.... 적어도 대여섯 가지의 가변적의미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A Mr. KIM came to see you in the morning.] 이 문장에서 부정관사 ‘a’는 ‘certain’의 뜻이지요. 또는 [We go on a picnic once a week.]

이 때의 a는 per의 의미입니다. 이처럼 부정관사는 경우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됨으로써 ‘사실’이라는 용어의 개념에도 역시 불확정적이고 가변적임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법에서 말하는 ‘사실’이라는 용어의 뜻은 ‘효과를 나타내는 현상’을 의미합니다. 사법심리절차에서 원고나 피고는 동일한 하나의 사건에서 ‘사실관계’를 서로 다르게 진술합니다.

그렇지만 각자의 관점에서 그 진술은 ‘사실’로 인정됩니다. 그런 상이한 진술이 ‘사실(a fact)’임에는 틀림없으나, 증인이나 증거에 의해 그 ‘사실(fact)’은 부인될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사실’은 여러 가지 상황으로 동시에 공존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경우에는 ‘many facts’가 가능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일곱 명의 장님이 코끼리를 만져보고 코끼리를 표현할 때 각자가 만져본 부위에 따라 ‘기둥 같다’, ‘튜브 같다’, 혹은 ‘양탄자 같다’라고 표현하며 코끼리를 서로 다르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일곱 명의 장님이 말한 코끼리는 각자의 관점에서 모두 ‘사실’이지만, 진실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코끼리의 ‘실체적 진실은 그 일곱 명의 장님의 표현을 모두 다 합해서 네다리와 코와 꼬리가 표현되어야 ’코끼리의 실체적 진실‘에 근접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진실(truth)’ 은 무엇이며 ‘사실(fact)’ 과 어떻게 다른 것인가?

‘진실(truth)’이라는 학문적 표현은 ‘진리(truth)'이며, 이것은 가변적이지 않고 세상에 오직 하나로서 존재할 수 있다는 점에서 ‘the Sun’, ‘the Han river’처럼 정관사가 따라 붙습니다.

‘총체적 사실’이 ‘진실’이라면, ‘부분적 진실’은 ‘사실’에 해당될 수 있으며, ‘사실’이 평면적이라면 ‘진실’은 입체적이라고 표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의미를 좀 더 명확히 하고자 각각의 말에 반대말을 생각해봅시다. ‘진실’의 반대말은 당연히 ‘허위’ 혹은 ‘거짓’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실’의 반대개념은 무엇일까요? ‘사실’의 반대는 ‘허위’가 아니라 ‘허구’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입니다.

우리가 ‘수(number)'를 배울 때 처음에는 양수만 생각하다가 음수를 알게 되고, 나아가 제곱하면 모두 양수가 된다고 배우다가 제곱해도 음수가 되는 허수나 복소수를 알게 됩니다.

또 세상 사람이 모두가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믿었던 천동설의 시대에 단두대를 내려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중얼거리며 ‘지동설’을 굽히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양수와 천동설이 ‘사실’이라면 ‘허수’와 ‘지동설’은 ‘진실’의 차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제 좀 더 시야를 돌려 논리학적인 관점에서 ‘사실’ 과 ‘진실’ 의 차이를 분석해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A라는 사람이 B라는 사람을 대검으로 찔러 살해 했다면 이때 A가 B를 찌른 것은 ‘사실’이고, B라는 사람에 대해A가 ‘살인’을 저지른 것도 ‘사실’입니다. ‘살인’이라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지만, ‘진실’의 차원에서 과연 A가 살인자로서 ‘나쁜 사람’인가의 문제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만일 B가 살해된 장소가 전쟁터였고, A는 아군병사였고 B가 적군이었다면, A는 살인에 대한 처벌대신 훈장을 받을만한 전과를 올린 공로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경우, A가 ‘살인’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진실’은 ‘적군의 사살을 통한 애국’이라 할 수 있으며, 이 경우 논리학적으로는 ‘전제논리의 오류’에 해당됩니다. 이처럼 ‘진실’의 차원에서는 ‘전제’가 또 하나의 큰 변수로 작용될 수 있음도 유념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실과 진실의 경계를 언론의 관점에서 잠시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사실보도’를 해놓고, 사실보도를 했으니 어떤 책임도 없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진실보도’에는 어떤 책임도 논할 수 없지만, ‘사실보도’는 모두가 ‘반론보도의 대상’이 됩니다. 방송법에서는 반론보도의 객체로 ‘정기간행물 등에 공표된 사실적 주장’을 들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정기 간행물’ 은 ‘신문, 잡지는 물론 기타 정기적으로 발행되는 매체에 방송’ 까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언론은 ‘사실적 근거를 바탕으로 진실보도를 추구하는 것’이며 ‘진실’은 학문과 윤리의 중심 가치로서 ‘절대불변’을 그 본질적 생명으로 한다는 점에서 신뢰의 바탕이 되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듯이 언론도 진실을 떠나 존재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심지어 일부 언론 중에는 통계를 오도함으로써 단순 사실을 진실로 호도하는 경우도 목격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발뒤꿈치가 두꺼운 사람은 오래 산다’는 식의 보도가 바로 여기에 해당됩니다. ‘발뒤꿈치가 두껍다’는 사실은 많이 걸었다는 것이어서 ‘운동을 적당히 한 사람은 오래 산다’라고 설명되어야 하는데, 마치 ‘발뒤꿈치가 두껍다’는 단순사실을 ‘오래 산다’는 결과로 직접 연결함으로써 ‘단순상관관계’를 ‘인과관계’로 오도하여 진실을 호도하는 경우가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사실보도는 무의미하므로 존재가치가 없다는 말인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물론 ‘아니다’ 입니다. ‘사실적 근거’를 바탕으로 ‘진실보도’가 가능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실보도를 원천봉쇄한다면 사실적 근거를 통한, 사실적 근거에 의한 언론의 '의혹제기‘는 불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언론책임판단 기준의 하나로서 ‘상당성의 원칙’을 인정하는 논리이기도 합니다.

