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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실체 고백 [1]
역사의 실체 고백 [1]
  • 프리덤뉴스
  • 승인 2021.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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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를 시작하며.. 松山

학교나 언론에서 절대로 공개하지 못하고, 의도적으로 외면해온 역사의 실체를 어금니 꽉 깨물고 한번 소개하겠습니다.

첨 접하시는 황당한 팩트도 있어서 때론 얼굴을 찡그리실 지도 모릅니다만, 새로운 눈을 뜨는 진통이라고 생각하시고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매번 독립된 주제로 올리겠으며, 반드시 시대순으로 쓰진 않겠습니다.

역사의 실체 고백 [1]

 

  松山 정광제 (이승만학당 이사)

송산 정광제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본의 천황 히로히토는 라디오를 통해 전 세계에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선포했다.

이 항복선언은 이미 8월14일 오전 11시에 녹음되었다가 하루가 지난 뒤 라디오를 통해 발표된 것이다.

이미 두 차례의 원자폭탄 투하로 인해 일본의 패전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후항전을 준비하고 있던 수많은 군인들에게 이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선언이었다.

그 날 천황의 항복선언을 자신의 불충 탓으로 여긴 수많은 일본인들이 혹은 배를 가르거나 혹은 권총의 방아쇠를 당겨 자결했다.

그 수는 5천여 명에 달했다.

일본열도와 전 세계의 일본인들이 이처럼 망국의 비탄에 젖어 있을 때, 전쟁에서 승리한 연합국과 일본군 점령지에서는 일제히 환호의 축포가 울려 퍼졌다.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이 성공한 10일 뒤인 1945년 7월 26일,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 처칠 영국 수상, 장개석 중화민국 총통은 독일 베를린 근교의 포츠담에서 만나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촉구하는 선언을 발표했다.

또한 포츠담 선언에서는 소련의 신속한 대일 개전을 촉구하고 제8항에서 무조건 항복 이후 ‘일본의 영토는 4대 섬과 부속도서로 제한될 것이다’라고 선언하였다.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의 문제가 처음 거론된 것은 1945년 2월에 열린 얄타회담이었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처칠 수상, 소련의 스탈린 서기장은 1945년 2월4일부터 11일까지 크림반도의 얄타에서 회동하여 독일의 전후처리와 소련의 대일 개전 문제 등을 논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미국과 영국은 소련의 극동전선 참전을 촉구하였고 결국 소련은 몽골의 현상유지, 사할린과 쿠릴열도, 여순의 소련 귀속, 대련의 자유항화, 만주철도의 중소 공동운영, 만주에 대한 중국의 주권보장 등의 조건에 합의하고 대일 개전을 결의하게 되었다.

이 회담에서 루즈벨트는 비공식적으로 조선반도에 대해 미중소 3개국에 의한 20년 내지 30년 정도의 신탁통치를 제안하였는데, 이에 대해 스탈린은 신탁통치에 동의 하지만 기간은 더 짧아야 하며 외국군대의 주둔에는 반대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후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영.소 3국 외무장관 회담에서는 조선에 대한 임시정부 수립과 5년간의 신탁통치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이 알려지자 조선반도에서는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대대적인 시위가 조직되었다.

초기 반탁시위는 좌우익 합작으로 진행되었으나 좌익은 곧 찬탁으로 입장을 선회하였다.

이때부터 좌우익, 찬탁파와 반탁파 사이에 내전이 시작되었고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

조선에서 좌우익의 대립은 미소의 대립을 반영하는 것이었고, 조선의 신탁통치 문제는 냉전 대결이 격화되면서 결국 1947년 9월 폐기되고 말았다.

이후 유엔총회는 조선에 대해 자유총선거를 실시해 정부를 구성한다는 결의를 했는데, 이에 따라 선거를 감시할 위원회가 파견되었으나 38도선 이북으로는 접근하지 못했다.

이때 이승만은 ‘정읍선언’을 통해 가능한 지역에서만 총선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김구 등 통합 우선주의자들의 반발을 샀다.

어쨌든 이 선언 이후 남북은 각각 분단상태에서 정부를 구성하는 절차를 시작했다.

전후 조선의 처리 문제에서 중요한 점은 연합국들이 1868년 이후 취득된 일본의 영토를 몰수한다는 합의를 했다는 것인데, 이는 전후 국경설정에서 독일은 물론 다른 국가들도 2차 세계대전 직전의 국경선으로 회귀한 것과 비교해보면 일본에 대해서는 매우 차별적인 조치를 취했음을 알 수 있다.

