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실체 고백 10] 날강도 조선총독부ㆍ상
[역사의 실체 고백 10] 날강도 조선총독부ㆍ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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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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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조사사업은 미개한 조선에 ‘자본주의적 경제구조’를 이식하기 위한 필수적인 단계

조선에서 모든 토지는 기본적으로 국가소유였으며 민간의 토지 소유는 사실상 국가에 의한 임대권으로만 존재

전국 규모의 양전은 1719년(肅宗45)에 실시된 것을 마지막으로 200년 동안 중단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현대 국가에서는 토지의 정확한 위치와 성격, 소유관계가 정확히 밝혀져야

조사사업에서 먼저 일정한 기간동안 정해진 양식에 따라 토지의 물목과 소유자로부터 신고를 받은 뒤, 분쟁이 발생한 토지에 대해서만 총독부가 개입해 소유자를 확정해주는 방식은 일제가 조선인들의 무지를 악용해 토지를 강탈하기 위한 계책이 아니라 당시로서는 최선의 방법이었고 이에 대해 조선인들은 자발적인 협조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국정교과서는 그 자체로 국민에게 반일감정을 조장하기 위한 ‘흉기’로 기능하고 있다.

선후기의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근대적 토지소유는 성립될 수 있다.

날강도 조선총독부ㆍ상

정광제(이승만 학당 이사) 

 

한국에서 출판된 각종 교과서와 공무원 시험서, 교재, 역사서적 등에 묘사된 토지조사사업 항목을 보면 한국 사회가 일제시대에 대해 얼마나 악의적인 사실왜곡을 일삼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다음은 한일합병 직후 실시된 토지조사사업에 대해 한 공무원 시험서가 기술하고 있는 내용이다.

<토지 조사 사업>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일본이 우리나라 토지 소유권의 확립을 구실로 하여 펼친 대대적인 조사 사업으로서 식민지 정책 수행을 위하여 토지 소유 관계를 정리하고 개편한 사업이다.

이 사업의 결과 농민들은 당연히 그들의 소유가 되어야 할 농토를 빼앗겼고, 門中 소유 또는 촌락 공유의 토지는 총독부의 소유가 되고 말았다.

일제는 여러 가지 악랄한 방법으로 우리의 토지를 빼앗은 결과 1930년대 통계에 따르면 전 국토의 40%에 해당하는 논밭과 임야가 총독부의 소유로 나타났다.

1. 일제의 실시명분: 근대적 토지소유권제도 확립

2. 실제목적: 토지약탈

3. 방법: 기한부신고제

4. 결과:

1)전 농토의 40%가 조선총독부 소유가 되어 일본인에게 불하됨

2)우리 농민은 소유권이나 영구 경작권을 잃고 기한부 계약의 소작농으로 전락, 생계유지를 위해 화전민이 되거나 만주, 연해주, 일본 등지로 이주함

다른 종류의 책에서도 대체로 비슷한 묘사를 전개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첫째, 조선총독부가 조사사업을 통해 전 국토의 40%, 혹은 어떤 책에서는 50%라고도 하는데 어쨌든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토지를 조선인민으로부터 강탈해갔다는 것이다.

둘째, 조사사업의 결과 대부분의 농민이 소작농으로 전락해 삶의 터전을 잃고 거지처럼 국내외 각지를 떠돌게 되었다는 것인데, 이 글에서는 조사사업을 둘러싼 이 두 가지 주장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하나씩 논의해 보기로 한다.

그 이전에 2002년부터 새로이 도입된 한국의 국정교과서에 나타난 조사사업에 관련된 부분을 인용하기로 한다.

2002년판 국정교과서는 일제시대에 대해 ‘약간’ 진전되어 조사사업에 있어서 문제의 ‘40%’라는 숫자를 삭제하였다.

