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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明時待 마중물] 그 남자
[光明時待 마중물] 그 남자
  • 프리덤뉴스
  • 승인 2021.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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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

 

오래 전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가 전주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을 때의 일이다.

학생부장을 하던 그는 그 당시 야자 중에 몰래 '토낀' 당찬 녀석들을 잡으러 다녔었다.

학생부 학생들과 함께 '토낀' 녀석들이 갈 법한 장소들을 찾아다니면서 잡아다가 학교로 복귀시키곤 했었다.

나는 뭐하러 자서서(스스로) 고생을 사서 하냐고 핀잔을 줬었다.

그냥 학교에 남은 애들이나 잘 지도하지 뭐하러 전주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도망간 애들을 도로 잡아다 학교에 앉혀놓느냐고 쓸데없는 샌님질이라고 독설을 날렸었다.

그때 그가 내게 자주 하던 말이 있다.

 

 

"그놈들도 다 내 새끼여~. 잘못 풀리면 인생을 망치는데 선생이 돼가지고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잖여~. 요놈들이 가는 곳이 다 음지라 그런 거여~.“

 

그랬었다.

'토낀' 녀석들은 주먹패를 동경해서 그 바닥에 기웃대거나 유흥과 오락에 빠지거나 비뚤어진 성행위에 관심을 가진 애들이 대부분이었다.

생활고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그랬던 아이들은 그의 배려로 장학금을 지급받기도 했다.

어떨 때는 그가 우리도 살기 빠듯한 형편에 월급 받기 무섭게 뚝 떼서 학생의 통장으로 들어가게 자동이체를 해버리기도 했었다.

나는 그가 사망할 때까지 월급명세서를 본 일이 없다.

생활비를 받아본 적도 없다.

그는 내게는 정말 야박할 정도로 짠돌이였고 항상 돈이 부족하다면서 내게 '아껴 써~' 를 애용했다.

 

솔직히 나는 그게 불만이었다.

아무리 환자로 집에 있어도 나도 스스로 뭔가를 사고 싶기도 했고, 경조사에 내 이름으로 부조를 하고 싶기도 했고, 시댁 부모님께 내 이름으로 생색도 내고 싶었었다.

친정부모님은 그가 알아서 챙기고 있었으므로 고마운 일이었지만 내 욕심은 남편을 은근히 미워하게 만들곤 했었다.

그런데 살면서 뒤늦게 알게 된 사실들은 항상 나를 스스로 책망하게 했고 그에게 미안하게 만들곤 했다.

 

그는 자신의 통장에 들어오는 선공제되고 지급된 급여에서 친정부모님, 불우한 제자, 경제적으로 힘들어하는 친구 등에게 먼저 지출했다.

그리고 자식을 위한 보험에 지출했다.

생활비는 정말 굶어죽지 않고 남에게 아쉬운 소리 안 할 정도만 남겼다.

그는 자신의 교통비, 시댁 부모님께 찾아갈 때마다 사갈 과일이며 고기 등을 살 돈, 드릴 용돈, 그리고 자신이 혹시 외식이라도 할 때 쓸 아주 적은 돈을 책정해두었었다.

그는 외식할 때 기사식당에서 저렴한 백반을 먹었다.

그러니 내 욕심을 채울 여유는 그에게 없었던 것이다.

 

그런 것도 모르고 주변에서는 월급봉투는 커녕 명세서 구경도 못한 내게 거짓말하지 말라고 하며 왜 항상 돈 없다고 하냐고 핀잔을 했다.

나는 내가 창피한 것 때문에 그를 속으로 미워했었다.

그리고 사실을 알고 난 후 또 미워한 그 이상으로 미안했었다.

사랑은 그렇게 깊어져갔다.

 

오늘 우연히 역사를 검색하다가 한국 폭력조직의 계보와 역사라는 블로거의 글을 보았다.

언젠가 그가 예의 그 밤에 '토낀' 애들을 잡으러 나갈 때,

임신 중이던 내가 입덧이 너무 심해서 아무 것도 못 먹고 있었는데 갑자기 '메밀소바' 가 너무 먹고 싶어서 전화를 했더니 집에 들러 나를 데리고 갔다.

그런데 이 남자가 '메밀소바는 제켜두고 학생부 아이들과 전주의 중심가로 가서 '토낀' 애들을 찾는 거였다.

주딩이가 댓 발 튀어나온 나를 보고 웃으면서 조금만 참으라고, 아주 맛난 메밀소바를 먹여줄 거라고 하면서.

 

그러다 우리는 소위 전주 조폭의 명물 '월드컵파' 를 맞닥뜨렸다.

임신초기여서 배가 많이 나오지 않았던 터라 그 조직의 말단인 양아치 애들이 내게 시비를 붙였던 거였다.

학생부 학생들은 무서워서 그와 내 뒤로 멀찍이 도망했고, 그는 그들에게 "왜 그려?  절로 가!  절로 가라이?"  하고 놀라서 크게 뜬 눈으로 소리만 질렀다.

그 녀석들은 "절로 가기 싫은디?  우덜 절 싫어야?  절은 중이나 가야지이?"  하고 깐죽대며 키들거리고 웃었다.

