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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실체 고백 13] 동아시아 외교와 전쟁의 역사
[역사의 실체 고백 13] 동아시아 외교와 전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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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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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와 언론에서 숨기는 역사

조선을 거쳐 대륙으로 진출해야만 하는 일본의 이해관계와 시민혁명을 통해 문명개화를 이룩해야 하는 조선의 이해관계는 서로 상당부분 일치

민비나 대원군 등 왕족의 이해관계에서 보지 않고 조선 민중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이 점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1876년 운요호 사건을 통한 강제 개항, 1884년 일본군의 지원을 받고 성공했던 갑신정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가능했던 갑오경장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당시 일본은 국운을 걸고 끊임없이 조선의 독립과 개혁을 추진하고 부추기려 했다.

<동아시아 외교와 전쟁의 역사> 

송산 정광제(이승만학당 이사)

송산 정광제

 

사람은 개인이든 국가든 홀로 살아가는 것보다는 함께 살아가는 것이 낫기 때문에 집단생활을 하면서 서로 관계를 맺게 된다.

크게 보면 지구라는 행성 자체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면서 운명을 함께 하고 있다.

존재하는 것들의 관계는 크게 공생관계, 기생관계, 천적관계 등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공생관계는 서로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는 관계이고, 기생관계는 서로의 관계에서 한쪽은 이익을 얻는데 다른 쪽은 피해를 입거나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는 관계이다.

또한 천적 관계는 한 쪽이 사라지지 않으면 다른 쪽이 사라져야 하는 불구대천의 원수관계이다.

과거 미국에서 백인들은 흑인노예들을 혹사하며 그들의 노동력을 이용해 농사를 지었는데, 이때의 백인과 흑인 노예의 관계는 일방적인 수탈이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백인들이 흑인의 노동력에 기생했던 관계이다.

개와 고양이는 애완동물로 자리를 잡아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날로 수가 늘어나고 있고 사람도 이들로 인해 위안을 얻고 있으니 이는 상생(공생)의 관계라 하겠다.

또한 과거 나치독일은 심각한 오해에 근거한 이론을 만들어 유태인과 슬라브인 등을 열등민족으로 구분, 멸종시키려 했기 때문에 나치즘과 이들 두 민족은 인간과 페스트균의 관계처럼 불구대천의 원수관계가 되는 것이다.

전후 반세기가 넘게 우리 민족 사이에 암묵적으로 계승 발전되어 온 반일감정이라는 것은,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수탈을 당했다는 판단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판단 위에서 한국인들은 일본이 진심으로 과거의 악행을 사죄하고 용서를 빌어야 하며, 그래야만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우정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그 같은 전제에 동의하지 않으니 양국관계에는 형식적인 진전은 있을지언정, 진정한 우정과 신뢰가 싹틀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런데 근현대사의 큰 줄기를 놓고 볼 때 한일관계는 결코 수탈이나 기생의 관계가 아니라 상생 공존의 관계였다고 생각된다.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발전해 온 역사를 일방적인 수탈의 관계로 이해하고 있다면 진정한 우정이 싹틀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

오늘도 한국의 정치인들은 누구누구의 집안이 일제시대 친일파였던 것 같다느니, 대통령이 일본에 가서 옛 은사를 찾아 '선생님 저 도요타(豊田)입니다' 라고 인사를 했으니 친일행위라느니 하는 식으로 비난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친일파의 낙인이 찍히면 과거 간첩의 낙인이 찍힌 것과 마찬가지로 정치든 사회생활이든 모두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니, 정치인이나 학자 교수 작가를 막론하고 그 같은 말이 나오면 펄쩍 뛰며 어떻게 해서든 친일파로 분류되는 것만은 막아보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이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본에는 오랜 옛날부터 한반도의 4 배가 넘는 인구가 있었다.

게다가 칼 솜씨가 좋아야 출세할 수 있는 무인사회였기 때문에 글공부를 최고의 가치로 치던 조선보다는 무력에서 우위에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간동안 일본은 수십 개의 작은 나라로 갈라져 그 안에서 크고 작은 전쟁을 벌이며 살아왔기 때문에 그들은 일본을 천하라고 부르는 것이다.

밖으로는 딱히 갈 데도 없으니 그들에게는 일본만이 유일한 삶의 터전이었던 것이고, 간혹 영웅이 나와 일본 전체를 장악하기라도 하면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루었다고 칭송을 받았다.

조선이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안전했던 것은 조선이 강해서가 아니라 일본이 작은 나라들로 나눠져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일본은 간혹 천하통일을 이루게 되면 조선을 침략할 수밖에 없었다.

