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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광제 時論] 역사전쟁, 과연 전쟁인가 18.
[정광제 時論] 역사전쟁, 과연 전쟁인가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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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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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주의정치 건국 이후 근 40년간 지속

그 시기는 한국인들이 민주주의를 학습하는 과정

 헌법상 아무런 권한이 없는 부통령을 국민이 직선하는 이상한 제도

부통령제는 정계의 원로를 대우하고 정권을 안정시키자는 취지, 그런데 현실은 정반대

역사전쟁, 과연 전쟁인가 18.

정광제(이승만학당 이사) 

 

요즈음 민주화 세력을 근대화, 산업화 세력과 대비시켜 대한민국 역사를 설명하는 풍조가 강한데, 그러한 단순대비 방식에는 많은 문제가 있다. 

산업화세력이 어떤 사람들인지 이해는 쉽지만, 민주화세력에 대한 이해는 쉽지 않다. 

민주화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사형을 당하고 옥살이도 했는데, 민주제의 핵심인 자유선거와 그것을 제대로 시행할 환경을 만들기 위해 그런 엄청난 희생 을 각오했다는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민주화운동을 했던 세력 가운데는 혁명을 꿈꾸는 사회주의자 들도 포함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와 같은 고통스러운 민주화운동이 없었던 대만이 민주화를 달성한 것을 보면 더욱 더 그런 생각이 든다. 

우리의 경우 민주화운동은 급진주의 운동과 적지 않게 겹쳐있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의 시발점이 1948년 임을 깨달아야 한다. 

4․19가 민주주의의 시발점이라는 이야기들을 많이 하는데 그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이다. 

대한민국의 헌법에서 민주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보장해 놓았기 때문에 4․19 같은 지식인 의거가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4․19는 부패와 부정으로 자유민주주의의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가운데 그에 대한 항의를 직접적으로 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즉 민주적인 시민의식이 성숙해서 표출됐다는 점에서 굉장히 중요한 분기점이지만 민주주의의 법적인 기틀은 이미 1948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승만, 박정희 어느 시기도 전체주의와는 완연이 구분되는 시기이다. 

그러나 대통령에의 권력집중도라든지 삼권분립 원칙의 빈곤성 등에 비추어 대체적으로 권위주의적 면모가 강했던 시대인 것은 틀림없다.

따라서 87년 이후를 민주화 시기라고 부르는 것도 큰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48년에 제도 차원에서 민주주의가 도입된 것은 틀림없지만 상당기간 실천에서 미흡했던 것도 간과할 수 없다.

1948년 건국 당시부터 한국인들이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훌륭하게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생각 자체가 하나의 환상이다. 

하지만 민주제 정치의 본질은 정권교체를 전제로 한 자유, 보통선거이다. 

그러한 자유, 보통선거는 건국 초부터 어김없이 실시되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는 정권교체의 가능성이 거의 없었던 권위주의 정치였다. 

유력한 정치지도자의 카리스마가 국민을 동원하는 그러한 시대였다. 

국민을 정치에 동원하는 유일한 힘과 권위는 집권자의 카리스마였다. 

다시 말해 그러한 카리스마로부터 자유로운 시민적 교양의 중산층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도적으로 자유, 보통 선거가 실시되더라도 정권교체의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다. 

그러한 권위주의정치가 건국 이후 근 40년간이나 지속되었다. 

그 시기는 한국인들이 민주주의를 학습하는 과정이었다. 

그 과정에서 지도자의 카리스마로부터 자유로운 시민적 교양의 중산층이 성장하였다. 

그래서 1987년 이후가 되어서야 진정한 의미의 민주제 정치가 가동되었던 것이다.

87년 이전 40년간 한국의 민주주의를 제약했던 또 하나의 조건은 정치의 분열이었다. 

예컨대 건국 초기부터 정치지도자들은 신생국의 정부형태를 대통령중심제로 할 것이냐, 아니면 의원내각제로 할 것이냐를 두고 대립을 벌였다. 

대통령중심제만 해도 대통령 간선제냐 직선제냐의 대립이 있었다. 

이런 대립에 타협점은 없었다. 

정부형태를 둘러싼 대립은 크게 보아 1963년 제5차 개헌 때까지 이어졌다. 

그 사이에 있었던 1960년의 4·19는 타협을 모르는 무한 정쟁으로 빚어진 비극이기도 하였다. 

4·19의 직접적 원인이 된 것은 부통령직선제였다. 

1950년대 한국 정치는 헌법상 아무런 권한이 없는 부통령을 국민이 직선하는 이상한 제도를 보유하였다. 

돌이켜 보면 참 납득하기 일이다. 

그럼에도 엄연히 그런 모순의 제도를 운영 하였다. 

56년, 60년 선거를 둘러싼 여야 간의 최대 쟁점은 결국 부통령 직선이었다. 

부통령제는 헌법을 초안한 유진오 선생이 만든 것인데, 정계의 원로를 대우하고 정권을 안정시키자는 취지였다. 

그런데 현실은 정반대였다. 

다 아시다시피 56년 대선 때 신익희 민주당(야당)대통령 후보가 갑자기 사망했다. 

그런데 장면 부통령 후보는 끝까지 선거를 치렀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야당에게 대통령 후보도 없는데 왜 부통령 선거를 끝까지 치르는가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당신은 이미 나이 80이 넘어서 곧 죽을 사람이니까 부통령 자리라도 우리가 차지해서 장기독재를 막겠다”고 대답하였다. 

최근에 나온 ‘귀태’ 발언과 거의 같은 수준의 정쟁이었다. 

그렇게 아무 실권도 없는 부통령 자리가 정권 승계에 핵심자리로 과잉 부각되면서 끝을 모르는 무한 경쟁을 벌였던 것이 당시 한국 정치의 수준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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