이는 과거 교과서의 어처구니없는 조작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지만 그것을 제외하고 나머지 부분의 왜곡과 조작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국권 피탈 후 일제는 우리 경제를 식민지 경제 체제로 개편하였다. 그 중에서도 핵심적인 것은 농업 부문에서 강행된 토지조사사업이었다. 토지조사사업에서는 우리 농민이 토지 소유에 필요한 서류를 갖추어 지정된 기간 안에 신고해야만 소유권을 인정받게 하였다. 그러나 당시 토지 신고제가 농민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며, 신고 기간도 짧고 절차가 복잡하여 신고의 기회를 놓친 사람이 많았다. 일제가 이와 같이 까다로운 신고 절차를 택한 것은 한국인의 토지를 빼앗기 위한 것이었다. 그 결과 일제는 미신고 토지는 물론 공공기관에 속해있던 토지, 마을이나 문중 소유의 토지와 산림, 초원, 황무지 등도 모두 조선 총독부 소유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탈취한 토지를 동양 拓植 주식회사를 비롯한 일본인의 토지 회사나 개인에 헐값으로 불하하였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으로 우리 농민은 많은 토지를 빼앗기고 기한부 계약에 의한 소작농으로 전락하였다. 토지조사사업이 끝난 1918년에는 겨우 3%의 지주가 경작지의 50% 이상을 소유하였으며 소작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농가가 77%나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전의 소작권은 인정되지 않고 지주의 소유권만 인정되어 지주제가 강화되었다. 따라서 소작농은 50%-70%에 이르는 고율의 소작료를 내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國史, p360)

 

지난 2001년 5월 한국 정부는 일본 역사교과서에서 예를 들면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바다를 넘는다’거나 ‘조선반도에 진출했다’라는 사소한 용어 사용까지도 일일이 트집을 잡아 35개항의 수정을 요구한 바 있는데, 만약 일본 정부에서 마찬가지 수준으로 한국의 국정교과서에 대응한다면 위에 인용한 부분에서만 35개항 정도는 충분히 수정 요구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국정 교과서에서는 1876년 개항 이후 1945년까지 70년 동안 일본에 관련된 기술이 통째로 왜곡되어 있기 때문에 아마 필자가 일본 외무성의 교과서 왜곡문제 담당자라 하더라도 특정 부분을 지적해 수정을 요구할 엄두를 내기 힘든 상황이다.

이것은 온몸이 망가져 어느 특정 부위를 손보는 것으로는 소생하기 힘든 환자와 마찬가지 상태라고 생각된다.

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의 의미에 대한 객관적 평가는 한마디도 언급되지 않고 마치 일제가 농민의 토지를 강탈하기 위한 작업이었던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

즉 한국의 교과서 집필자들은 기본적으로 ‘총독부는 강도’라는 의도적으로 편향된 시각에서 역사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이같은 문장으로 서술했을 것이다.

 

1. 일제는 과연 조선의 토지를 강탈했는가?

한일합병 이후 8년 동안에 걸쳐 이루어졌던 토지일제조사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최초로 근대적인 토지소유 관계를 정립한 기본조사사업이었다.

이 사업이 성공함으로 인해 비로소 토지 소유권이 법의 보호를 받아 현대적인 소유권 제도가 정착할 수 있었고, 그에 따라 토지의 생산성이 향상되고 자유로운 토지매매가 가능해졌던 것이다.

즉 조사사업은 미개한 조선에 ‘자본주의적 경제구조’를 이식하기 위한 필수적인 단계였으며, 이 사업의 성공으로 인해 조선은 비로소 원시적인 자본주의 경제질서가 태동할 수 있었다.

물론 자본주의 자체를 착취구조로 보는 사람에게는 양반계급의 착취나 원시자본주의에서 기업영농을 하는 지주의 착취나 마찬가지다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어디까지는 자본주의는 보다 발달된 착취구조로서, 사회 구성원들에게 보다 나은 삶을 가져다준 경제질서인 것은 분명하다.

봉건사회조차도 경험하지 못한 미개한 조선경제를 단기간에 자본주의적 경제체제로 전환시킨 기적과도 같은 일이 가능했던 것은 솔직히 말해서 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에 따른 성과물이 있었다.

그 이전에는 토지에 관한 한 '소유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불분명하였다.

조선에서 모든 토지는 기본적으로 국가소유였으며 민간의 토지 소유는 사실상 국가에 의한 임대권으로만 존재했다.

조선왕조는 수 백년 동안, 총독부가 한 것과 같은 전국규모의 토지조사사업을 한번도 실시하지 않았다.

