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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 컬쳐플러스] “가을 저녁에 음미하면 좋을 한 편의 영화, HER”
[이경희 컬쳐플러스] “가을 저녁에 음미하면 좋을 한 편의 영화, HER”
  • 프리덤뉴스
  • 승인 2021.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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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알고있다.

언젠가는 책의 마지막 장을 덮어야할 때가 온다는 것을

급속도로 진화해가던 사만다는 컴퓨터든 인간이든 130억 살짜리 물질에 불과하단 걸 알아차리게 된다.

그리고 인간이나 컴퓨터나 어차피 일정 시간이 지나면 다른 차원의 세상으로 가야한다는 것.

그리고 거기선 똑같은 물질로 함께 할 수 있다는 것

<작가 이경희의 컬쳐플러스>

가을 저녁에 음미하면 좋을 한 편의 영화, HER”

 

영화 ‘HER’2014년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로봇이나 컴퓨터 등의 인공지능시스템과 인간의 교감,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1990년대 말에 상영했던 영화 접속이나 유브 갓 메일을 기억한다.

 

나는 이 영화들을 보면서 익명으로 이 메일을 주고받거나 채팅을 하는 모니터 너머의 대상이 진짜사람이 아닌 컴퓨터라면? 하고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맥라이언에게 메일을 보내는 남자가 탐 행크스가 아니라 그런 이름을 가진 컴퓨터 시스템이었다거나 한석규에게 채팅 메시지를 보내는 여자가 전도연이 아니라 전도연을 흉내 낸 컴퓨터였다면? 당시의 정서로선 두렵고도 소름 끼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20년이 넘게 흘렀다. , 시간의 흐름은 아예 드러내놓고 사람과 컴퓨터의 사랑을 가능하게 만들어 놓았다.

직관을 가지고 사람의 마음까지 읽어내며 매 순간순간 진화하는 인공지능 컴퓨터. 채팅이나 이 메일 같은 평면적 교감이 아니라 수백만 프로그래머의 개인 인격에 기초한, 상대의 생각까지 파악하고 음성으로 대화하는 최첨단 입체적 교감인 것이다.

컴퓨터와 사람의 교감, 그리고 사랑. 우리는 이제 아무도 그것이 불가능하다거나 소름이 끼친다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아직도 소름이 끼치거나 비현실적으로 생각된다면 당신은 아직 영화 ‘HER’를 접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사람과 컴퓨터 시스템의 사랑이 가능하게 된 이유는 뭘까.

물론 첨단과학의 발달이 그 기초일 것이다. 인간의 정서에 기초한다면?

키워드는 고독이다.

 

아내를 몹시 사랑하지만 이혼을 앞두고 혼자 살아가는 시어도어.

그는 큰 침대에 홀로 몸을 뉘고서야 종일 허공을 떠돌아다니던 텅 빈 눈동자를 어둠 속으로 밀어 넣는다.

우울하고 쓸쓸한 그가 하는 일은 손편지를 대필하는 일.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달 될, 애정 넘치는 아름다운 글로 편지를 쓰는 게 그의 일이다.

일과를 마친 그는 핸드컴에서 칙칙한음악을 검색해 들으며 집으로 돌아온다.

인스턴트 간식을 먹으며 우주탐험 컴퓨터 게임으로 시간을 보내는 시어도어.

그런 그에게 그녀가 나타난 것이다.

아픈 마음을 다독여주고 우울한 그를 유쾌하게 웃게 만드는 그녀. ‘

거기 있어?’ 라고 물으면 단 몇 초 안에 , 여기 있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녀로 인해 시어도어는 예전의 쾌활함을 다시 찾게 된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을 미리 꿰뚫고 있는듯 그녀는 그의 목소리만으로 그의 감정을 체크하고 그가 어떤 선택, 결정을 해야 할지 준비를 하고 있다.

시어도어는 더 이상 외롭지 않다.

그의 일상에, 그의 내면에 사만다가 존재하기 시작하면서 시어도어는 삶이 즐거워지기 시작한다.

더 이상 칙칙한 음악을 들을 일도 없어졌으며 홀로 맞던 잠자리에서 조차 섹시한 사만다의 목소리와 함께 잠이 들게 된 것이다.

나는 당신에게 어떤 말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아시어도어는 사만다를 좋아하게 된 자신을 발견한다.

음성만 가진 컴퓨터 사만다를 위해 시어도어는 핸드컴의 카메라 렌즈로 사만다에게 세상을 보여준다.

자신이 보는 것, 자신이 듣는 것을 보여주고 들려주며 함께 공유한다.

드디어 사랑이 시작된 것이다.

 

시어도어는 아내와의 이혼에도 용기를 내게된다.

결국 마지막까지 놓지않았던 이혼서류에 드디어 서명을 한다.

하지만 사만다의 존재를 알게 된 아내 캐서린은 시어도어가 자신의 진짜 감정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게 슬프다며 컴퓨터와 데이트를 하는 그를 책망한다.

사만다가 자체 인격체이며 매순간 진화한다는 말에 캐서린은 더욱 강하게 시어도어를 비현실적으로 몰아세운다.

캐서린을 만나고 돌아온 시어도어. 그의 내면은 이제껏 사랑이라 믿었던 사만다와의 감정에 미세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사만다는 시어도어의 마음의 변화를 감지한다.

그리고 고통스러워한다.

시어도어의 마음변화가 자신이 가지지 못한 육체 때문이라 생각하고 컴퓨터 시스템일 뿐인 자신을 비관한다.

아무리 최첨단 컴퓨터라 해도 사람과 똑 같은 육체를 가질 수는 없는 것.