동으로는 태평양, 북으로는 차가운 시베리아가 있으니 조선을 통하지 않고는 대륙으로 진출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을 통일한 뒤 여세를 몰아 인도까지 정복하겠다는 야심을 품고 조선을 침공하였으나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에게 패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로부터 300년이 지난 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천황을 중심으로 한 근대적인 통일 국가를 완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엔 우여곡절 끝에 조선을 병합하고 대륙진출의 꿈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6세기말의 일본과 19세기말의 일본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임진왜란 당시의 왜군은 한반도를 침략해 들어와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고 부녀자를 강간하고 재물을 약탈해간 도적떼였다.

 

하지만 19세기말의 일본은 근대적인 헌법과 선거제도, 정치체제를 갖춘 세련된 현대국가의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이 시기에 일본은 부르주아 혁명의 과정을 겪으면서 근대국가의 체제를 정비하고 신속히 개화된 사회로 변모해 국제정세에 눈을 뜨고 있었는데, 당시 열강의 각축장에서 살아남으려면 조선과 청나라 등 동아시아 지역으로 진출해 각종 이권을 획득하고 시장을 넓혀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한편 당시 조선의 당면 과제는 미개한 중세의 정치제도를 타파하고 근대사회로 변모하는 것이었다.

왕과 귀족에 의한 전제 계급사회에서 벗어나 법이 지배하는 시민 사회로 변화하는 것은 조선이나 일본 뿐 아니라 당시 전 세계 모든 국가에게 가장 시급한 당면과제였다.

이는 19세기말 시민혁명의 조류 속에서 변화를 거부한 청나라와 러시아 조선의 왕조들이 차례로 멸망한 반면, 뒤늦게나마 시민혁명에 성공한 독일과 일본 등이 당당히 국제사회의 주역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보면 쉽게 증명이 되는 것이다.

즉 19세기말 조선에 있어서 체제를 뒤집는 혁명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조선에서 이 같은 변화의 물결은 동학운동과 개화당이라는 두 갈래로 진행되었는데, 둘 가운데 하나만 성공할 수 있었어도 조선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시기에 조선을 거쳐 대륙으로 진출해야만 하는 일본의 이해관계와 시민혁명을 통해 문명개화를 이룩해야 하는 조선의 이해관계는 서로 상당부분 일치하고 있었다.

당시 역사적 상황을 민비나 대원군 등 왕족의 이해관계에서 보지 않고 조선 민중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이 점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1876년 운요호 사건을 통한 강제 개항, 1884년 일본군의 지원을 받고 성공했던 갑신정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가능했던 갑오경장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당시 일본은 국운을 걸고 끊임없이 조선의 독립과 개혁을 추진하고 부추기려 했다.

이 시기에 조선의 개혁파들은 모두 친일 노선을 선택했는데 이는 일본만이 유일하게 조선의 개혁을 후원하는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상생의 역사>

조선은 건국 직후부터 왜인들을 해적에서 평화적인 교역대상으로 전환시키기 위하여 여러 가지 회유책을 추진하였다.

왜인들이 자주 한반도의 해안을 침략하는 원인이 경제적인 문제 때문이었으므로 이들에게 교역을 허가함으로서 경제적인 욕구를 충족시켜 주려 한 것이다.

그래서 평화적으로 통교를 원하는 경우 왜인들이 남해안의 어느 포구에서든지 자유로운 무역을 할 수 있도록 허가해 주었다.

이로 인해 조선 초에는 정치, 경제 등 다양한 목적을 가진 일본인들이 조선에 출입하게 되었다.

왜인들은 처음에 경상도의 해안을 주로 이용했다.

그러다 시일이 흐르면서 점차 지역을 확대하여 여러 지역으로 무질서하게 내왕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조선에서는 그 폐단을 줄이기 위하여 1407년(태종 7년) 부산포와 내이포를 왜인의 출입항구로 한정시켜 출입과 교역품을 통제하기 시작하였으며, 상경한 왜인에게는 한양에 동평관을 설치하여 숙소로 이용하도록 하였다.

1419년 쓰시마정벌 이후에는 염포를 추가해 부산포, 제물포 (인천), 염포 등 삼포제도가 확립되었던 것이다.

왜인들은 이 지역에 한해 배를 정박한 뒤 지정된 숙소에 머무르면서 교역과 관광 및 학술조사 등을 할 수 있었다.

이후 1544년이 되자 조정에서는 다른 곳의 왜관을 모두 폐쇄하고 부산포에만 단일 왜관제도를 실시했다.

