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실체 고백 8] 고립의 지름길
[역사의 실체 고백 8] 고립의 지름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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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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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와 언론에서 숨기는 역사

조선과 대만은 100년 전 근대화가 시작되는 중요한 기간에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는 공통점 가져

대만은 정부와 민간 모두 일본에 대해 매우 우호적인 태도를 견지

1905년 이후 일본에게 있어 조선은 식민지라기보다는 확장된 일본의 영토라는 의미

일본과 합병하는 것만이 조선의 문명개화 및 근대화를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최선의 방안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당시 조선의 뜻 있는 개혁세력 사이에 암묵적인 합의가 도출되어 있었던 것

30년 남짓한 기간동안 천만명도 안되던 인구는 2500만으로 늘었고 평균수명은 24세에서 45세

일본 정부로부터 엄청난 규모의 자금이 유입되어 각종 사회기반시설이 건설

1920년대 조선의 문예부흥은 일본과 정확히 같은 시기에 시작

조선은 인류 역사상 유일무이한 유교 근본주의 사회로서, 그 유교적 계율의 정교함과 엄격함은 오늘날 이슬람 근본주의 따위는 비교의 대상조차 되지 못할 정도

반일 책동은 한국이라는 국가에게 백해무익한 자해행위에 불과하며 우리나라가 국제사회의 정당한 일원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쓸어내야 할 구시대의 유산

개항 이후 한일합병 전까지의 시기를 조선의 부르주아 혁명기

조선의 부르주아 혁명은 조선에 진출한 일본인들을 한 축으로 하고 개화당과 독립협회를 창설했던 지식인 그룹, 동학 민중세력 등 3개의 축을 중심으로 진행

한일합병은 그 혁명의 귀결

무력하게 외세에 의해 휘둘린 피침의 역사가 아니라 조선 내부 혁명세력의 자주적인 의지로 진행된 주체적인 변혁의 과정

100년 전 조선의 상황에서 보면 피히테의 입장에 서 있던 사람들은 안중근이나 김구 같은 인물들이고 헤겔의 입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완용이나 김옥균, 박영효, 최남선, 이광수 등의 소위 친일파라고 불리는 인물들

[역사의 실체 고백 8]

 

고립의 지름길

송산 정광제(이승만학당 이사) 

송산 정광제

 

조선과 대만은 100년 전 근대화가 시작되는 중요한 기간에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오늘날 두 나라가 일본을 대하는 태도는 사뭇 다르다.

대만은 정부와 민간 모두 일본에 대해 매우 우호적인 태도를 견지하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반면, 한국은 지속적인 반일교육의 영향으로 정부나 민간 차원 모두 일본에 대해 매우 적대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양국이 비슷한 기간동안 비슷한 성격의 일본 통치를 거쳤음에도 이 같은 차이가 발생한 까닭을 물어보면, 대체로 대만에 대한 일본통치가 조선에 비해 15년 더 길었다는 것과 대만에는 일본 이전에 독자적인 왕조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겠느냐는 대답을 쉽게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한국이 보이고 있는 일본에 대한 유별난 적대적인 태도는 쉽게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보통의 한국인들이 지닌 반일감정의 기저에는 과거 일제통치 기간동안 조선이 많은 손해를 입었다는 피해의식이 깔려 있는 듯한데, 같은 기간 동안 일본인들은 많은 은혜를 베풀었다고 이해하고 있다.

이처럼 같은 일에 대해 지니고 있는 지식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깊은 감정의 골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한국인 사이에 퍼져있는 반일감정의 근원에는 먼저 역사학자들에 의한 자의적인 자료 조작과 왜곡이 자리하고 있고, 이에 근거한 강력한 반일 교육과 이데올로기 책동이 깔려 있다.

1905년 이후 일본에게 있어 조선은 식민지라기보다는 확장된 일본의 영토라는 의미가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일본인들은 조선과 대만을 통치함에 있어 대체로 본토인과 같은 대우를 했던 것으로 보이며(한국인들은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특히 조선에 대해서는 대륙에 연결되어 있다는 지정학적인 중요성 때문에 오히려 본토보다 더 많은 투자와 산업시설을 유치하는 등 유리한 대우를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유럽 열강들에게 식민지라는 것이 멀리 떨어진 곳에 농장을 소유하는 것과 비슷한 개념이었다면 일본에 있어 조선과 대만은 옆의 점포를 사들여 가게를 확장하는 것과 비슷한 행위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인의 반일감정은 이 점에 대한 오해로부터 비롯되고 있는 듯하다.