워낙 비용과 인력이 많이 들고 복잡한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는 토지조사를 ‘量田사업’이라 불렀는데, 이는 토지의 성격과 위치 등을 측량해 서류에 기록하는 사업이었다.

이는 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단순하고 부정확한 작업이었으며, 그나마 전국 규모의 양전은 1719년(肅宗45)에 실시된 것을 마지막으로 200년 동안 중단되어 있었다.

그런 탓에 조선의 토지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원소유자 사망, 이주, 개간, 산불 등으로 토지의 성격과 소유자(경작자)가 바뀌었음에도 정부는 실태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1898년 대한제국 정부는 이같은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전국 규모의 양전사업(光武量田)을 시작했으나, 1904년 러일전쟁이 시작되자 이 사업은 중단되고 말았다.

러일전쟁 이후 대한제국은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고, 이등박문이 이끄는 통감부는 보다 체계적이고 근본적인 재정혁신과 일제조사를 계획하고 있었다.

이 계획에 따라 동양척식회사가 설립되고 토지조사사업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즉, 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은 한국 일각에서 주장하는 바 광무양전으로 시작된 자주적인 조사사업을 저지한 뒤 이를 총독부가 토지 강탈사업으로 변질시킨 것이 아니라, 광무양전을 계승해 훨씬 근본적이고 체계적인 조사사업으로 대체한 것이다.

무능하고 부패한 이씨왕조를 대신해 대한제국의 새로운 통치자가 된 조선총독부는 대단히 미개하고 저개발 상태인 조선 경제 전반에 대해 장기적인 개발계획을 수립하는 한편, 재정혁신과 안정적인 세금징수를 위해 토지와 인구, 산업 등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사업을 실시했다.

이는 당시 모든 현대국가에 불가피한 일이었으며, 일본은 이미 1895년 일본영토로 편입된 대만에서도 같은 성격의 국세조사(國勢調査)를 실시한 적이 있다.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현대 국가에서는 토지의 정확한 위치와 성격, 소유관계가 정확히 밝혀져야만 그에 기반해서 정책이 수립되고 세금을 거둘 수가 있으며 또한 매매가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면에서 조선 현대화의 초석을 닦은 이 거대한 사업에 대해서 최근 한국과 일본의 연구자들에 의해 최초로 체계적인 연구서가 출판된 바 있다.

토지조사사업은 일제가 조선을 통치하기 위해 각종 제도 정비 사업 가운데 가장 먼저 착수했고 8년이나 걸려 시행한 큰 사업이었다.

그러나 그 중요성에 비해 이 ‘사업’에 대한 실증적 연구의 역사는 사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지난 1997년 민음사에서 출판된 <조선토지조사사업>은 564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연구서로서 대한제국의 광무양전지계 사업 (光武量田地契事業)과 이를 계승한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을 체계적으로 연구분석한 최초의 실증적인 연구성과이다.

또한 이 책의 저자들 - 김홍식 미야지마宮嶋博史 이영훈 박석두 조석곤 김재호 등은 일제 식민통치 시기에 대해 기존 경제학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참신한 시각을 지닌 그룹이라는 점에서도 이 작업의 의미는 크다 할 것이다.

기존 연구에 대해 매우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이 책의 저자들은 ‘사업‘을 둘러싼 기존 학설에서 극복되어야 할 세가지 신화로서

① 일제가 조사사업을 통해 조선의 토지를 강탈해갔다는 이론

② 일제시대 조선의 사회구성체는 식민지반(半)봉건사회였다는 이론

③ 광무양전이 근대적 토지개혁이었다는 이론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이 가운데 저자들이 특히 일제의 토지강탈 신화에 대해 중점적으로 비판하여 이를 성공적으로 극복하였다고 자부한다.

지난 1990년대 대우그룹은 상업성이 없는 학술서적 출판을 지원하기위해 대우재단 주도로 대우학술총서 사업을 전개했는데, 이 책도 그 총서 시리즈로 발간되었다.