그 뒤 왜관은 몇 차례 장소를 옮긴 후 1678년에 초량 왜관이 건설되어 양국의 외교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조선과 일본은 왜관에 관리를 파견하여 외교 및 무역 업무를 총괄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1868년 이후 일본제국으로 국호를 바꾼 이룬 일본은 국제무대에 활발하게 진출하면서 적극적으로 교역을 하려 했으므로 단일 왜관을 통한 제한적인 교역으로는 그 뜻하는 바를 이룰 수가 없게 되었다.

이때부터 일본은 기회 있을 때마다 조선에 대해 보다 폭넓은 대일 문호개방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 서양 나라들과 전쟁을 치른 뒤 쇄국정책을 더욱더 강화하고 있었던 대원군은 이를 허가하지 않았다.

당시 서유럽 국가들은 전 세계를 나눠 점령하였고, 마지막 남은 중국마저도 서유럽 열강들에 의해 사실상 분할 점령된 상태였다.

따라서 일본으로서는 다른 열강들보다 먼저 조선에 진출하여 세력기반을 구축하는 것이 사활의 과제가 되었다.

그로 인해 1872년 일본에서는 조선을 무력으로 점령해야 한다는 정한론이 대두되기도 했으나 당시 일본의 국력으로는 조선의 보호국인 청나라와 전면전을 치를 능력이 없었다.

이에 따라 제한적인 무력시위를 통해 조선 정부를 굴복시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발생한 것이 바로 1876년의 운요호 사건이다.

조선에서는 1863년 철종이 죽고 어린 고종이 즉위하면서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 때는 중국을 통치하던 만주족들의 부패가 극심하여 청의 국력이 약해진 시기였다.

이를 틈타 영국은 1842년 아편전쟁을 일으켜 홍콩을 차지했고, 1860년에는 영국과 프랑스 군대가 청나라에 상륙, 광동성을 점령하고 점차 북상해 북경까지 점령하게 되었다.

이 소식은 곧 조선에 전해졌다.

서양 오랑캐에 의해 청나라의 수도가 함락되고 함풍제가 만주의 열하로 도피했다는 소문이 전해지면서 조선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서양 오랑캐들이 만주마저 점령하게 되면 황제는 당연히 조선으로 도망 오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조선마저도 오랑캐들에게 침범을 당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양반과 부유층들은 미리 보따리를 챙겨 남쪽으로 피난을 갔고, 백성들은 서양 오랑캐한테 살아남으려면 천주교를 믿어야 한다는 소문에 따라 일부러 가슴에 십자가를 걸고 다니는 행동이 유행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조선에서 천주교가 급속히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는 통상과 이권을 원했던 것이지 중국을 점령하는 데에는 그리 관심이 없었다.

이후 러시아의 중재로 영불 연합군과 청나라 사이에 평화교섭이 이루어져 함풍제는 다시 북경으로 돌아갔고, 러시아는 중재의 댓가로 청나라로부터 우수리 강 동쪽의 연해주를 넘겨받았다.

이때부터 러시아는 조선과 국경을 맞댄 이웃나라가 된 것이다.

 

한편 대원군은 정권을 잡자마자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하다가, 1866년 프랑스 선교사 9명을 비롯하여 천주교도 8천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바로 몇 년 전 영불 연합군이 청나라를 침공하고 북경을 점령한 전쟁이 단지 프랑스 선교사 1명이 피살된 사건 때문에 시작된 것을 감안하면, 대원군의 이 같은 행위는 대담하다못해 무모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1866년 5월 간신히 살아남아 조선을 탈출한 리델 신부는 압록강을 넘어 중국 천진으로 도망갔다.

천진에는 당시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함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리델 신부는 함대 사령관인 로즈 제독에게 조선에서 일어난 천주교도 학살사건을 알렸고, 그 해 10월 로즈 제독은 순양함이 포함된 7척의 함대와 600명의 해병대를 이끌고 조선을 침공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병인양요다.

프랑스군은 1개월 동안 강화도를 점령하면서 조선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서울을 점령하지 못한 채 퇴각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5년 뒤 미국 아시아 함대의 로저스 제독은 군함 5척과 해병대 1200명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했다.

이들의 목적은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대한 응징과 조선과의 통상관계 수립이었다.

이들 역시 강화도에 상륙하여 조선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지만 관군과 의병까지 동원된 조선의 치열한 반격을 못 이기고 퇴각하고 만다.(신미양요)

조선은 두 차례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 청나라도 못 막아낸 양이를 격퇴했다는 기쁨에 빠져 더더욱 쇄국정책을 강화했는데, 이는 조선이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대원군은 '서양 오랑캐가 침범해 옴에도 싸우지 않음은 즉 화하는 것이요, 화를 주장하는 것은 곧 나라를 파는 일이다'라고 적힌 척화비를 전국곳곳에 세워 쇄국을 아예 국시로 삼아 버렸다.