만약 어떤 사람이 서울에 거주하면서 멀리 떨어진 호주나 뉴질랜드에 농장을 소유하고 있다면 그는 현지에 일정한 돈을 투자해 수익을 발생시킴으로써 그 과실을 따먹는 일에만 관심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거주지이자 일터인 상점을 경영하는 가난한 상인이 힘들게 옆에 있는 가게를 인수하게 되었다면, 그는 열성을 다해 새로 생긴 가게를 단장하고 기존 점포와 통합해 시너지 효과를 얻는 일에 주력할 것이다.

19세기말과 20세기 초 대만과 조선을 합병한 일본의 처지는 바로 이런 구멍가게 주인과 비슷했다고 하겠다.

따라서 일본이 조선을 개발하고 발전시킨 일을 두고 돼지를 키워 잡아먹기 위한 것이었다거나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삼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할 수가 없다.

일본이 조선을 개발하는 데 있어 혹 장기적인 수탈이나 병참기지 확보하는 목적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을 것이며, 조선에 와서 힘들게 농토를 개량하고 사업을 일으킨 일본인들 가운데에는 조선에 근대문명을 전파하고 조선을 신속히 개발하여 일본과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려 동화하겠다는 좋은 의도를 지닌 사람들도 많았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과거 일본이 조선에 행한 선의의 시혜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한국인들이 일본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갖는 일은 사라질지도 모른다.

즉 한국인들에게 존재하는 반일감정은 한국 정부의 의도적인 역사왜곡에서 비롯된 것이다.

필자는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일본이 아니라 한국이라고 생각하며, 이는 또한 국제사회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우리는 왜곡된 교육으로 인해 흔히 을사조약과 한일합병이 일본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이와 전혀 다르다.

일본과 합병하는 것만이 조선의 문명개화 및 근대화를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최선의 방안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당시 조선의 뜻 있는 개혁세력 사이에 암묵적인 합의가 도출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 같은 강력한 여론에 따라 일본은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접수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을사년 신협약의 체결을 주도하고 조선의 초대 통감이 된 이토 히로부미는 정치적으로나 재정적으로 일본에 부담이 되는 조선 합병을 결코 원하지 않았다.

이는 다만 일진회 등 조선의 일부 세력이 청원하던 바였으나, 안중근의 이토 살해사건으로 인해 일본의 여론은 급속히 합병으로 기울게 되었으니 안중근은 그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애국을 한 셈이 되었다.

일본의 통치로 인해 조선은 많은 발전을 이룩하였다.

30년 남짓한 기간동안 천만명도 안되던 인구는 2500만으로 늘었고 평균수명은 24세에서 45세로 늘었으며, 미개한 농업사회이던 조선은 단시일 내에 근대적인 자본주의 사회로 변모하였다.

본토에서는 우수한 교사들이 부임해 조선인들을 교육하였고 해마다 일본 정부로부터 엄청난 규모의 자금이 유입되어 각종 사회기반시설이 건설되었다.

1920년대에는 일본에 대한 쌀 수출로 조선에는 갑부들이 속출하였으며 그 바탕 위에 소위 ‘민족자본’이라는 것이 생겨나게 되었다.

1920년대 조선의 문예부흥은 일본과 정확히 같은 시기에 시작된 것이며 오늘날 이광수와 최남선으로부터 시작해 김동인 이효석 김영랑 윤동주 홍난파 등 우리가 기억하는 수많은 작가와 예술가들은 대부분 이 시기에 등장한 인물들이다.

한국인들은 일본의 이 같은 역사적 사실 자체를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있으며, 간혹 인정하는 사람들조차 그것이 일본이라는 외세에 의해 이루어진 타율의 성과물이라는 이유로 그 의미를 평가절하하고 있다.

그러나 돌이켜보건대 조선은 인류 역사상 유일무이한 유교 근본주의 사회로서, 그 유교적 계율의 정교함과 엄격함은 오늘날 이슬람 근본주의 따위는 비교의 대상조차 되지 못할 정도라 하겠다.

