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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광제 時論] 역사전쟁, 과연 전쟁인가? 8
[정광제 時論] 역사전쟁, 과연 전쟁인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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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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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않아

혼합경제체제는 당시의 세계적 사조

근로자가 기업의 이익을 균점한다는 조항은 헌법 초안에는 없었다. 

헌법을 통과시키는 본회의 석상에서 어떤 의원이 “공산주의와 대응하는 마당에 있어서 근로자들에게 기업의 이익을 균점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해야 합니다”라고 긴급 발의를 하니까 모두가 “옳소” 해서 급하게 통과

[제8편] 역사전쟁, 과연 전쟁인가? 

정광제(이승만학당 이사)

 

노무현 정부 때 각종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보상위원회가 있었는데 그건 사실 정치권력의 힘으로 역사를 뒤엎는 일이었다. 

그 당시 각종 위원회에 들어간 사람들을 보면 역사학계에서도 저분들이 누구인가 싶은 사람들이 끼리끼리 들어갔다. 

그들이 제주 4․3사건을 비롯한 여러 사건을 규명하는데, ‘여하간 국가가 잘못했다’는 식으로 결정을 냈다. 

그때 벌써 대한민국의 역사가 뒤집힌 것이다. 국민과 학계는 제대로 방어를 할 수 없었다. 

대한민국의 현실은 그렇지 않고, 대다수의 국민은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역사 해석을 뒤집어 놓았다.

그렇기 때문에 요즘 교과서 논쟁이라는 것은 정치권력의 힘을 빌려 자신들이 뒤집어놓은 역사가 다시 제자리로 되돌아갈 것을 염려하여 사실이 사실대로 알려지는 것을 미연에 차단하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 좌익의 입장이고,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대한민국을 중심에 놓는 역사 인식을 회복하겠다는 입장인 것이다. 

세상에 어떤 나라가 상대방의 입장에서 자신의 역사를 해석하려 할까? 

결국은 1948년의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수립된 것을 긍정적으로 보느냐 부정적으로 보느냐 하는 근본적인 해석에서 갈리는 것이다.

한국인들에게 민족, 민중, 자주 등은 보편적 가치로서 큰 호소력을 지닌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근대문명의 핵심적인 원리라고 할 수 있는 사권(私權)의 주체로서의 개인이란 범주, 그 개인의 자유라는 개념 등은 여전히 오늘날 한국인에게 낯설다는 뜻이다. 

그런 가치와 이념은 19세기까지의 우리 역사에서, 다시 말해 성리학으로 통합된 조선왕조 시대에, 제대로 성숙하지 못했다. 

바로 그 이유로 19세기 후반 서구 근대문명의 도전을 맞아 조선왕조는 해체되고 말았다.

그 같은 제약 조건은 크게 보면 1948년 건국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가 싫어서 대한민국의 건국에 동참하기는 했지만, 어떠한 국가체제를 추구할 것인가를 둘러싸고서는 생각이 각기 달랐다. 

엄밀히 말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않았다. 

건국 당시에는 이승만 박사조차 중요 산업은 국가가 장악하고 그 밖의 산업은 기업가들에게 맡기고 재산권에 대해서도 공공적인 통제를 가하는 일종의 혼합경제적인 체제를 구상했다. 

혼합경제체제는 당시의 세계적 사조이기도 했다.

건국헌법에 들어가 있는 근로자의 이익균점권(利益均霑權)도 그러한 시각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근로자가 기업의 이익을 균점한다는 조항은 헌법 초안에는 없었다. 

그런데 헌법을 통과시키는 본회의 석상에서 어떤 의원이 “공산주의와 대응하는 마당에 있어서 근로자들에게 기업의 이익을 균점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해야 합니다”라고 긴급 발의를 하니까 모두가 “옳소” 해서 급하게 통과되고 말았다. 

그것은 혼합경제의 사회복지국가의 모색이라기보다 기업의 본질이나 시장경제체제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없는 당시의 지적 사조를 반영하는 현상이다. 

그래서 건국헌법의 혼합경제 조항은 현실적으로 전혀 구속력이 없었고, 이후의 헌법 개정의 과정에서 모두 삭제되고 말았다.

이승만 박사 자신은 오늘날 말하는 사회민주주의적인 이상을 가진 분일 수도 있다. 

1923년에 쓴 글을 보면 “공산당의 당부당(當不當)”이라는 짤막한 논문이 있는데, 그 당시 웬만한 애국자들 대부분이 소련 공산당의 지원을 받으면 소위 민족해방, 계급해방을 한꺼번에 이룰 수 있다고 해서 혹할 때였다.

이승만 박사는 “공산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노동자, 농민이 잘 살 수 있고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세상, 그게 바로 내 꿈이다. 

그러나 공산주의식으로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을 골고루 나눠주고 기업가들을 홀대하면 사회가 발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공산주의 이론은 절대로 안 된다”라고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1946년에 대동신문에 실린 국가구상을 보면 평등을 가장 먼저 강조했고, 조소앙 선생이 사회민주당을 창당할 때도 혁명적 공산주의에 대해 사회민주주의가 가장 좋은 대안임을 인정하며 축사를 했다. 

하지만 좌파가 원했듯이 해방 후 곧바로 사회주의 사회를 만든다는 것은 어리석다. 

절대적인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선 독립을 해야 하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에 대한 인식이 겨우 싹트기 시작하는 가운데 경제 건설에 모든 힘을 집중해야 하는 단계에서 사회민주주의란 자유민주주의를 거치면서 지향해야 할 이상이었지 즉각 시행에 옮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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