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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칼럼] 왜곡과 의심은 무지에서 비롯된다
[인문칼럼] 왜곡과 의심은 무지에서 비롯된다
  • 프리덤뉴스
  • 승인 2018.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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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겸/文史哲인문학연구소장(한국외국어대학 겸임교수)
김정겸/文史哲인문학연구소장(한국외국어대학 겸임교수)

왜곡(歪曲)은 "사실과 달리 그릇되게 하거나 진실과 다르게 함"으로 정의된다.

왜곡의 왜(歪)는 '아니다'의 의미인 부(不)와 '바르다'의 의미인 정(正)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왜는 "바르지 않다"는 뜻이다. 영어로 'distortion'인데 이는 '찌그러짐, 일그러짐'을 의미한다. 사람의 얼굴이 찌그러지거나 일그러져 있을 때를 생각해보자. 보기 흉하다.

정치권에서는 자신들의 정치적 우위를 위해 아무런 도덕적 부끄러움 없이 왜곡이 자행되어 지고 있다. 왜곡은 편향(偏向)된 사고이다. 편향은 한쪽으로 쏠려있다는 뜻이다. 왜곡을 좀 더 확장해서 생각해 보면 "당연히 그렇다"고 믿는 편향적 사고이다. '당연함'에 대해 의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메소포타미아인은 지구는 평평하다고 생각했다. 고대 그리스인은 항해를 하면서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돌고 있다는 지동설을 믿지 않았다. 신 중심의 세계에서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라는 천동설을 지지한다. 이는 특히 아리스토텔레스가 언급하면서 왜곡되기 시작한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회(Copernican Revolution)라는 것이 있다. 이는 왜곡에 대한 의심을 통해 이루어진 위대한 사고의 전환이다. 혁명이다. '코페르니쿠스적'이라는 말은 자신의 목숨까지도 저당 잡힌 주장을 할 경우에 사용되는 언어이다. 예를 들어 지동설을 지지한 지오다노 브루노는 화형까지 당한다. 이는 왜곡에 대한 좋은 예이다. 왜곡의 긍정적 모습은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

그러나 왜곡의 부정적 모습은 질타와 질투, 그로인한 파멸만 있을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적 왜곡에 대한 의심을 바로 잡을 힘이 필요한 시기이다. 통일에 대한 담론이 뜨겁다. 통일에 대한 엉터리 논리가 왜곡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통일=돈 먹는 하마'라는 공식이 대표적이다. 통일 비용 때문에 흡수 통일이 불가하다고 하는 것은 왜곡으로 길들여지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그 공식이 관습으로 이해되고 있다.

통일은 비용문제가 큰 원인일 수 있지만 그와 더불어 '통일 의식'이 통일을 가로 막는 가장 큰 적이다. '통일=돈 먹는 하마' 공식도 통일에 대한 의식문제에서 나타난 것이다. 통일교육협의회 2015년 대학생들(통일 미래세대)의 통일의식 조사결과 통일의 장애 요인으로 '통일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 부족'(15.5%)으로 나타났다.

왜곡과 의심에서 벗어나 화합으로 갈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화합은 공감대가 형성되었을 때 나타난다. 공감은 역지사지를 의미한다. '맹자'(孟子)의 '이루편'(離婁編) 상(上) '역지즉개연(易地則皆然)'에서 비롯된 역지사지는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하라"는 뜻이다. 영어는 참 재미있게 표현한다.

역지사지는 'Put yourself in my shoes'로서 자신의 발을 남의 신발 속에 넣어 보는 것이다. 얼마나 어색하고 아프겠는가? 공감은 아픔을 어루만져 주는 것이다. 그래서 공감은 약이며 마술사이다.

이제 왜곡과 의심에서 벗어나자. 6월에 지방선거가 있다. 네거티브 선거가 '왜곡과 의심'의 표상이다. 분명히 왜곡된 내용을 퍼트릴 것이고 잘못된 정보로 유권자를 현혹시킬 것이다.

채무와 부채에 대한 개념을 호도하여 유권자를 혼란케 하는 행위도 왜곡이다. 채무를 다 갚았다고 하는데도 "정말?"하며 의심하는 태도는 버려야 한다. 이런 왜곡과 의심은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프리덤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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