따라서 오늘날 회교 근본주의가 이슬람 사회에 미치고 있는 악영향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인식이 미치는 사람이라면 조선의 유교근본주의가 외세의 영향이 배제된 상태에서 자발적으로 소멸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20세기 초 외세에 의한 개혁, 그것도 일제에 의한 철저한 청산 작업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한반도는 전 세계에서 가장 미개한 지역 가운데 하나로 남아있을 것이다.

필자는 어린 시절 <도라 도라 도라> 라는 전쟁영화를 매우 재미있게 본 기억이 난다.

뭐가 그리 재미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같은 영화를 두어 번은 본 것 같다.

그 영화에서 일본은 하와이의 평화스런 미국인들을 기습 공격한 비겁하고 못된 나라였고, 나는 일본군인들을 저주하면서 제2탄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미국이 멋지게 일본군을 때려잡을 것이라던 도라도라 2탄은 몇 년을 손꼽아 기다려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최근 <진주만>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이미 60년 전에 엄청난 규모의 항모전단을 이끌고 지구 반대편까지 출정해 미국의 태평양 함대를 박살내버린 일본이라는 나라에 나는 섬찟한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는 우리도 일본이었으며 우리 조상들도 일본인으로서 전쟁에 참가하고 응원했을 것이 분명한데 왜 오늘날 한국인들은 일본과 미국의 전쟁에서 미국을 응원하고 있는 것일까?

오늘날 한국 정부에 의해 시행되고 있는 체계적인 반일교육과 그 결과로 생겨난 반일감정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고 있다.

분단 이후 한국은 체제와 이념상 북한과 일본이라는 두 개의 증오집단을 갖고있다.

북한에 대한 증오가 어느 정도 수그러진 오늘날 문재인 정권에 와서는 일본에 대한 이데올로기 조작과 반일 책동 작업은 이를 이용하는 세력의 입장에서 그 필요성이 더 커져가고 있다.

그러나 결국 반일 책동은 한국이라는 국가에게 백해무익한 자해행위에 불과하며 우리나라가 국제사회의 정당한 일원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쓸어내야 할 구시대의 유산임에 틀림없다.

 

아마도 한국은 전 세계를 통틀어 반일감정이 존재하는 유일한 국가일 것이다.

정작 일본과 전쟁을 치른 미국인들은 일본을 아시아에서 가장 우호적인 국가이자 중요한 경제파트너로 여기고 있으며,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일본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동남아시아 국가들도 일본에 매우 호의적이다.

또한 과거 51년 간 일제시대를 경험한 대만에서도 반일감정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간혹 한국과 한 목소리를 내는 중국의 경우 공식적인 태도는 공산당의 입장일 뿐이며 중국인들에게서 한국에서와 같은 반일감정을 발견하기는 매우 힘들다.

몇해전 동아일보와 아사히 신문은 합동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는데, 그 결과를 보면 한국인 가운데에는 일본을 싫어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의 3배가 넘는 것으로 나타난다.

반면 일본인들은 한국이 좋다는 응답이 더 많았다.

양국 간의 이런 이상한 감정관계는 제3자가 보기에 첫째, 일본이 한국에 큰 잘못을 저질렀거나 둘째, 한국인들이 비정상적인 반일감정을 지니고 있다는 두 가지 해석을 낳을 수 있을 것인데, 아마도 두 번째 평가를 내리는 제3자들이 더 많을 것이다.

한국인들이 일본에 대해 무례하다는 것은 이미 국제사회에서 잘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에 아마도 한국의 유별난 반일감정은 국제사회에서 두고두고 한국의 이미지를 깎아내리게 될 것이다.

국내에서는 이 같은 분위기를 짐작조차 하기 힘들지만 막상 해외에 나가보면 한국이 고립되어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감지할 수 있다.

우리는 한일관계, 특히 우리가 일본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전면적인 반성에 착수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작업은 과거사에 대한 냉철한 평가 없이는 성공하기 힘들다.

 

필자는 개항 이후 한일합병 전까지의 시기를 조선의 부르주아 혁명기로 본다.

개항 이후 조선의 당면과제가 부르주아 혁명이었다면 당시 일본은 대체로 그 혁명의 지원군이었으며, 때로는 주도적으로 개입해 조선의 개혁을 추진한 우호적인 외세(현재의 미국과 같은 역할)로 보는 것이 옳다.