성질이 불같던 나는 그들에게 "꺼져, 이 양아치 새끼들아!"  라고 소리치고 말았다.

그러자 정말 그들은 때릴 듯이 달려들었다.

그런데 그때 누가 "아니, 송경진 선생님 아니십니까? 선생님!"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시커먼 몇 명이 달려왔다.

 

까만 양복을 빼입고 머리는 깎두기인 그들은 아주 깎듯이 인사를 했다.

놀랐던 그가 그들을 찬찬히 보더니 깜짝 더 놀랐다.

"아니, 너들 OO, OO, OO 아니냐?"

그랬다.

그들은 몇 년 전 졸업한 그의 제자들이었다.

그들은 나를 괴롭히던 부하들에게 호통을 치고 돌려보냈다.

양아치들이 무릎 꿇고 넙죽 절하고 죄송하다고 사과하고 달아났다.

깎두기들은 "아이고 선생님, 아직도 애들 잡으러 다니셔요?  수고가 많으십니다."  하며 웃었다.

예전에 자신들을 잡으러 다녔었다고 내게 너스레를 떨고 한잔 거하게 사겠다며 가자고 했다.

그러나 근무 중이고 나는 술도 못 먹는다고 그가 거절했고, 그들은 나중에 꼭 오시라고 명함을 줬다.

그들은 월드컵파의 중간보스급이라고 했었다.

 

그는 후에 그 일을 가끔 얘기했다.

그날 위기에서 그들을 만나 모면한 것은 다행이었지만,

자신이 어떻게든 음지에서 구해보려고 노력했던 제자들인데 결국 음지에서 그렇게 살고 있었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명함에 있던 그 나이트클럽인지 유흥주점인지를 찾지 않았다.

어쩌다 마주칠까 봐 걱정까지 했다.

그 제자들은 그에게 있어 생인손이었다.

 

그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자신들을 잡으러 다녔고 그랬어도 존경한다던 수학선생님, 송경진 선생님이 돌아가신 건 혹시 알까?

이토록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자진한 것을 알까?

안다면 그 세 명 중 누구라도 그의 복수를 좀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가 도리질을 쳤다.

 

나 자신을 채찍질한다.

내 분노와 원망과 한탄이 날이 갈수록 커지고 깊어지고 있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는다.

저들이 온갖 편법을 동원하고 법과 조직을 악용하여 내 가정을 괴롭히고 있지만, 끝까지 싸울 것이다.

끝까지라 함은 그들이 자복하고 뉘우침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언론을 접하는 사람들의 구미에 맞는 기사들이 때론 내 가정에 치명적 독을 살포하기도 했다.

지금 삶에 지친 국민은 어디라도 분풀이를 하고 싶은 모양이다.

소위 악플러들이 얼마나 많은지!

기사의 진위파악은 뒷전이고, 마치 던져진 먹잇감에 기다렸다는 듯 몰려드는 피라냐 떼처럼 기사가 뜨기 무섭게 자판을 두들긴다.

자신들은 정의롭고 불의한 자들에 대해 성토한다고 자부하며 얼마나 많은 악한 글들을 정의로운 비판을 빙자한 악랄한 비난으로 여과 없이 토해놓는지 끔찍하다.

그들은 그런 기사를 보면 횟감을 발견한 주방장으로 변신하고 난도질한다.

아찔한 대못을 꽂아 꼼짝달싹할 수 없게 하고, 산 채로 비늘을 긁고, 껍질을 벗겨내고, 각을 뜨고, 포를 떠서 자신들이 원하는 회를 친다, 산 채로!

그리고 그렇게 떠진 회를 사이버로 공유하며 함께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며, 먹구름 같은 분노를 키워간다.

아파도 눈물도 흘리지 못한 채 누군가의 상에 올려진 눈만 껌벅이고 입만 달싹이는 회쳐진 물고기처럼 우리 가정은 속울음을 울며 억울함에 가슴을 쥐어뜯고 있다.

 

민사1심 원고패소라는 어이없는 결과를 안겨준 재판부의 성인지 감수성판결문을 보면서 이 나라가 꼭대기부터 뿌리까지 팔이들의 노름판이 된 것을 뼛속 깊이 느꼈다.

그들은 성범죄, 성인지 감수성따위를 정치와 권력의 노름판에 던지고 로또 대박을 꿈꾼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뉘우침 따위는 안중에 없다.

 

교사가 아닌 선생님, 스승으로서 살아온 그는 학생을 단순히 지식전달을 받는 직장의 일감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항상 제자들의 행복과 미래를 생각했다.

자식같은 아이들이 행복한 어른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며 웃음을 주려고 노력했다.

그런 그를 배신한 학생들과 학부모들.

그런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교육부와 국가인권위원회가 그 민낯을 드러내고 수치를 당할 때가 끝이다.

그때까지 싸울 것이다.

 

그 남자.

그는 가정에 최선을 다했고, 형제간 우애했으며, 친구에게 자신을 낮췄고, 직장에서는 제자들의 행복과 미래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는 부안 상서중학교의 수학선생님이었고, 내 남편 송경진 선생님이다.

 

光明時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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