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차 위안부상 철거, 수요집회 중단 촉구 공대위 집회, “위안부 증언 번복, 윤미향은 해명하라”
제22차 위안부상 철거, 수요집회 중단 촉구 공대위 집회, “위안부 증언 번복, 윤미향은 해명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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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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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의 초기 증언을 왜곡하거나 번복한 윤미향은 해명해야...

제22차 위안부상 철거, 수요집회 중단을 촉구하는 집회 및 기자회견이 반일동상진실규명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 및 위안부인권회복실천연대 주최로 어린이날인 5일 정오, 주한일본대사관 앞 위안부상 바로 옆에서 열렸다. 이날 김병헌 공대위 공동대표(국사교과서연구소 소장)은 취업사기 등을 거론했던 주요 위안부들의 증언이 전 정의연(정대협) 대표인 윤미향 씨의 책에는 지난 20년 사이 일제에 의한 강제연행으로 왜곡 또는 번복된 것으로 확인됐다며 이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 기자회견문을 발표했다. 최덕효 공대위 공동대표, 위인연 박세원 대표 등도 정대협의 극단적 여성주의 지향과 역사왜곡 문제를 규탄하는 자유연설로 왜곡된 위안부 진실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정대협이 매주마다 수요집회를 주최하는 위안부상 바로 근처에서 열린 이날 집회는 폴리스라인을 사이에 두고 위안부상을 에워싼 ‘반일행동’ 운동권 학생들과 대치전선을 형성, 내내 긴장감이 조성됐다. 특히 백은종씨를 비롯한 일부 반일조장 인사들이 스피커와 차량을 동원하여 욕설과 비난으로 집회를 방해하였으나, 아무런 논리도 없이 '친일매국노'라는 말만 반복하며 공대위의 논리 앞에 호응을 얻지 못했다. 이들은 또 기자회견장 주변을 멤돌며 집회참가자에게 욕설, 야유 등을 퍼붓기도 했으나 찰의 강력한 제지로 우려했던 충돌 없이 마무리됐다.  (이하 사진은 공대위 제공)

<아래는 기자회견문 전문>

사진제공ㅣ반일동상진실규명공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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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차 공대위 기자회견문] 

위안부 증언 번복, 윤미향은 해명하라!

 

1991년 일본군 위안부 김학순씨가 자신의 위안부 이력을 폭로함으로써 위안부 문제에 불씨를 당긴 후 오늘날까지 30년 동안 위안부는 국내로는 갈등과 대립의 원인으로, 대외적으로는 한·일 외교의 크나큰 걸림돌이 되었다. 정부에서는 김학순씨의 위안부 이력 폭로를 기념하여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이라는 국가기념일을 지정하고, 민간단체에서는 전국 도처에 평화의 소녀상이라는 이름의 위안부상을 무려 125기나 세우고 또 앞으로도 세울 계획이다. 반만 년 역사 속에 명멸한 수많은 위인들 중에 위안부처럼 동상을 세워 추앙한 적이 있었던가? 위안부가 대한민국 발전을 위해, 세계 평화를 위해 어떤 공헌을 하였기에 온 세상을 위안부상으로 가득 채우려고 하는가?

위안부상으로 대변되는 반일감정몰이는 마침내 대일 외교를 파탄지경으로 몰아가고, 위안부의 진실을 알리려는 지식인은 상아탑에서 친일 망언자로 핍박을 받고, 거리에서는 백주 대낮에 테러를 당하는 참담한 지경에 이르렀다. 일부 몰지각한 정치인은 친일망언처벌법을 들먹거리며 올바른 목소리를 내는 국민의 입에 재갈을 물리려 하고 있다. 위안부는 이제 5.18, 세월호와 함께 성역이 되고 금기어가 되었다. 目下 대한민국은 이들에 대해서 말하지도 말고 쓰지도 말아야 하는 동토(凍土)의 왕국이 되었다.

이처럼 위안부 문제가 국내외에 갈등과 분열을 초래한 데는 1990년대 초부터 정대협(현 정의기억연대)을 이끌어온 윤미향의 역할이 절대적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윤미향은 자신의 저서인 25년간의 수요일, 2016에서 일제는 1930년대 초부터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식민지 조선과 대만, 중국 등 일본군의 점령지 여성들을 위안부로 끌고 갔다.”고 하는가 하면 우리에게 익숙한 위안부 모두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끌려갔다로 일관되게 기술하고 있다. 이는 대다수 위안부의 초기 증언이 왜곡 또는 번복된 것으로 어떤 연유로 이러한 일이 일어났으며, 그 근거는 무엇인지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에 여성인권과 평화운동가로 널리 알려진 위안부 김학순, 김복동, 길원옥, 이용수씨 등의 증언 번복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고자 한다.