이 책은 그러나 최근 석연 찮은 이유로 절판된 상태인데, 아마도 저자들의 용기있는 주장과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출판계 및 학계의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은 듯하여 안타까움을 더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 연구서로 인해 그간 반일 책동의 주된 수단으로 악용되어 온 일제의 토지 강탈이론은 어느 정도 극복의 단초를 놓았다고 생각된다.

 

이 책에서 강조된 저자들의 주장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사업'의 과정에서 토지의 강탈은 없었다.

사업의 과정에서 국유지 약탈은 전혀 없었고(이영훈, 539면), 사업기간에 쌀값(米價)이 4배나 올라 농민의 입장에서 지세의 실질부담은 오히려 절반 정도로 줄었다.

박문규 이래 인정식, 이재무, 신용하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관변학자들에 의해 토지 강탈에 대한 억측이 확산되어온 것은 조선민족의 집단 심성구조가 이를 수용했기 때문이다(김홍식, 22면).

조사사업이 시작되기 이전 조선에는 소유관계가 불분명한 토지가 엄청나게 많았지만 그런 과정에서도 토지가 총독부 소유로 되는 일은 드물었던 것이다.

‘사업’을 영구병합의 꿈을 가진 침입자가 조선의 말단모리배와 결탁해 벌인 한탕의 토지사기극으로 이해하는 것은 우리 민족이 봉착한 총체적 위기의 본질을 호도하고 왜소화시키는 무책임한 작태이다.(김홍식, 31~33면).

또한 토지 경계나 소유권을 둘러싼 분쟁지 처리에서 민족별 편기(偏奇)도 없었고 총독부는 전반적으로 민유처분에 관대했던 것으로 밝혀졌다.(이영훈, 조석곤)

 

둘째, '사업'은 근대적 개혁이었다.

이 사업을 통해 조선 총독부는 전국적 범위에서 주민의 사적 소유를 근대적 규정에 따라 법인화하고 증명제도를 구비하여 근대적 소유제도 및 지세제도를 확립했다.

‘사업’은 토지의 경계와 성격을 파악하고 규정하는 측면에서는 이미 이같은 조사가 상당히 철저하게 이루어진 광무양전과 계승관계에 있지만, 소유자 파악의 측면에서는 광무양전이 불철저했고 사업을 통해 비로소 완결될 수 있었다 (미야지마, 조석곤, 이영훈).


셋째, 농촌주민 또는 일반주민은 '사업'의 성과를 환영했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에 대해 한국 농민들은 대체로 즐거워하고 협조를 제공하는 분위기였으며, 8년에 걸친 사업기간 동안 농촌 주민이 이에 물리적으로 저항한 사건은 한번도 없었다.

총독부는 조사사업을 위해 ‘임시토지조사국’이라는 기관을 설치 운영했는데, 이 작업을 수행한 총독부의 관료들은 실지조사實地調査나 분쟁지 처리에서 엄정한 공정성에 입각해 깨끗하고 강력하며 효율적으로 임했다.

 

넷째, 신고주의는 효율적인 사업방식이었다.

특히 조사사업과 관련해서 한국의 국정교과서와 관변학자들이 비판하고 있는 신고주의에 대해서 저자들은 조선 후기에 이미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권을 뒷받침해주는 제도와 관행이 충분히 발달되어 있어서 신고주의는 그에 조응한 효율적인 소유자 파악방식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유씨가(柳氏家) 사례를 보면 신고주의에 대한 대응도 대한제국기의 양전이나 과세지 조사 때와 크게 달랐다(박석두).

즉 조사사업에서 먼저 일정한 기간동안 정해진 양식에 따라 토지의 물목과 소유자로부터 신고를 받은 뒤, 분쟁이 발생한 토지에 대해서만 총독부가 개입해 소유자를 확정해주는 방식은 일제가 조선인들의 무지를 악용해 토지를 강탈하기 위한 계책이 아니라 당시로서는 최선의 방법이었고 이에 대해 조선인들은 자발적인 협조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이같은 사실에 비추어볼 때 한국의 국정교과서의 아래와 같은 기술은 역사에 대한 악의적인 조작 왜곡인지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토지조사사업에서는 우리 농민이 토지 소유에 필요한 서류를 갖추어 지정된 기간 안에 신고해야만 소유권을 인정받게 하였다. 그러나 당시 토지 신고제가 농민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며, 신고 기간도 짧고 절차가 복잡하여 신고의 기회를 놓친 사람이 많았다. 일제가 이와 같이 까다로운 신고 절차를 택한 것은 한국인의 토지를 빼앗기 위한 것이었다. 그 결과 일제는 미신고 토지는 물론 공공기관에 속해있던 토지, 마을이나 문중 소유의 토지와 산림, 초원, 황무지 등도 모두 조선 총독부 소유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탈취한 토지를 동양 척식 주식회사를 비롯한 일본인의 토지 회사나 개인에 헐값으로 불하하였다.”