‘사실’ 과 ‘진실’ 의 차이에 관련하여 문득 떠오르는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오래 전이기는 하지만, 모 대학의 총장이 그의 딸을 고액과외 시켰다는 사실이 언론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문제의 딸은 입양한 아이로 총장의 개인적 욕심을 채우려 하기보다는, 입양한 딸아이에 대한 인간적 사랑을 조금 서툴게 베풀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진상이었습니다.

언론의 사실보도는 국립대총장이라는 공인의 처신으로서 적절치 못했다는 사회적 비난여론을 일게 하였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부 언론은 총장신분에 부적절한 처사라는 점을 나무라기에 급급했던 나머지, 입양된 그 딸아이의 프라이버시를 미처 생각지 못한 채, 입양 사실까지 낱낱이 기사로 까발려버렸습니다.

결과적으로 숨겨져야 하고, 또 감추어줘야 했던 한 여학생의 가슴 아픈 출생의 프라이버시마저 들추어냄으로써 이는 사법적 판단은 접어두고서라도 언론이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사실과 진실 사이의 논리적 추론이나 숙고를 간과한 치명적 실수로 이어졌습니다.

‘진실’ 이란 주머니 속에 날카로운 송곳과 같은 것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세상에서 속세의 힘을 행사하려는 자들은 때때로 ‘사실’을 ‘진실’인 양 왜곡하기도 하고, 또 자기합리화의 방법으로 악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역사가 그런 무리들을 그렇게 방치하지만은 않았다는 것도 ‘사필귀정’이라는 표현으로 쉽게 설명되고 있습니다. 옛 성현들은 “단 한 번의 거짓말로 명성을 잃을 수 있듯이, 진실도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실’은 말하거나 주장하기보다는 ‘객관적 사실에 의해 스스로 밝혀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실’은 주머니 속의 날카로운 송곳( 囊中之錐)처럼 언젠가는 그 예리한 끝을 세상 밖으로 불쑥 드러내고야 맙니다.

아무리 현란한 언어나 화술로 논쟁을 벌이고 토론을 포장하여도 속임과 허위가 섞이면 참되고 정성스럽다고 말할 수 없으며 비록 팽팽한 의견의 대립으로 끝나더라도 논쟁이 유익하려면 진실해야 하고, 그래야만 송곳의 예리한 끝이 주머니 밖으로 그 끝을 불쑥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사 속에서 3.1 독립운동, 4.19 학생의거 등 불멸의 애국적 진실로 받아들여지는 사실들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그 역사 속의 영웅들은 후손들의 가슴속에 그들의 무덤을 두고, 당대의 평가에 의해 드러나는 진위논란에는 그다지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진실이라는 예리한 송곳의 끝은 언젠가 드러나기 마련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언론의 역사’를 ‘사실을 근거로 세월과 벌이는 진실투쟁의 역사’라고 정의함에 어떠한 주저함이나 두려움도 없습니다.

이는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듯이 언론도 ‘진실’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신념 때문입니다. 작금의 혼탁한 사회에서 참된 언론인으로서 후손과 역사 앞에 당당할 수 있기를 바란다면 초지일관 오로지 ‘진실보도의 정도’를 걸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프리덤 논평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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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민 2017-09-27 18:48:57
꺼져버린 양심의 불꽃을 되살리는 참으로 명쾌한 논평입니다 '사실'과 '진실' 많이 배우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