1991814, 언론에 나와 자신이 위안부였음을 폭로하여 위안부의 상징적 인물이 되기도 한 김학순(1924~1997)씨에 대해 윤미향은 김학순씨가 열일곱 살 때 중국 베이징에서 납치되어 일본군 300여 명이 있는 소부대로 끌려갔다.”<25년간의 수요일 p.138>고 하였다. 이 글대로라면 김학순씨는 베이징에서 일본군에게 납치되어 일본군 부대로 끌려가 위안부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1993년에 발행된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1)(이하 정대협 증언집으로 약칭)에 실린 김학순씨의 증언은 이와 다르다.

1924년 만주 길림성에서 태어난 김학순씨는 생후 백일도 안 되어 아버지를 여의고 열 네 살 되던 해에 재혼한 어머니와 함께 살다가 열다섯 살 때 기생을 키우는 양아버지에게 40원에 팔려갔다. 양아버지 집에는 이미 먼저 온 또래의 양녀 한 명이 더 있었다.

양아버지는 두 양녀를 평양기생권번에 보내 2년 동안의 기생 교육을 시킨 다음 국내 영업을 위해 백방으로 뛰었으나 19세라는 나이 제한에 걸려 국내영업이 좌절되었다. 국내에서는 도저히 영업을 할 수 없게 되자 양아버지는 중국으로 가면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며 두 여인을 데리고 중국으로 가게 된다.

양아버지에 끌려 중국 베이징에 도착한 김학순씨는 별을 두 개 단 장교와 군인들에게 납치당했다고 증언하였으나 김씨를 데리고 간 곳이 중국 사람들이 도망치면서 버리고 간 빈 집이었다는 점, 거기서 두 여인을 강간했다는 점, 다음날 아침 김학순씨의 찢어진 옷을 보고 장교라는 남자가 이제 그런 옷은 여기서 입지 못한다.’고 한 점, ‘우리를 직접 관리하는 사람은 없었다.’고 한 점 등을 고려할 때 그들은 일본군이라 할 수 없다.

특히 1991년 폭로 당시 김씨는 나를 데리고 갔던 양아버지도 당시 일본 군인들에게 돈도 못 받고 무력으로 나를 그냥 빼앗기는 것 같았다.”<1991. 8. 15. 한겨레>, “양녀들을 이용해 일본군을 상대로 영업을 하려했던 양아버지는 일본군의 총칼에 돈한 푼 받지 못하고 이들을 일본군에게 넘겨주었다.”<1991. 8. 15. 동아일보>는 당시 보도를 보더라도 김씨를 끌고 간 인물은 일본군이 아니라 인신매매범 또는 포주였음이 분명하다.

김학순씨는 일본군에게 납치된 것이 아니라 양아버지에 의해 중국으로 끌려갔다가 군인을 가장한 인신매매범 또는 포주에게 또다시 끌려간 것이다.

비교적 늦게 위안부 피해자 신고를 하였지만 노래를 잘 불러 음반까지 내고, 자신의 이름을 내건 길원옥평화상의 주인공인 길원옥(1928~ )씨에 대해 윤미향은 길씨의 증언이라며 제 나이 열세 살에 일본은 저를 공장에서 기술 가르쳐 주고, 돈도 벌게 해 준다며 속여서 부모한테 말도 못하게 하고 바로 끌고 갔습니다.”<25년간의 수요일 p165>라고 하였는가 하면, 한 인터넷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길원옥 할머니 같은 경우 13살에 평양에서 끌려가셨다.<2020. 4. 3. 오마이뉴스>”고 하였다. 윤미향의 말대로라면 길원옥씨는 13살 때에 평양에서 강제로 끌려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 때 평양기생권번을 다녔던 길원옥씨는 열세 살에 고물상을 하다가 장물을 취급하는 바람에 감옥에 가게 된 아버지 때문에 푸줏간에 20원에 팔렸다가 돈을 번다고 두만강을 건너 만주로 가서 위안부 생활을 했다. 그곳에서 길씨가 성병에 걸려 더 이상의 영업을 할 수 없게 되자 주인인 포주는 한국 사람을 딸려 귀국시켰는데, 이때가 15세 무렵으로 몸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였다.

