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19’ 시국에도 멈출 수 없는 한일관계 회복을 위한 정의로운 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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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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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일동상진실규명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 위안부상 반대 수요 정기집회
프리덤뉴스 편집부 freedomnews2020@gmail.com등록 2020.03.19 19:03:40
‘무한병참(武漢兵站)’(야마다 세이키치(山田淸吉) 저)을  소개하고 있는 공대위 최덕효 대표
‘무한병참(武漢兵站)’(야마다 세이키치(山田淸吉) 저)을 소개하고 있는 공대위 최덕효 대표

 

18일 수요일 낮 12, 15차 위안부상 반대 기자회견이 주한일본대사관 인근에서 반일동상진실규명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의 주관으로 열렸다.

이 날은 특별히 나수열 공대위 부대변인이 소개한 야마다 세이키치씨가 지은 일본군 위안소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적은 [무한병참]이라는 책의 일부분이 눈길을 끌었다.

이 책은, 중국 후베이성의 적경리(積慶里)의 일본군 무한 병참(후방 기지)에 설치된 위안소를 실제로 관리했던 일본군 장교의 수기이다.

이 책에서의 기록은 정의기억연대(정신대대책협의회 후신)에서 위안부와 위안소에 대해 지금가지 주장했던 것들이 사실과는 다른 내용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어 흥미롭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위안소의 경영도 일본군이 아닌, 조선인을 포함한 민간 업자들이 하고 있었고, 일본군은 그 민간 업자들을 관리 감독하면서 불법 행위를 단속하고 있었다. 또한, 위안부들은 화대의 40% ~ 50%를 받았으며 위안부 모집 단계에서부터도 일본 군인이나 헌병대, 경찰이 위안부를 강제동원한 것이 아닌 일본인이나 조선인 포주가 위안부를 모집하여 위안소로 보낸 것으로 증언하고 있다.

‘무한병참(武漢兵站)’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는 나수열 부대변인
‘무한병참(武漢兵站)’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는 나수열 부대변인
맞은 편에서 1인시위를 펼치고 있는 국사교과서연구소 김병헌소장
맞은 편에서 1인시위를 펼치고 있는 국사교과서연구소 김병헌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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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병참(武漢兵站) / 야마다 세이키치 지음.1978 (ISHIGAMI)

 

일본군 위안소의 내실을 적나라하게 적은 [무한병참]이라는 책이 있다. 중국 내륙의 호북성(후베이성) 한구(漢口, 현재의 무한[武漢, 우한]의 일부) 적경리(積慶里)에 있었던 일본군 무한 병참(후방 기지)이 설치된 위안소를 관리한 일본군 장교의 수기이다.

저자는 야마다 세이키치(山田淸吉) 씨이며 1900년에 태어나 한구에서는 1943년에 일본 육군의 대위로 한구 병참의 위안 계장으로 임명돼 위안소를 관리했다. 야마다 씨가 이 책을 펴낸 것은 1978년이며 종군위안부 문제는 한일간의 현안으로 대두되지도 않았던 시기이다.

따라서 이 책의 저자에게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은폐하거나 날조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며 그 내용은 믿을 만하다. 이 책을 읽으면 소위 위안소나 종군위안부가 한국에서 널리 알려진 것과 달리 성노예와 거리가 먼 것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이유 때문인지 위안부에 관한 자료라면 대서특필하는 한국 언론도 이 책에 내용에 대해서는 함구로 일관하고 있다.

한구에 있었던 위안소는 한국에서 항간에 알려져 있는 것과 달리 일본인 위안부와 조선인 위안부가 함께 일했었고 일본인 업자(포주)와 조선인(포주)도 함께 영업을 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모든 위안소에 공통된 사항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한국에서 알려져 있듯이 모든 위안소가 위안부를 강제로 감옥 같은 방에 가두고 성행위를 억지로 강요했던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일본군(병참)은 관리 감독을 했을 뿐 실제 영업은 모두 업자(포주)가 했었던 사실도 알 수 있다.

한구에 있었던 위안소는 한국에서 항간에 알려져 있는 것과 달리 위안소의 경영자는 조선인을 포함한 민간 업자들이었다. 그리고 일본군은 그 민간 업자들을 관리 감독하면서 불법 행위를 단속하고 있었다. 또한 조선인 업자(업주)들도 위안소를 경영했으며 적경리에서는 조선인이 위안소 조합의 부조합장까지 지냈던 것으로 돼 있다. 일본군은 이 조합을 통해 위안고와 위안부를 관리 감독했던 것이다.

물론 모든 위안소에 공통된 사항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한국에서 알려져 있듯이 일본군이 직접 위안소를 운용하며 위안부를 강제로 감옥 같은 방에 가두고 성행위를 억지로 강요했던 것은 아니다. 일본군(병참)은 위안소를 관리 감독을 했을 뿐 실제 영업은 모두 일본인과 조선인 업자(포주)가 했었던 사실도 알 수 있다.

일본군은 위안소를 관리 감독하고 위안부들이 업자들로부터 착취를 당하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도록 관리 감독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위안부들은 화대의 40% - 50%를 차지할 수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위안부가 한 달에 300엔이라는 금액을 벌 수 있었다고 하는데 이 금액은 현재 화폐 가치로 60만 엔 정도가 된다고 한다.

야마다 씨는 한구(漢口) 적경리(積慶里)에 있었던 위안소 20군데 중 11군데가 조선인 업주(포주)가 경영하고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이 한국에서 알려져 있는 것과는 달리 위안소의 경영에는 조선인들도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일본인 업주보다 조선인 업주가 보다 쉽게 조선인 위안부를 모집하고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러한 조선인 업주들도 조선인 위안부들을 여러 수법으로 착취하고 있었다.

또한 야마다 씨의 수기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인 업주(포주)는 직접 조선에서 위안부를 모집하고 직접 한구의 위안소까지 인솔하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일본 군인이나 헌병대, 경찰관이 직접 위안부를 끌고 간 것처럼 인식되고 있으나 일반적인 위안부 모집은 이와 같이 일본인 및 조선인 위안소 업주(포주)가 조선에서 위안부를 모집하여(그 과정에서 사기적인 수법도 동원되었을 것이다) 위안소에 보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것이 모든 위안소에 공통된 사례라고 단정할 수 없으나 적어도 일본군이나 경찰이 마을을 습격하고 처녀를 끌고 가는 것으로 모집이 이루어졌다고는 보기 어렵다.

위안소에서는 운영상의 이유로 위안부에게 충분한 식사가 제공되었고 군의관에 의한 정기적인 검진도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에서는 위안부들이 일본군이나 헌병대, 경찰에 끌려오거나 속아서 위안소에 들어온 온 것처럼 인식되고 있는데 실제로는 제 발로 위안소에 들어온 위안부도 있었던 것이다. 물론 악덕 업주들에게 속아서 들어오거나 업자에게 팔아 넘겨진 사례도 있었을 것이다. 다만 이와 같이 위안소에서 일하는 것을 자원한 사례도 있었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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