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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 시리즈-48] 역사의 우연과 내년 대선의 전망
[한가 시리즈-48] 역사의 우연과 내년 대선의 전망
  • 김기수 기자
  • 승인 2021.07.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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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 시리즈-48] 역사의 우연과 내년 대선의 전망

 

6월 29일 수도 서울 한 복판인 종로 2가 인사동 79번지 피맛골에서 훈민정음 창제 당시인 1434년 만들어진 갑인자로 추정되는 금속활자가 다량 발견되어 학계를 흥분시키고 있다.

앞으로 갑인자로 확인될 경우 세계적으로 공인되고 있는 구텐베르크의 성경 인쇄보다 26년 앞선 활판인쇄로 역사를 새로 쓸 중대한 발견이나 최근 대선 주자들의 출마 선언 뉴스속에 묻혀 안타까울 뿐이다.

[사진: 인사동 79번지 피맛골 문화재 발굴 현장(좌) 금속활자(우]

금속 활자들이 지하의 항아리 속에서 발견된 미스테리는 임진왜란 (1592년) 때 피란 가면서 항아리에 묻은 것이 아닌 가 추정하기도 한다.

625 때 창녕 남지까지 인민군들이 쳐들어오자 낙동강만 건너면 고향 함안 칠원이라 소개 명령이 내리자 할머니가 귀중품을 항아리에 넣고 뒷마당에 묻고서 어린 손자 손을 잡고 피난 간 기억이 난다. 항아리는 난리를 많이 겪은 선조들의 노하우로 짐작된다.

금속활자가 발견된 이곳은 조선시대 양반 행차를 피해 서민들이 다니던 피맛골 뒷골목을 들어가면 요즘도 길을 찾기 힘들 정도이니 재개발하기 위해 정지 작업을 하다가 우연히 역사적인 유물이 발견된 셈이다.

역사는 우연의 힘으로 쓰지는 경우가 많다. 과연 내년 대선에서 어떤 후보자가 어떤 우연의 연고로 방점을 찍을지?

먼저 세계적인 우연의 역사의 예를 몇 가지 살펴보고자 한다.

필자가 우리나라 문화재 가운데 손꼽는 신라의 반가사유상 이외에 백제의 금동향로가 있다.

금동향로에 반한 것은 몸체에 새겨진 5악사 이외에 호랑이 등 대여섯 동물을 새긴 것도 그렇지만 몸체를 받치고 있는 비대칭의 용틀임 받침 때문이었다.

[그림:반가사유상(좌)과 백제 금동향로(우) / 그림:愚羊]
[그림:반가사유상(좌)과 백제 금동향로(우) / 그림:愚羊]

이 역사적인 문화재가 발견된 것도 우연이었다.

1993년 부여의 능산리 고분을 찾는 관광객을 위한 주차장을 건설하는 도중 진흙 속에서 발굴되었다.

1,300여 년 동안 원형이 하나도 손상이 안 된 것은 진흙에 잠긴 진공 상태에서 보관되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이곳은 백제 왕실의 절터로 제사를 위해 보관 중이던 대향로를 나당연합군의 말발굽 소리에 놀란 주지스님이 황급히 진흙 속에 묻은 것을 하늘이 백제 장인의 혼이 들어간 향로를 후대에 전하기 위해 진공 속에 보관한 것이리라.

 

4,000여 년 전 이집트 문명은 이집트 상형문자의 해독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이 또한 1799년 이집트 원정에 나선 나폴레옹 군대가 항구도시 로제타에서 고대 그리스어와 이집트 상형문자로 같은 내용을 새긴 돌덩이 즉 로제타스톤(Rosetta Stone)을 우연히 발견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로제타스톤과 유사한 고고학계의 세계적인 발견이 우리나라에도 있었던 것을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필자도 임효재 전 서울대 박물관장의 안내로 연천 전곡 선사유적지를 2016년 답사하면서 알게 되었다.

세계 고고학계에서는 석기시대 문명의 도구인 아슐리안 주먹도끼는 프랑스의 아슐 지방에서 발견되어 유럽은 석기시대의 문명국이었고 주먹도끼를 사용하지 않은 아시아는 미개국인 셈이었다.

 

그러나 이 모비우스의 학설을 바꾸게 된 사건이 1978년 전곡리 한탄강에서 발생했다. 

