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덤 논단] 약육강식
[프리덤 논단] 약육강식
  • 프리덤뉴스
  • 승인 2021.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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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강해진 것이 아니라 거칠어졌고, 부해진 것이 아니라 돈 많은 간사하고 촌스런 여자가 돼 있었다.

어쩌면 그녀는 페미니즘 선두에 서지 않았을까?

본래의 좋은 의미를 잃고 소수의 여성들의 권력유지를 위한 지렛대로 전락한 페미니즘이란 것이 여성을 물건 취급하고 소유물 취급하며 짓밟았던 서구사회의 반항의 결과물을 코뮤니스트들이 악용하는 것임을 대다수가 모르고 있다.

약육강식

글/ 강하정

 

먹이사슬, 먹이 피라미드로 표현되는 자연의 순리는 약자는 강자의 먹잇감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게 한다.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라서 같은 논리의 적용을 받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다.

그런데 만물의 영장을 자처하며 생태계의 기본적 순환을 무책임하게 파괴해온 인간이 그 논리라고 그대로 두었을까?

오늘은 페미니즘 관련 이야기 한 꼭지를 주워볼까 한다.

 

60년이라는 세상의 시간을 지나오는 동안 내 주변에 존재하다가 멀어져간 무수한 사람 중에 식모라는 타이틀을 가진 언니들이 있었다.

병약한 어머니는 다섯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쓰러지고 아프기를 반복하셨고,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위해 식모를 두셨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고 어머니가 동생들을 낳고 사경을 헤매실 때마다 외가에 어쩔 수 없이 손을 빌려달라 요청하셨고, 때론 외할머니가 때론 이모가 도움의 손을 내밀어주어 위기를 모면하곤 했었다.

그러다 이모는 자기 가정이 있기에 더는 우리집에서 기거하며 돕는 일이 어려워졌고, 외할머니는 연로하셔서 혼자서는 살림을 감당하기 힘들어지셨다.

외할머니께서 녹내장으로 고생하시면서도 불쌍한 딸과 안쓰러운 사위에게 차마 그 사실을 말할 수 없어 혼자 버티시다가 하마터면 실명까지 될 위기에 있었던 것을 알게 된 아버지는 말할 수 없는 미안함에 혼자 우시고는 누구에게도 상의하지 않고 어느 날 키가 훌쩍 크고 목소리가 걸걸한 19세 소녀를 데려오셨다.

 

정읍에 사시는 사촌 이모부가 불쌍한 애인데 데려다 일 시켜보라고 천거했다면서, 정읍에서도 더 들어간 시골에서 작은 밭을 소작하는, 할머니와 단둘이 살던 그녀를 데려오신 것이다.

그 언니는 오자마자 내 마음에 쏙 들었다.

붙임성이 좋아서 우스갯소리도 잘 하고, 할머니랑 오순도순 음식도 잘 만들고, 청소며 빨래며 내가 하는 것까지 빼앗아 자기가 하면서 너는 공부해라, 공부해야 잘 산다.’ 소리를 자주 했다.

나는 집안일을 할머니와 함께 해왔기 때문에 집안일을 함께 하는 것에 길들어 있었는데 그 언니는 정말 내게 아무것도 하지 말고 학교 열심히 다니고 공부만 하라면서 자기가 다 하곤 했다.

교복을 빳빳하게 다려서 칼라에 풀까지 먹여서 이름표 달아주며 교복 입은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곤 했다.

나는 그 언니를 정말 좋아했었다.

언니 이름은 복순이였다.

딱하게도 나는 그 언니의 성을 몰랐다.

그저 집에서 늘 복순이 언니로 불렀기에 언니에게는 성이 없는 줄 알았다.

, 중학교 시절을 복순 언니와 쌓은 추억도 많고 정도 깊게 들었었다.

언니가 휴가를 얻어 정읍의 집에 갈 때는 부모님께 생떼를 써서 따라가곤 했었다.

넓디넓은 무궁화밭을 난생처음 보고 매료되었던 것도 그 시기였고, 우물에 손수건을 빠뜨려 두레박질을 하며 울었던 것도 그 시기였다.

그녀는 내 인생의 초창기에 많은 웃음을 주었고 추억을 만들어주었다.

 

어느 날, 그녀가 사라졌다.

어디로 갔는지 몰랐고 한동안 부모님도 말씀이 없으셨다.

