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실체 고백 [2]
역사의 실체 고백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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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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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세력은 주로 해외에 체류하면서 독립운동을 업으로 삼아 생활했던 일종의 ‘독립업자’로서의 성격이 강해 인민의 재산을 노략질했던 룸펜, 혹은 도적떼에 가까운 집단이었다.

전제적인 독재체제 아래 굶주려 죽어가고 있는 북한은 조선 민족 가운데서도 일본 패전의 가장 큰 피해자

종전 이후의 삶을 돌이켜보면 이 가운데 일본에 남아있던 조선인들이 가장 사정이 나았고, 그 다음으로는 남한 주민, 중국의 조선족, 러시아의 까레이스키, 북한 주민의 순으로 불행한 삶을 영위

송산 정광제(이승만학당 이사)

 

전후 한반도는 독일과 함께 이데올로기 대립의 상징이 되었다.

남한에서는 정부 수립 이후 반공이 가장 중요한 통치 이데올로기 로서 작용했는데, 동시에 반일도 그에 못지 않은 통치 이데올로기 였다.

종전 이전 이들 독립운동 세력은 주로 해외에 체류하면서 독립운동을 업으로 삼아 생활했던 일종의 ‘독립업자’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그 중에는 일부 독립이 조선민족에게 지고의 선이라고 믿고 헌신한 지식인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독립운동을 명분으로 삼아 일하지 않고 살아가거나 인민의 재산을 노략질했던 룸펜, 혹은 도적떼에 가까운 집단이었다.

이들은 일본군에게 쫓기거나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기만 하면 모두 독립운동가로 행세할 수 있었던 당시 시대상황을 잘 이용하였기 때문에 도적떼와 독립군을 구분하기란 쉽지 않았다.

남한에서는 정부수립 이후 이 독립운동 룸펜 집단이 친일파를 탄압했다.

이 때문에 남한에서는 누구나 일제시대에 총독부에 저항하거나, 최소한 협조하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같은 분위기가 점차 강화되면서 반일은 한국의 중요한 통치이데올로기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을 점령한 미군정은 일본통치의 유산을 활용하려 하였기 때문에, 정부수립 이후에도 친일파들은 반공운동에 적극 협력하는 전략을 선택함으로써 한국 사회에서 생존할 수 있었다.

일본통치 기간 중 일본은 대륙과 가까운 북한 지역을 주요 산업기지(함흥, 원산)로 육성했다.

이 때문에 북한은 종전 이후 훨씬 유리한 조건에서 출발하여 30년 동안 남한에 대한 국력의 우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남한은 일본통치의 유산 가운데 많은 부분을 계승하였고 또한 1965년 뒤늦게나마 일본과 국교를 수립함으로서 1970년대 이후 체제경쟁의 승리에 도움이 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전국이 됨으로써 가장 큰 피해자가 된 것은 현재의 일본인들이 아니라 한반도에 살고 있던 조선인들이다.

특히 오늘날 전제적인 독재체제 아래 굶주려 죽어가고 있는 북한은 조선 민족 가운데서도 일본 패전의 가장 큰 피해자이다.

종전 당시 조선인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동북아시아 지역의 광범위한 지역으로 흩어졌다.

이들은 주요 5개의 그룹으로 구분되는데, 남한주민, 북한주민, 재일 조선인, 중국의 조선족, 소련의 까레이스키(Corean의 러시아어 발음) 등이다.

종전 이후의 삶을 돌이켜보면 이 가운데 일본에 남아있던 조선인들이 가장 사정이 나았고, 그 다음으로는 남한 주민, 중국의 조선족, 러시아의 까레이스키, 북한 주민의 순으로 불행한 삶을 영위했다.

전후 한국인들은 일본통치 시대 모든 조선인들이 독립을 위해 치열하게 싸웠고 우리는 전쟁을 통해 스스로 독립을 이루었다는 역사를 학습했다.

그 결과 많은 한국인들에게 일본통치 시대는 그저 잠시 강대한 침략자에게 눌려있던 기간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2002년 초 개봉된 한일합작영화 <2009 로스트 메모리즈>는 젊은 세대들에게 그동안 생각지 못했던 시각에서 한일관계를 조명할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이 영화는 소설가 복거일의 1987년작 <비명을 찾아서>라는 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인데, 시대 설정이 다소 참신할 뿐 소설 자체의 스토리는 펑범하기 그지없다.