80년 전의 국경선으로 회귀한다는 결정은 아무리 패전국이라지만 국제적인 전후처리 관행과는 많은 차이가 있는 것이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먼저 북해도를 점령했고 이후 오키나와 등 일본열도 남단의 섬들을 점령했으며, 대만, 사할린과 쿠릴열도, 조선반도, 만주 등을 통합하여 일본의 영토는 점차 확대되었다.

오키나와에 대해서는 패전 이후 괌, 사이판과 같은 미국령으로 유지되어 왔으나 미국은 1972년 오키나와를 반환하였으며 북해도는 처음부터 분단시키지 않았다.

1931년 이후 사실상 일본의 영토가 된 만주에 대해서는 이미 국제연합에서 그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패전 이후 일본은 만주를 비롯해 1930년대 이후 취득한 해외 영토를 포기하는 데 별다른 이의가 없었다.

하지만 이미 국제적으로 승인 받고 정당한 절차에 의해 일본 영토에 통합된 오키나와를 비롯해 대만과 사할린, 조선, 쿠릴열도, 남양군도 등의 영토에 대해서는 패전을 이유로 이들을 일본으로 부터 분단시킨다는 발상은, 일본 입장에서는 사실 정당성이 결여된 조치였다.

연합국과의 합의에 따라 소련은 1945년 8월 8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일-소 불가침조약을 스스로 폐기하였다.

유럽에서 극동지역으로 이동한 소련군은 1945년 8월9일 만주와 한반도로 진격을 시작했다.

우세한 소련군의 화력 앞에서 일본의 극동군은 차례로 궤멸하였으며, 소련군은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뒤에도 계속 진격하여 8월26일에는 조선반도 북부의 평양에 입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8월 10일 미국과 소련은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각각 한반도를 분할점령하기로 약속한 상태였으므로, 소련군은 38선에서 진격을 멈추었다.

1945년 9월 8일 하지 중장이 이끄는 미군 제24군단이 인천에 상륙했으며 9일에는 서울로 들어와 조선총독부를 점령하였고 곧이어 북위 38도선 이남 지역에 대한 군정을 시작했다.

일반 국민은 약하므로 언제나 승리자의 편이다. 오랜 세월동안 일본에 동화되어 일본인으로 살아왔던 조선인들은 전쟁에서 일본이 패망하자, 마치 자신들이 일본인이 아니었던 것처럼 행세하기 시작했으며, 이 같은 추세는 전염병처럼 번져나가 곧 모든 사람들이 숨겨진 항일투사로서 일본의 통치에 저항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세상이 바뀐’ 것이다.

곧이어 소련군과 미군이 진주하여 군정을 시작하자 조선인들은 소련군기와 미국의 성조기를 들고 나와 이들을 환영하였다.

일본 열도에 진주한 미군과는 달리 조선반도를 점령한 소련군과 미군은 대륙에 붙어있는 舊일본 영토를 점령하고 일본군을 무장해제하는 사명을 띠고 있었다.

그들은 조선인과 일본인을 구분할 수 없었으며, 이곳이 조선 이라는 인식도 없었다.

그들에게 조선반도는 단지 일본이었을 뿐이다.

북한 지역에서는 소련군의 약탈과 강간이 빈번했던 탓에 여자들은 바깥출입을 하지 않게 되었으며, 길거리에 여자가 사라지자 소련군은 가택수색을 하여 강간을 하였다.

이때 조선인들은 고쟁이라는 것을 만들어 여자들에게 입히게 되었는데, 이는 치마 안쪽에 입는 짧은 바지로서 요즘의 거들과 같은 의복이다.

하지만 고쟁이도 집안까지 쳐들어와 어린 여자들을 겁탈하는 점령군의 강간을 막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후 한반도는 공산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에 의해 체제경쟁의 전시장으로 변해갔다.

그 결과 1950년 이후 3년간 참혹한 전쟁이 발생하기도 했으나, 본격적인 전쟁이 있기 이전에도 남한은 사실상 좌우익의 전쟁터였다.

이념대립으로 인해 수많은 대량 학살사건이 있었으며 그로 인해 수십만명의 선량한 주민들이 죽어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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