 

오늘날 한국의 국정교과서는 그 자체로 국민에게 반일감정을 조장하기 위한 ‘흉기’로 기능하고 있다.

특히 토지신고 과정에서는 불법적인 소유권 이전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한국의 교과서와 일부 역사서에서 주장하는 바 50%가 넘는 식민지 국가의 광대한 국유지가 창출되었다는 주장은 악의적인 왜곡이다.

당시 조선을 영구 병합한 일본은 한국에서 한 탕의 토지사기극을 연출한 것이 아니라 일본과 동일한 근대적 토지소유제도를 조선에 이식함으로써 조선 사회의 근본적인 발전을 도모하였던 것이다.

이 토지조사사업을 계기로 하여 종래 조선사회를 지배하던 전근대적 수취관계가 사라지고 대신하여 자본주의 논리에 따른 새로운 수취관계가 발생했으며, 이는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됨으로 인해 비로소 조선의 자본주의 발전이 시작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김홍식, 같은 책)

우선 국정교과서에 의하면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된 결과 “조선총독부는 조선 땅의 40%를 차지한 최대 지주가 되어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40%라는 정체불명의 수치가 나타난 배경을 전혀 설명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사업결과 창출된 국유지는 전체 대상면적 490만여 정보의 2.6%에 불과한 수준이었다는 사실을 정면으로 왜곡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왜곡된 사실을 떠나서, 왜 이 사업이 한국근대화와 연관되는지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조선 후기에는 토지소유와 관련된 신분적 제약은 없었지만, 국가의 수조권적 토지지배는 잔존하고 있었다.

한편, 토지로부터의 수익이 소유자에게 전유되기 위해서는 토지생산성이 안정화된다는 조건 하에서 토지의 수익에 대한 여러 형태의 자의적인 수탈이 철폐되어야 한다.

그러나 조선후기 생산력의 발전은 집약적 소농경영의 자립화를 향한 가능성을 열어놓았지만, 국가의 수취체제는 자의적 운영의 소지를 내포하고 있었다.

이러한 조선후기의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근대적 토지소유는 성립될 수 있다.

국가적 규정의 철폐는 결국 국-민유의 구분을 포함한 소유권 사정과 소유권 공시제도의 완비에 의해서, 토지에 대한 자의적 수취는 수익지가에 근거한 비례세제의 도입으로 해소될 수 있다.

이 글이 ‘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에 의해 근대적 토지소유가 확립되었다고 보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에 의해 근대적 토지소유가 확립되었다는 것은 이제 ‘토지조사사업’을 계기로 자본관계가 농촌에 본격적으로 침투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종래 조선사회를 지배하던 전근대적인 수취관계를 대신하여 자본주의의 논리가 새로운 수취관계로 나타났다.

이는 ‘토지조사사업’이 자본주의의 발전에 기여했음을 뜻하는데, 그것은 수취관계의 변화를 의미할 뿐 일부 독자들이 주장하는 ‘식민지 미화론’과는 전혀 무관하다. (같은 책)

이처럼 토지조사사업이 마무리됨으로 인해 조선 사회는 근대화를 위한 법적 제도적인 정비가 완료되어 순조롭게 자본주의 경제로 이전하게 된다.

1910년대 일본의 조선 통치는 주로 농업 생산성의 향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으며, 이 기간동안 방대한 토지조사사업과 농업시설에 대한 막대한 투자가 이루어짐으로서 1920년대의 산미증식 운동이 시작될 수 있었고 조선의 농업생산력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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