이 소설은 어느 일본인이 조선반도 북부에서 과거로 여행할 수 있는 유물을 발견한 뒤 그것을 이용해 1909년 하얼빈 역에서 이토의 암살을 저지함으로써 역사가 바뀌게 된다는 설정에서 출발한다.

그 결과 일본은 2차 대전에서 승전국이 되고 2009년 서울은 일본의 제3대 도시로서 찬란한 발전을 이룩하게 된다.

그러나 한국의 독립군 不令鮮人들이 이 보물을 되찾아 다시 역사를 제자리로 돌려놓고 한국은 독립을 이루게 된다는 스토리다.

이 영화는 한국에서 많은 관객을 동원하는 데 성공했다.

한국의 젊은이들 사이에 ‘아직 우리가 일본이라면..’ 이라는 다소 획기적인 발상이 생겨난 것은 어디까지나 이 영화의 영향이라고 하겠다.

2002년 초, 당시 한국의 경제 부총리인 진념씨는 수십년동안 혼란 속에 있는 교육제도에 관해 언급하면서, “한국의 교육제도는 아직 일제시대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해 이를 두고 소란이 일어난 적이 있다.

일제시대가 지옥과도 같았고 해방 후에는 힘들긴 했지만 최소한 일제시대보다는 나은 조건에서 출발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한국의 전후세대들에게 전전세대인 진념씨의 발언은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최근 이루어진 합병 초기 조선토지조사사업에 관한 연구들을 살펴보면, 당시 동양척식회사와 조선총독부의 <임시토지조사국>에 의해 8년 동안 실시된 방대한 조사사업 기간동안 농촌주민들이 물리적으로 저항한 사례는 단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연구자들은 “이 작업을 수행한 총독부의 관료들은 실지조사實地調査나 분쟁지 처리에서 엄정한 공정성에 입각해 깨끗하고 강력하며 효율적으로 임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산업구조 면에서 보면 1940년대 초반 조선 지역은 농업생산 43%, 광공업생산 25%, 기타 32%의 구조를 가지고 있었으며, 무역의존도는 69% 였다.

이 당시 조선은 이미 상당한 수준의 공업국으로 변모해 있었으며 세계 최고 수준의 무역의존도를 가진 ‘수출지향 경제발전’ 전략이 추진되고 있었다.

이같은 산업구조와 무역의존도에 기초해 고찰해볼 때, 남한 경제가 1940년대 초반의 수준을 회복한 것은 아마도 1980년대 초반이 아닐까 생각된다.

물론 이 문제는 차후 보다 더 깊은 조사연구가 필요할 것이나 현재로서는 그 정도로 유추할 수 있다.

1950년대 말에 이미 1940년대 초반의 경제력을 회복한 일본과 비교해볼 때, 이는 25년 정도의 차이가 나는 것이다.

구일본제국의 외지 가운데 대만에 이어 2위에 해당하는 우등생인 남한이 무슨 이유로 40년이 지난 다음에야 일제시대의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인가.

전쟁으로 국토가 초토화되었던 것은 일본도 마찬가지이니 전쟁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결론은 자명하다.

종전당시 조선에는 약 70만 명의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은 전후 승전국들의 결정에 따라 조선에 있는 모든 재산을 몰수당한 채 일본으로 추방되었다.

이들은 합병 이후 일본에서 이주한 공무원, 교사, 경찰, 사업가, 농민, 노동자, 기술자로서 대부분 우수한 인력이었다.

즉 낙후된 조선은 40년 동안 이들의 힘에 의해 고도성장을 지속하며 수출형 공업국으로 발전하였으나, 패전 이후 이들이 한꺼번에 추방당하고 그 자리를 해외에서 귀국한 소위 ‘독립운동가’ 룸펜 집단이 차지하는 지배층의 교체가 일어났다.

이로 인해 조선은 다시 수십년 전의 사회로 후퇴하고 말았던 것이다.

또한 조선은 1940년대 초 국내 총생산의 69%라는 경이적인 무역의존 체질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물론 대부분 내지(일본)와의 무역이었다.

그러나 한국은 정부수립 이후 청구권 문제로 20년 동안 일본과 국교를 수립하지 못했기 때문에 기존의 절대적인 수출시장을 상실하고 말았다.

오늘날 한해 3500억 달러의 교역을 하는 한국경제가 어느 날 갑자기 교역액이 350억 달러로 줄어든다면 파멸상태가 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일본의 패전 이후 한국 경제는 이처럼 비참한 파멸을 경험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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