조선의 부르주아 혁명은 조선에 진출한 일본인들을 한 축으로 하고 개화당과 독립협회를 창설했던 지식인 그룹, 동학 민중세력 등 3개의 축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이 3대 세력은 시대에 따라 대결하거나 연합하면서 조선혁명을 이끌어왔으며, 한일합병은 그 혁명의 귀결이라고 본다.

이 같은 시각으로 개항기의 조선 역사를 살펴보면, 조선혁명은 비록 다소 왜곡된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나 결코 무력하게 외세에 의해 휘둘린 피침의 역사가 아니라 조선 내부 혁명세력의 자주적인 의지로 진행된 주체적인 변혁의 과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의 혁명가들은 조선왕실과 그에 빌붙은 수구외세와 대항하면서 30년 동안 끈질기게 부르주아 혁명을 추진했으며, 조선의 문명개화는 이들의 피땀으로 얻어진 성과물인 것이다.

몇해전 여름 한국방송공사에서는 일본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두 차례 방영한 바 있는데, 필자는 거기에서 오늘날 일본에 자학사관이 팽배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나름대로 여러 가지 업적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이런 일본이 한차례 전쟁에서 패했다는 이유로 스스로의 역사에 자부심을 갖지 못하고 스스로를 학대하는 사관이 자학사관이다.

자학사관은 아마도 역사 교사들로부터 일본이 저지른 죄악상에 대해 수없이 교육을 받은 결과이며, 패전기념일마다 묵념을 하며 일본으로부터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반성하는 많은 시간을 가져온 심리적 결과이다.

얼마 전 만난 한 일본인 친구로부터 입버릇처럼 ‘우리처럼 이렇게 작은 나라에서...’ 라고 말하는 얘기를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보기에 일본은 미국이나 중국, 러시아 같은 나라에 비하면 땅도 좁고 인구도 적어 여러모로 너무 작은 나라인 것처럼 생각된다는 것이다.

겸손이라기보다는 자학에 가까운 이런 사고방식들은 전후 강요된 식민사관과 자기비하 작업의 결과 생겨난 것으로 보여진다.

19세기 초 나폴레옹의 군대가 독일을 침공했을 때, 철학자 피히테는 <독일 국민에게 고함> 이라는 연설을 통해 나폴레옹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독일 민족의 단결투쟁을 호소했다.

같은 시기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나폴레옹의 군대가 프로이센의 낡은 관료 체계를 철저히 청산하고 혁명정신을 전파하는 것을 보면서, 나폴레옹이야말로 살아있는 세계정신이며 독일 국민은 오히려 프랑스 혁명군의 편에서 구체제와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피히테는 알맹이 없는 민족주의를 중요시했지만 헤겔은 그 침략에서 실제 벌어지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가에 주목했다.

100년 전 조선의 상황에서 보면 피히테의 입장에 서 있던 사람들은 안중근이나 김구 같은 인물들이고 헤겔의 입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완용이나 김옥균, 박영효, 최남선, 이광수 등의 소위 친일파라고 불리는 인물들이다.

오늘날 세계의 역사가들은 헤겔을 입장에 서서 나폴레옹을 위대한 프랑스 혁명의 수호자로 보고 그의 정복전쟁을 세계정신의 활동으로 해석하고 있다.

나폴레옹은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지만 프랑스 국민들은 그를 혁명의 진정한 수호자로 추앙해 마지않았으며 국민투표를 통해 절대다수가 나폴레옹의 황제즉위에 찬성했다.

나폴레옹 역시 이 같은 프랑스 민중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정복 전쟁을 통해 전 유럽에 프랑스 혁명을 전파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정복전쟁이 무엇이나 정당하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나폴레옹이나 칭기즈칸의 정복전쟁은 헤겔의 표현대로 살아있는 세계정신의 활동인 것이며, 이들의 정복전쟁으로 인해 인류의 역사는 한 차원 높은 단계로 전진할 수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침략과 정복의 역사를 보는 데 있어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침략하여 정복하는 것은 무조건 악>이라는 단선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과연 그 정복의 내용이 무엇인가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민족이라는 것도 발명된 지 200년밖에 안 되는 정치 이데올로기 에 불과하며 현대 사회에서는 점차 폐기되어 가고 있는 구시대의 유물인 것이니 민족단위의 자주적인 존립이 정당하다는 논리도 최근 들어 유행하게 된 민족국가의 자기합리화 논리일 뿐 그것이 역사를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계속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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