귀국한 길씨는 군수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권번 친구들을 만나 중국에 가면 편안하고 돈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함께 평양역을 출발하여 압록강을 건너 북중국으로 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냥 술집에서 노래나 하고 술을 파는 줄 알았을 뿐 위안소인 줄 몰랐다고 한다. 이러한 길씨의 증언에 따르면 13세에 만주로 갈 때나 15세 무렵에 중국으로 갈 때나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간 것이지 일본군에게 끌려간 것이 아니다.

김복동이라는 영화와 김복동 센터 건립으로 널리 알려진 김복동(1926~2019)씨에 대해 윤미향은 김씨를 강제로 끌고 간 사람을 한 일본군과 마을 이장’<25년간의 수요일 p43>, ‘일본 군복을 입은 군속’<2020. 3. 11. 수요집회 발언>이라 하였다.

하지만, 김복동씨 증언집에는 어느 날 우리 동네의 구장과 반장이 계급장이 없는 누런 옷을 입은 일본 사람과 함께 우리 집에 왔다.”<정대협 증언집2 p85>고 하여 계급장이 없는 누런 옷이라고 하였을 뿐 그 신분을 밝힌 바가 없다. 그리고 이어지는 증언에서 김씨는 결국 그렇게 해서 나는 끌러가게 되었다. 그 일본 사람은 나를 버스에 태워 부산까지 데려갔다.”, “부산서 배를 탈 때부터 나를 데려갔던 일본 사람과 부산에서 우리를 지킨 조선인 남자가 우리를 인솔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부터 같이 간 일본사람과 조선 사람이 계속 우리를 데리고 다녔다.”, “관리인은 처음부터 같이 다녔던 일본에서 자란 40대 한국인이었는데 우리는 이 사람을 니상(오빠)’이라고 불렀다. 이 사람은 마음에 드는 위안부를 골라 데리고 자기도 했으며, 위안부들이 말을 안 들으면 막 때리고 욕을 했다. 위안소에서는 항상 일본말을 썼다.<이상 정대협 증언집2 p84~p99>”고 증언했다.

김복동씨의 구술 자료 어디에도 일본군이나 군속이 등장하지 않는다. 더구나 증언에 등장하는 일본인은 양산에서부터 부산, 시모노세키, 대만, 광동,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홍콩 등지를 이동하면서 계속 김복동씨를 비롯한 위안부들을 끌고 다닌다. 결국 김복동씨를 끌고 간 사람은 정신대동원이라는 명목으로 공무(公務)를 사칭한 일본인과 조선인 포주였던 것이지 일본군이 아니다.

이용수(1928~ )씨는 20175월 성주 미군의 성주 사드 기지 설치에 반대하며 어떤 미국 연놈이 우리 대한민국에다가 사드, 택도 없는 소리 하지 마라고 일갈했으나 그로부터 6개월 뒤 내방한 트럼프 미대통령과 포옹한 위안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윤미향은 이용수씨를 언급하며 나는 밤에 자다가 강제로 일본 군인들에게 끌려갔습니다. 나는 위안부가 아닌 이용수입니다.<25년간의 수요일 p48>”라는 발언을 인용했다.

하지만, 이용수씨는 1993국민복에 전투모를 쓴 일본인 남자가 건네준 옷 보퉁이 속에 있는 빨간 원피스와 가죽구두에 마음이 혹해 다른 생각도 못하고 선뜻 따라나서게 되었다.<증언집1 p124>’고 증언하였다. 빨간 원피스와 가죽구두에 홀려서 자신도 모르게 따라 나선 것이지 일본군이 끌고 간 것이 아니다.

이상 상기 4인의 증언을 보면 애초에 양아버지에 의해(김학순), 공무를 사칭한 사기범에 의해(김복동), 중국에 가서 돈을 벌기 의해(길원옥), 빨간 원피스와 가죽 구두에 홀려서(이용수)라고 하였으나 20여 년 사이에 모두가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갔다고 바뀌었다.

이에 우리는 윤미향에게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 상기 4인의 증언이 20여 년 사이에 왜 왜곡되거나 번복되었는지 해명하라!
  • 상기 4인의 위안부가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갔다는 증거를 제시하라!

 

2020. 5. 5.

위안부상 철거와 수요집회 중단을 촉구하는

반일동상진실규명공대위 / 위안부인권회복실천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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