한국 연인과 데이트하던 고고학 전공자였던 미군 병사 그레그 보웬이 주먹도끼 를 우연히 한탄강 모래사장에서 발견한 것이다.

그레그 보웬
그레그 보웬

 

당시 데이트 장소가 마땅하지 않았는지 한탄강으로 안내한 한국 여인과의 데이트 때문에 대 발견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 또한 얼마나 우연인가?

그레그 보웬은 그 여인과 미국에서 결혼하여 해로하였다 한다.

『왕오천축국전』은 통일신라시대 승려인 혜초(慧超 704~787)가 쓴 ‘다섯 천축국을 여행한 기록’으로 세계 4대 여행기로 손꼽힌다.

13세기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보다 600여 연 앞선 세계 최고의 여행기로 역사적 가치가 높다.

그러나 『왕오천축국전』이 우리 곁으로 돌아온 것은 2010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이 국립중앙박물관의 요청으로 “실크로드와 둔황” 특별전에 대여 형식으로 출품하여 성사된 것이다.

『왕오천축국전』이 혜초의 손을 떠난 지 약 1,200여 년이 지난 1,908년 프랑스의 탐험가 폴 펠리오(Paul Pelliot, 1878~1945)에게 넘겨진 사유도 역사의 또 다른 우연의 발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가 2005년 실크로드 탐방에 나설 때는 관광 인프라가 갖추어지기 전이어서 한국어 가이드도 없이 위그루인이 영어로 해설을 하면 마침 일행 중 영문과 여교수가 우리말로 통역을 할 정도였다.

도로도 불비하여 고비 사막 한가운데를 버스가 달리니 휴게소가 있을 리가 없고 사막 한가운데 버스를 세우고 버스 좌측 사막은 여자 화장실 우측은 남자 화장실로 이용하였다.

거기까지 좋았으나 오아시스 휴게소의 식당에서 먹은 점심이 위생이 불결하여 모두 설사로 고생하여 관광은 뒤로 하고 화장실 찾기에 바쁠 지경이었다.

설사로 고생하는 愚羊. 一圓은 愚羊의 법명

돈황에 도착했을 때 한국어가 가능한 돈황석굴 연구원 리신(李新)의 안내로 막고굴(莫高窟)을 둘러볼 때 제17석굴에서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경위를 설명하였다.

 

막고굴에는 제17석굴을 비롯하여 물경 812개굴이 있다.

이들은이 간직한 불교문화 유적가운데 벽면에 새겨진 불교 관련 채소화(彩塑畵)를 연결하면 서울서 인천까지의 거리에 해당 될 정도라고 하니 그 규모를 상상할 수 있다.

돈황은 중국의 변방으로 항상 동쪽의 불교문화와 서쪽의 이슬람 문화가 충돌하는 접경지역으로 언젠가 티베트 승려들이 이슬람 침공으로 둔황에서 물러나면서 약 5~6만 개의 장경을 제17석굴 내의 별방에 넣고 입구를 벽으로 가장하여 막아버렸다 한다.

1900년 6월 22일,莫高窟 근처 사원의 王圓錄이라는 승려가 제17석굴 벽면을 청소하다가 장경동(藏經洞: 장경이 보관 된 별방)을 발견 한다.

[사진: 돈황의 막고굴의 우측 장경동(벽으로 위장한 것을 뚫은 장면(좌) 문서를 살피는 프랑스의 탐험가 폴 펠리오]

1900년 대 초 청나라는 7세기 대당(大唐) 시절 가욕관에서 죽간 여권으로 실크로드의 무역을 통제하여 실크의 노하우가 유출되는 것 까지 방지하던 지방 행정력은 완전 와해되어 이 틈을 타고 막고굴은 서방 열강의 도굴의 경쟁지로 변한다.

 

막고굴의 불교 유물은 먼저 본 자가 임자라고 제일 먼저 도착한 러시아를 시작으로 영국, 독일 고고학자들이 도굴 하다시피 하여 유물을 반출한 뒤 뒤늦게 프랑스의 폴 펠리오(Paul Pelliot)가 1908년에 도착한다.

그러나 그는 유일하게 한문 해독이 가능하여 그가 귀중한 문서만 챙겨 프랑스로 갔기에 왕오천축국전도 다행히 오늘날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제일 늦게 도착한 일본 학자가 돈황에서 일본으로 운반하던 채소화 4점은 서울에 도착했을 때 해방을 맞아 현재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한국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막고굴 유물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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