후에 알게 되었는데 그녀는 어머니의 패물과 약간의 돈을 훔쳐서 밤중에 몰래 달아났다는 것이다.

내가 집에 없을 때 경찰이 다녀갔고, 그녀를 수배해서 잡았다고 했다.

그런데 잡고 보니 그녀는 임신 중이었다고 했다.

시골의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장례를 치르던 무렵, 그 동네 나이 든 아저씨에게 몹쓸 짓을 당했단다.

그리고 자신이 임신한 것을 안 복순 언니는 어찌할 바를 몰라, 몰래 어머니 패물과 약간의 돈을 훔쳐 달아났다고 했다.

어머니의 한복에 어울리는 누빔지갑에는 당시에 돈이 꽤 있었는데 그녀는 차마 다 가져갈 수 없어서 적은 돈만 빼갔단다.

경찰은 부모님께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물었고, 부모님은 그녀의 뽈록 부른 배를 보고 놀라서 경찰에게 훔친 것이 아닌 것으로 해달라고 그래 버렸단다.

주었다고. 어쨌거나 도둑맞은 사람이 도둑맞지 않고 줬다 하니 경찰은 투덜거리면서 그녀를 풀어줄 수밖에 없었단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왔다.

배가 많이 부를 때까지 그녀는 다시 우리집에서 살았다.

그러나 더는 예전의 웃음 많고 정 많던 언니가 아니었다.

그녀는 짜증을 자주 냈고, 할머니와 다퉜으며, 내게 쌍욕을 하기도 했고, 걸핏하면 동생을 때리기도 했다.

명절 때 떡과 전을 하면, 맛있는 것만 골라 식구들 몰래 훔쳐다 자기 방에 놓고 혼자 먹기도 했다.

결국 할머니와 자주 다투던 끝에 할머니가 인절미 떡을 찧을 때 떡쌀에 물을 묻히던 그녀가 사납게 굴어 할머니가 절굿공이에 머리를 찧어 이마가 찢어지고 피가 철철 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녀는 자신이 배부른 산모임을 위세하며 우리 가정 위에 군림하려고 했었다.

참다못한 어머니가 결국 그녀를 내보내기로 결정했고, 아버지는 그녀를 천거했던 사촌 이모부를 호출했고, 그녀는 자기 친척들에게로 갔다.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녀가 떠나던 날, 짐을 싸며 내게 말했다.

너는 학교도 다니고 부모도 있고 좋겠다.

나도 부모 있었으면 식모따위는 되지 않았을 거야.

내가 웃고 싶어서 웃은 줄 아냐? 할 수 없으니까 웃은 거야!” 그녀는 내가 원수라도 되는 듯 소리를 질렀다.

내가 한 말은 겨우 언니, 나한테 왜 그래?” 였다.

나는 그녀가 억울하게 임신했다는 것에 분노했었고, 그녀를 임신시킨 나쁜 아저씨를 왜 경찰이 잡아가지 않는지 의아했었다.

그리고 그녀가 그 아저씨를 왜 미워하지 않는지도 정말 궁금했었다.

그런데 나쁜 사람조차 미워하지 않으면서 나를 미워하다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세월이 흘러 가끔씩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구하곤 했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여 속으로는 우리 가정을 부러워하고, 미워하고, 질투하면서, 겉으로는 웃고, 다정하게 굴었던 그녀가 이해되다가도 그 이중성에 진저리쳐지기도 했다.

그냥 처음부터 속상하다고 했으면 되었을 것을, 진실되지 못한 삶을 살면서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속이고 미워했다니 가증스럽기까지 했다.

훗날 아버지는 그녀의 부모에 대해 말해주셨는데 그녀 아버지는 다른 여자랑 서울로 야반도주를 했고, 그녀 어머니 역시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서울로 가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녀와 함께 살던 할머니는 외할머니였고, 우리 사촌 이모부네 밭을 소작했다고 했다.

그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동네 남자는 그녀를 강간했고, 임신까지 한 그녀는 갈 곳이 없었는데도 도움의 손길을 내민 우리 가족에게 엉뚱하게 화살을 돌린 것이었다.

그렇다고 자기 처지를 비관하며 우리 가족에게 화풀이를 한 그녀의 처신에 화가 많이 났었다.

그리고 마음에 상처를 깊게 받았다.

그래서 나는 내게 꿈같은 추억을 만들어줬던 그녀를 잊어버렸다.

