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07 22:52 (일)
[라떼 이야기-3] 잊지 못할 분들 ! (1)
[라떼 이야기-3] 잊지 못할 분들 ! (1)
  • 프리덤뉴스
  • 승인 2021.03.2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라떼 이야기-3] 잊지 못할 분들 ! (1)

 

30여 년 전 일이다. 손님이 오셨다기에 사무실에서 문을 열고 나가보니 중학교 때 은사 님 김문주 선생님이시다.

40여년 만에 처음 뵙기도 하지만 순간 온 몸에 전기가 흐르는 듯 얼어붙는다.

회장실에 왔다가 김 사장 얘기가 나와 온 김에 보고 간다고 들리셨다고 한다. 

두 분이 고향 친구 사이인 것을 나는 몰랐다.

중학교 1학년 때 시험을 보면 서 뒤 친구가 커닝 페이퍼를 부탁하기에 철 없이 뒤로 손을 내밀어 전달하고서 앞을 보다가 감독 선생님 눈과 마주쳤다. 순간 간이 콩 나만 해지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선생님 눈빛을 보니 커닝 장면을 본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선생님은 못 본 듯이 눈길을 딴 데로 돌리셨다. 

청운의 꿈을 안고 상경한 놈이 커닝으로 정학을 당했다면 그 뒤의 나의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 선생님이 이름도 잊지 못할 김문주 선생님이시다.

ROTC 2기로 임관하여 처음 배치된 곳이 수송 학교 신병 훈련대대 구대장이었다

사실은 잠시 사령부 배구팀 감독을 맡았다.

수송학교 특과 교육 과정 중 수석 졸업생은 육군본부로 발령되는 것이 관례였으나 인사참모가 배구팀 감독을 할 장교를 찾지 못해 애를 먹다가 체육시간에 배구시합하는 장교들을 보고 사전에 점을 찍어 둔 모양이었다.

인사참모에게 설득 당해 감독직을 수락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군복 대신 체육 유니폼으로 사령부를 다니다가 문제가 생겼다. 

사령부내 장교들로부터 우수한 장교를 잘 못 활용한다는 명분에 밀려 구대장으로 전보된 것이다.

하루는 주번사관 당직으로 부대를 순찰하고 마지막으로 취사장에서 돼지고기가 가마솥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당직실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가마솥에 들어간 것으로 사병들 입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삶은 돼지고기가 살아나서 부대 철조망 담을 넘는 다는 것을 신출내기 소위가 어찌 알리오.

당직실이라고는 군용 스토브 옆에 펴논 야전 침대 위에 군화를 신은 채 담요를 덮고 자는 곳이다.

잠이 들었는가 싶었는데 잠결에 목이 간질간질한 것을 느껴 눈을 떠보니 건장한 사병이 스토브 옆에 있는 1m 남직한 쇠꼬챙이로 내 목을 겨누고 찌르기 작전이다. 

1초도 안 되는 순간에 머리를 스친 것은 찌르고 싶었으면 찔렀을 것이다. 

눈을 다시 감고 생각했다. 

갑자기 일어나면 무의식적으로 찌를 수도 있다. 

시간을 벌고 잠시 후 쇠꼬챙이를 손으로 밀치고 일어나 보니 술 냄새가 코를 찌른다. 

조용히 달래서 내무반으로 돌려보냈다.

그 전날 이 병장이 나한테 침대 방맹이로 늘씬하게 맞았다.

대대본부에서 놀고먹는 것은 차치하고 조폭처럼 하사까지도 부려먹는 꼴이니 신참 소위 눈에는 군대 기강이 말이 아니다.

기합 장면을 보고서 옆 구대  중위가 뒤늦게 한 말 “ 김 소위! 그 친구 영창 살다 나온 놈이야!”

전과가 뭔지 모르겠지만 분명 하극상이었을 테니 나만 모르고 고참 모두가 알아서 긴 셈인데 신참 소위에게 맞았으니 스타일을 구겨도 단단히 구긴 셈이다.

수기사 BOQ 1964년 그림 우양 作

문제는 당직 일지에 술 취해 상사를 위협한 하극상 사건을 보고할 것인가였다. 

전과도 있는데 이번 사건으로 이 사병은 재범으로 더 큰 처벌을 받고 사회의 낙후병이 될 것이다.

이 때 문득 중학교 1학년 때 커닝사건이 머리에 떠올랐다. 

김문주 선생님의 눈 빛-정학보다도 더 많은 깨달음을 준 눈 빛!

나중에 미보고로 나에게 불이익이 돌아올지 몰라도 그를 믿어보자.

그 후 그 사병은 내 눈길을 피하지만 나도 어느새 김 선생님의 눈빛을 닮아 간 것이다.

또 잊지 못할 분은 이름도 성도 모르는 철도 기관사 분이다.

6.25 전쟁 직후 우리나라 철도는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낙후되어 있었다.

625때 폭파된 한강철교를 미공병대가 임시 복구한 철교 덕택에 서울 부산 간을 하루 종일 걸려서 갈 수 있었다. 

그나마 표를 살 수 있으면 다행이었고 열차 칸은 콩나물시루였다.. 건장한 젊은이들은 짐 선반에 올라 누워 침대칸 특실이었다.