그래서 사만다는 컴퓨터답게 다른 방식으로 진화를 도모하게 된다.

사만다는 자신의 사랑의 감정을 분산시키기 위해 다른 여러 사람, 그리고 컴퓨터와 대화하고 사랑을 나누기 시작한다.

그녀는 시어도어로부터 거절당한 사랑이 너무나 고통스러웠고 감당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사만다가 자신외에도 다른 이들과 대화하고 사랑한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은 시어도어. 그는 다구쳐 묻는다.

너는 아직도 내 것인건 맞니?’ 자신이 회의했던 것과 별개로 시어도어는 좌절하게되는데..

 

영화를 이야기하면서 HER처럼 줄거리를 늘어놓는 건 처음이다.

중요한 건 줄거리가 아니라 내가 영화와 어떻게 융화되었는가가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나는 왜 이 영화의 줄거리에 집중하고 있을까?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이 영화는 컴퓨터와 인간의 사랑이야기만을 보여주기 위해 만든 영화가 아니었다.

컴퓨터 운영체제가 아니라 인간 운영체제에 대한 이야기였다.

급속도로 진화해가던 사만다는 컴퓨터든 인간이든 130억 살짜리 물질에 불과하단 걸 알아차리게 된다.

그리고 인간이나 컴퓨터나 어차피 일정 시간이 지나면 다른 차원의 세상으로 가야한다는 것.

그리고 거기선 똑같은 물질로 함께 할 수 있다는 것.

문득 오버랩되는 영화가 있었다.

나탈리우드가 주연한 초원의 빛'.

 

나탈리는 사랑하는 팻힝글과 결혼을 약속했지만 혼전 순결을 원한다.

그래서 매번 함께 밤을 보내자는 팻힝글의 제안을 거절한다.

나탈리를 몹시 사랑하지만 끓는 혈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다른 여학생들과 어울리는 팻힝글.

사랑하는 팻힝글의 애정행각을 지켜보던 나탈리는 그가 정말 그녀들을 사랑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착하고 순수한 나탈리는 그의 마음을 돌려보려 그녀들과 똑같이 야한 옷을 입고 이상한 헤어스타일을 흉내내며 고통스러워한다.

결국 정신분열로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는 나탈리.

 

사만다 혹은 나탈리.. 사랑하는 대상의 마음이 변했다고 느끼는 둘의 입장 설정은 같다.

하지만 사만다의 다른 점은 진화하는 최첨단 컴퓨터라는 것이다.

사만다는 여러사람 (엄청난 숫자)과 대화하고 사랑을 나누는 것으로 스스로 고통을 줄여 보려 노력한다.

그런데 오히려 사만다는 그 과정을 통해 더욱 진화하게 되고 많은 것을 깨닫게 된다.

삶이란 -인간의 삶이든 컴퓨터의 삶이든- 책 한권을 읽는 것과 같다는 것.

천천히 읽기위해 글자와 글자 간격을 엄청나게 느리게 지나간다 해도 결국 책을 다 읽고 나면 그 책을 덮어야한다는 것이다.

결국 사만다는 자신이 그렇게 흘러가야만 하는 존재임을 깨달은 것이다.

 

시어도어가 사만다에게 묻는다.

-날 떠날 거야?

-우리는 모두 떠나요.

-우리란? 누구를 말하는 거지?

-모든 운영체제.

 

마지막에 이르러 시어도어가 말한다.

"나는 다른 누구도, 당신만큼 사랑한 적이 없어...."

 

... 시어도어만 외로웠을까.

인간을 사랑하게 된 사만다의 고독은..?

더구나 인간보다 높은 지능을 가진 사만다에게 육체가 없다는 것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사랑하면서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없다는 것은 그녀에게 엄청난 형벌로 느껴졌을 것이다.

인간과 컴퓨터의 사랑이라는 소재에서 한층 높이 나아가 인간 역시 소멸될 뿐일 운영체제에 불과하다는 메시지를 남긴 감독 스파이크 존즈에게 박수를 보낸다.

또한 시어도어역을 너무나 실감나게 보여준 호아킨 피닉스에게도..

 

우리 모두는 알고있다.

언젠가는 책의 마지막 장을 덮어야할 때가 온다는 것을.

어쩌면 우리는 제각각 누군가에게 사만다일 수 있다.

그리고 또 누군가에게 시어도어일 수도 있다.

우리는 모두 고독하고.. 우리는 모두 외롭기 때문이다.

언젠가.. 운영체제가 사라지는 마지막 날이 왔을 때, 우리는 다 읽은 책장을 덮으며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미리 생각해 보며 책을 읽을 일이다..

 

소설가 이경희 프로필

2016년 중앙일보에 장편소설 '제8요일의 남자'를 연재했으며 단편소설로는 '작약' '연의기록' '전생을 기억하는 여자' 등 다수를 발표했다.

제19대 국회의장단 홍보기획관을 지냈으며, 국회도서관 국회보 편집위원, 일간지 문화부기자, 경기도 공무원교육원 겸임교수로 활동했다.

저서로는 JTBC 드라마 '품위있는그녀' 원작소설 1,2와 예술치유에세이 '마음아 이제 놓아줄게' 등이 있으며 조선일보 조선PUB에 문화칼럼을 연재했으며 현재 에브리북에 소설 '엘리자베스 캐츠아이'를 연재 중이다.

*작가 이경희의 <컬처플러스>에서는 책과 영화, 음악, 드라마 등등의 작품과 더불어 종교와 역사이야기를 더해 소소한 인생이야기를 나누는 코너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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