 

세월이 다시 흘러 서울에서 대학교 다니던 동생이 어느 날 내게 그녀를 봤다고 했다.

대학교 기숙사 구내식당에 그녀가 있더라는 것이었다.

그녀가 줬던 상처를 까맣게 잊은 나는 반가움에 동생의 대학교 기숙사로 달려갔었다.

구내식당에 진짜 그녀가 있었다.

예전의 일은 마치 잊은 것처럼 나를 반겨주었다.

우리는 얼싸안고 뛰며 좋아했다.

어떻게 지내냐고 안부를 묻고 수다를 떨다 왔었다.

그리고 얼마 후 동생은 그녀가 식당을 그만뒀는지 안 보인다고 했다.

 

창신동에 일이 있어 갔다가 길에서 우연히 그녀를 다시 만났다.

예전의 그녀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부티나게 차려입고 귀걸이, 목걸이, 반지 등으로 자신을 과시했다.

그녀는 부잣집에 식모를 보내는 사업을 하는 사장님으로 변신해 있었다.

남편이 그쪽 계통 일을 해서 기숙사 식당 일을 접고 아예 사업으로 뛰어들었다고 했다.

자신의 아이만큼은 사장님 아들 소리 듣게 하겠다고 했다.

부자들은 식모갈아타기를 잘 한다면서 그때마다 소개비를 쏠쏠하게 받으므로 돈벌이는 좋다고 하면서 내게 밥을 사주겠다고 했다.

촌스러운 이름도 개명했다면서 복순 언니라고 부르지 말고 최사장님이라고 부르라고 했다.

그녀의 성이 최씨인 것을 그제서야 알았다.

그날 그 거만하고 거드름 피우는 모습이 역겨워서 사준다는 밥을 거절하고 헤어졌다.

그녀는 강해진 것이 아니라 거칠어졌고, 부해진 것이 아니라 돈 많은 간사하고 촌스런 여자가 돼 있었다.

그리고 부자들에게 식모를 추천하며 얼마나 아첨을 떨었는지 척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녀의 서울말에는 간사함이 흘렀다.

나는 내 기억 속의 무궁화밭이 쑥대밭이 되는 것을 느꼈다.

 

요즘 페미니즘 때문에 나라가 몸살을 앓고 있다.

가끔 그녀 생각이 난다.

어쩌면 그녀는 페미니즘 선두에 서지 않았을까?

혹시 강성노조 같은 데서 큰소리치며 살지 않았을까?

정작 자신의 삶에 그늘을 던진 사람들이 아닌 엉뚱한 사람들에게 화풀이하며 살지 않을까?

우리 가족에게 괜한 화풀이를 했던 그때처럼.

그런 생각이 든다.

본래의 좋은 의미를 잃고 소수의 여성들의 권력유지를 위한 지렛대로 전락한 페미니즘이란 것이 여성을 물건 취급하고 소유물 취급하며 짓밟았던 서구사회의 반항의 결과물을 코뮤니스트들이 악용하는 것임을 대다수가 모르고 있다.

나 역시 여성으로서는 행복하게 살아오지 못했지만 돌이켜보면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진리만 깨달았을 뿐이다.

여성에게 상처 주는 사람은 대부분 여성이다.

여성을 짓밟고 고통으로 몸부림치게 만드는 것도 여성이 대부분이다.

사람 사는 세상에 오직 만 있는가?

그리고 남성여성의 적으로 규정하고 강자로 규정한 그들의 방식은 많이 틀렸다.

내 남편 송경진 선생님은 남성이라고, ‘성인이라고, ‘교사라서 학생보다 강자라고 하는 정말 합리적인 이유가 없는 차별을 당하여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그 고통은 여성인 나와 딸이 치르고 있다.

페미니즘을 표방한 여성단체여성인 나와 딸을 비참하게 만들며 공격하고 있다.

그러는 자신들은 아버지없이 세상에 왔는지!

오빠나 남동생 또는 아들은 없는지!

아니 남편은 없는지!

 

페미니스트라는 대통령은 여성인 내 간절한 편지를 읽지도 않았다.

페미니즘을 독려하는 여성가족부여성인 나와 딸을 철저히 외면했다.

페미니즘을 여성인권이라 하는 국가인권위원회는 여성인 내 진정을 수차례 거부했고 끝내 기각해버렸다.

무엇이 페미니즘인가?

그저 약육강식의 짐승세계일 뿐이다!

 

光明時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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