1951년 6월 하나강 철도 임시 개통식 (미 공병대) 옆 철교는 아직 폭파된 채로 있다.
무단 침대칸 승차자를 제지하는 승무원

일제 시대 물려받은 열차도 낡아서 중 1 여름 방학 때 부산 집으로 가는데 갑자기 '퍽' 하면서 열차 유리창이 깨어져 창 옆에 탓 던 군인 얼굴이 파편으로 피를 흘린다. 

다행히 나는 그 옆 자리이기에 모면하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열차가 상하행선이 교차하면서 열차 사이의 압축 공기가 패킹이 불실한데다 지금처럼 안전 유리창이 아니었기에 깨진 것이다.

앞서 얘기한 수송장교 특과교육 과정 중에 우리나라에서 철도 구배가 제일 심한 곳이 꽈리굴의 태백선도 아니고 뜻 밖에도 慶全線의 마산과 군북 구간이라고 하여 놀랐다. 

그 강의를 듣고 보니 어릴 적 부친이 군북국민학교 교장시절 내 나이 3~4살 즈음 기차여행을 하는데 기차에서 승객들과 짐을 모두 내리게 하고 걸어 올라가서 언덕 꼭대기에서 빈차로 올라온 기차를 다시 탄 기억이 불현 듯 되살아났다. 

지금은 복선화하면서 그 영광을 태백선으로 돌려주었다.

1957년 고등학교 교정에 어느 날 기관차가 통나무를 깔고 굴러간다.

6.25때 인민군이 학교 보일라까지 해체하여 가져 간 바람에 당시 보일러 만드는 공장도 없고 하여 대안으로 폐차된 기관차를 갖고 와 보일러로 대치한 것이다. 

요즘은 보일러도 필요 없이 지역난방으로 겨울을 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니 이런 얘기를 하면 결국 라떼 얘기인 셈이다.

운동장을 굴러가는 기관차 그림 우양 作
2010년 졸업 50주년 행사 때에 보일러 실 옆에서 반갑게 발견한 새 보일러로 교체된 기관차 잔해

대학이라고 들어 간 곳이 서울 시내도 아니고 경기도 남양주군이기에 교통이 여간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집에서 청량리 까지 버스로 가서 다시 중량교 태능을 거쳐 신공덕동으로 가야 하니 족히 2시간은 걸린다. 

학교 기숙사가 있지만 가정교사를 해야 하니 그럴 형편도 안 된다.

 

다행히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춘천행 통근열차가 신공덕역을 거쳐 화랑대역(태릉) 쪽으로 운행하지만 일반 여객 열차도 있었지만 일부 열차는 화물차에 공원 벤치 같은 나무의자를 맞대어 놓은 것이 고작이었고 겨울에는 군용 스토브를 가운데 놓고 연돌을 열차 지붕을 뚫어 놓았지만 실제로 연탄이나 장작을 때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공학도를 기다리는 기관사와 나무의자와 군용 스토브의 통학 열차

서빙고 다음 금호동에 간이 정거장 역 건물도 없이 그냥 통근열차가 정차한 곳이 지금의 응봉역 부근인 것 같다.

한 번은 철둑 가까이 가기 전에 벌써 열차가 오고 있다.

사람 키만 한 제도용 T자와 책가방을 양손에 들고서 뛰기 시작하는데 벌써 기차는 도착하여 출발하려고 한다. 

기관사가 내려다보고서 안 서러운지 내가 탈 때 까지 출발을 하지 않고 기다려 준다. 

허급지급 달려서 철둑까지 왔으나 계단도 없는 철둑을 기어오르려고 하니 숨이 목까지 찬다.

간신히 철둑을 올라왔지만 플래트폼도 없으니 기차를 타려면 엄청 높아서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T자와 책가방을 우선 열차 계단에 던지고서 양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철봉에 오르듯이 간신히 기차를 탄다.

지금은 폐선되어 찾아 볼 수 없는 서울 공대생들이 애용하던 신공덕역

지금 생각하니 열차가 버스도 아니고 승객을 기다린다는 것이 말도 안 되지만 나한테는 정말 잊지 못할 고마운 기관사 아저씨 였다.

당시만 해도 대학생이 요즘처럼 많지 않을 때이라서 대접을 받은 셈인가? 아니 매일 신공덕역에 태워다 주던 학생이 눈에 익어서인가? 아니 한 때 인기리에 상영된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 '덕수'처럼 대학에 입학한 자기 동생이라고 생각하고 "오늘은 저 녀석이 늦잠을 잤나?" 하고 기다려 준 것인가? 아니면 기계를 다루는 기관사 분이시기에 낙후된 이 나라를 일으킬 공학도가 되기를 바라는 동병상련의 정이 발휘된 것인가?

이름도 성도 모르고 감사하다는 인사말도 전하지 못했지만 그날 그 기관사님이 말없이 나에게 베푼 친절은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할 뿐 아니라 내가 엔지니어로서 걸어가는데 길잡이요 채찍이 된 것은 틀림없다.

지금 살아 계시다면 100세 가까이 되셨을 것이다. 계속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