그렇다면 프랑스와 미국 함대는 작은 조선 하나도 굴복시키지 못할 정도로 약했던 것일까.

당시 이들 열강의 침공은 본격적인 침공이 아니라 우발적인 사건에 대한 보복 성격을 지닌 소극적인 군사행동이었다.

당시 프랑스는 인도차이나의 식민지 경영에 집중하고 있었고 미국은 남북전쟁이 끝난 직후라서 해외에 눈을 돌릴만한 여유가 없었던 시기이다.

청나라 침략의 선두에 섰던 영국은 당시 인도에서 발생한 내란의 수습에 골몰하고 있었고, 러시아는 동진정책의 성과물인 연해주 개척과 블라디보스톡의 군항 건설에 바빴다.

그러므로 이들 서양 제국은 모두 조선에게 문호를 개방시킬 적극적 의도를 갖지 못한 상황에서 소규모의 병력만으로 조선을 개항시키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의외로 완강한 저항을 받자 더 이상 군대를 투입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므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달랐다.

그들은 유신 이후 체제를 정비하고 국력을 키우면서 첫 번째 목표인 조선 진출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1874년 일본은 사소한 사건을 핑계로 연습 삼아 대만을 정벌했는데, 이는 일본의 무력이 만만치 않음을 대내외에 과시하고 일본군의 단합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같은 준비를 거쳐 일본은 1876년 무려 30척의 대규모 함대와 전투부대를 파견, 강화도에 상륙했다.

조선군은 나름대로 열심히 항전했지만 무기체계를 비롯한 전쟁수행 능력에서 두 나라의 군대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계속 저항하다가는 서울까지 함락될 것이 뻔한 상황이 되자 조선 정부는 어쩔 수 없이 강화도 조약을 체결, 일본과 수교하고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비록 무력에 의한 강제이긴 했지만 조선은 운요호 사건으로 인해 시급한 과제였던 개항과 문호개방을 성취하게 됨으로써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당시 일본의 국가이익과 조선의 당면과제는 대체로 같은 방향이었으며 그 결과 일본의 무력행사가 조선에게 있어 바람직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일본의 조선 개항은 22년 전인 1854년 미국함대에 의한 일본의 굴욕적인 강제개항을 일본이 조선에 그대로 갚아준 사건으로서, 두 사건은 비록 군사적인 힘에 의해 강제된 것이었지만 개항 당사국에게는 절실하게 필요했던 변화이기도 했다.

19세기 말 청 일본 조선 등 동아시아 3국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쇄국정책을 통해 서양 세력에 저항하다가 차례로 굴욕적인 강제개항을 경험하게 된다.

청나라는 아편전쟁에 패하면서 1842년 국제사회에 문호를 개방할 수밖에 없었고, 일본은 1854년 조선은 1876년에 각각 개항을 맞았다.

이 가운데 일본만이 14년이라는 과도기를 거친 끝에 사쓰마-조슈 지역을 근거로 한 연합세력이 정권을 장악하여 아시아 최초로 헌법을 도입하고 근대적인 정치체제를 구축하는 데 성공하였다.

개항시기 일본은 상징적인 존재로서의 통치자 천황과 모든 권력을 쥔 에도 막부로 권력이 2원화되어 있었는데, 이 점이 격변기에 신속하게 개혁을 이루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던 것 같다.

이 시기 청나라와 조선에도 나름대로 개혁세력이 존재했으나 모든 권력을 한손에 쥔 전제 군주는 강력하게 변화에 저항했고 이로 인해 근본적인 개혁에 실패하고 만 것이다.

강화도 조약으로 인해 조선은 세계를 향해 눈을 뜨게 되었고 많은 관리와 민간인들이 일본과 미국, 유럽 등지를 여행해 신문물을 접하고 신사상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당시 처음으로 일본에 다녀온 정부 관리가 조정회의에서 말하길, 일본에서는 쇠로 만든 시커먼 마차가 연기를 뿜으면서 달리는데 그 빠르기가 어떠한 준마보다도 빠르며, 전신기를 통해 천리밖에 떨어진 사람과도 대화를 나눌 수 있다고 하자 이를 아무도 믿지 않고 오히려 그를 미쳤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이 같은 사례는 당시 조선이 신문물에 눈을 뜨는 것이 얼마나 시급한 과제였는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사례라 하겠다.

일본은 이후 조선에서 청나라 및 러시아와 대립하면서도 조선의 혁명세력을 일관되게 지원함으로써 조선의 독립과 근대화를 지원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희생을 치렀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884년의 갑신정변과 1894년의 갑오경장이다. -계속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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