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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중물] 믿음의 덫 (우상숭배)
[마중물] 믿음의 덫 (우상숭배)
  • 프리덤뉴스
  • 승인 2021.12.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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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어린 시절부터 나는 외조모를 따라 전주 중앙성당에 다녔다.

수녀로부터 혹독한 교리수업을 들어야 했고,

할머니의 입으로 들어가는 영성체를 강제로 입을 벌려 꺼내 먹었으며, 머리에 쓰는 미사포를 왜 나는 못쓰게 하냐고 땡깡도 부렸었다.

그러다 영성체를 받아먹으려면, 또 미사포를 쓰려면 영세를 받고 영세명을 얻어야 한다는 걸 알고 아주 열심히 교리수업을 들었었다.

영민하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던 나는 심사통과를 위해 교리를 줄줄 외웠다.

 

그러다 의문점이 생겼다.

성 삼위일체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수녀는 내 질문에 애매한 대답을 했다.

성부와 성자와 성신이 일체라는 거였다.

그건 뭔데?

자꾸 묻는 내게 수녀는 화를 냈고, 급기야 나는 교리수업 방해자로 낙인찍히고 손바닥을 맞기까지 했다.

할머니는 내게 그냥 수녀가 가르친 대로만 외우라고 하셨다.

엉덩이에 뿔 난 송아지처럼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대들었다.

몰라서 묻는데 왜 안 가르쳐주냐고.

결국, 노수녀 대신 젊은 신부 한 분이 내게 가르쳐주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과 성신은 나무와 같다고.

성당 마당에 있는 나무를 가리키면서

"저 나무를 보아라. 나무에는 가지도 있고 잎도 있고 뿌리도 있단다.

성부 하나님이 뿌리라면 성자 예수님은 나무이고 성신은 가지란다."

그럼 잎은 뭐냐고 물었다.

"잎은 신자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우리와 같은 사제들과 수녀들이란다."

?

"그럼 나는 뭐예요?"

"너는 열매란다."

, 그렇구나!

"그럼 삼위일체가 아니네요?"

나는 또 따져 물었다.

나무 비교를 듣고 보니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과 성신과 신부님과 수녀님과 내가 하나라는 거잖아?

그럼 삼위일체가 아니고 오위일체잖아?

신부님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한 대답...

"사람은 안 쳐줘. 신만 쳐주는 거야. 삼위만."

당돌한 나는 그 대답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미웠다.

같은 나무인데 왜 신만 위인지 아래인지 따지고, 사람은 안 쳐주는 거야?

!

나는 "하나님 미워!"라고 외치고 잡는 신부님의 손을 뿌리치고 달아났다.

그해 성탄절에는 구유에 누운 아기 예수 모형에 미사를 드리는 모습을 보면서 또 돌발질문을 해댔다.

"왜 인형에 기도해요?"

주변의 둘러쌌던 사람들과 사제들과 수녀들이 경악했다.

노수녀가 나를 끌고 가더니 "아무래도 너한테 악마가 들었나 보다. 혼 좀 나야겠다."라고 화를 냈다.

따라오신 할머니께 얘 교육 좀 잘 시키세요!’라고 훈계까지 해댔다.

"씨이! 우리 할머니가 더 나이가 많은데! 어따가(어디에다가) 화를 내요?"

"인형에 기도하는 거나 금송아지에 기도하는 거나 같은 거 아니에요? 하나님이 그러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 나는 정말 당돌하고 싸가지 없는 아이였다.

노수녀는 혀를 끌끌 차면서 교리를 줄줄 외우는 아이가 왜 이러냐고

아무래도 신부님에게 말해서 악을 퇴치하는 뭔가를 해야 할 모양이라고 할머니께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날 나는 다시는 안 다닐 거라고 외치고 발을 탁탁 구르며 화를 내고 성당을 떠났다.

할머니는 미사에 참석해야 한다면서 나를 소리쳐 부르셨지만, 나는 그깟 영성체 할머니나 실컷 먹으라고 꽥 소리 지르고 뒤도 안 돌아보고 집으로 와버렸다.

길거리에 발부리에 채는 돌멩이를 걷어차면서.

국민학교(초등학교) 6학년, 나는 그렇게 천주교와 이별했다.

가끔, 그때 그렇게 떠나길 얼마나 잘했던가 싶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내 영혼을 꿰뚫어 보시고 '우상숭배'에서 나를 건지셨다.

 

그 이후 내 멋대로 하나님을 외면하고 살다가 고등학교 입학 직후에 반신불수라는 치도곤을 당하고는 나는 하나님께로 돌아갔다.

돌아온 탕자처럼 나를 반기는 하나님을 느꼈고 다시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했다.

내가 천주교를 떠나 기독교로 갈아탄 때였다.

고교 시절 내내 나는 정말 열심히 교회를 다녔고, 은혜를 입었고, 하나님의 사랑을 절절히 느꼈다. 그래서 대학진학의 방향까지도 바꾸어 미션스쿨로 갔고, 미션동아리 활동도 열심히 했고, 마포의 모 교회에 정성으로 참석했었다. IVF, CCC 등 대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열심히 활동한 단체에 가입했었고 한겨울 강추위와 미끄러운 언덕길조차 즐거움으로 돌아다녔었다.

그러다 문득 또 깨달은 것.

기독교도 천주교와 마찬가지로 하나님보다 인간이 만든 규율과 조직과 행사가 위주였다는 것.

"교회가 목욕탕입니까?

한주 내내 때같이 죄를 쌓다가 주일에만 교회에 와서 때 밀듯 기도하면 용서받는 겁니까?

그게 회개에요?

교회가 하나님의 집이라면서요?

교회가 목욕탕이냐고요!"

눈살 찌푸리는 행위를 무시로 하면서 교회만 가면 거룩한 체하는 어느 집사 및 권사와 한바탕 입씨름을 한 후, 걱정하는 친구들을 뒤로하고 돌아온 이후 나는 시험에 들었다.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기도했었고 답을 구했지만 못 구했다.

나는 또 교회를 떠났다.

 

그러다 세월이 지나고 가정을 꾸리고 살면서도, 교회를 떠났을망정 나는 하나님을 떠나지는 못했다.

좁은 문을 찾아 헤맸다.

이단이라 칭하는 자들과도 만나봤고, 타 종교에도 기웃거리며, 대체 좁은 문은 어디 있으며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지 찾고 또 찾았다.

그렇게 방황하다가 결국, 또 하나님에게 붙들려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우연히(결과적으로 우연이 아니었음) 여성회관에서 일본어 공부를 하다 만난 짝지의 초대를 받아 그녀의 집을 방문했는데, 글쎄 그녀가 목사의 부인이었다.

개척교회의 국수 점심을 먹은 날, 나는 다시 그 교회의 성도로 등록했고 또 열성으로 다녔다.

그때 나는 성경통독을 66번을 했다. 성경에 666은 좋지 않은 의미로 사용되었기에 나는 오기로 66번을 통독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 나는 교만해졌고 목사와 토론을 즐겼으며 타인의 실수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싸가지 없는 어린 시절의 짓을 또 하고 있었다.

결국, 성전 건축 문제로 목사와 집사가 다투는 모습을 목격한 날, 나는 그 교회를 또 떠났다. 친구를 잃는 것은 속상했지만, 내게는 하나님이 우선이었다.

 

그 교회를 떠날 무렵, 나는 정말 신기하고 놀라운 성령세례를 받았다.

어느 날, 교회의 모든 사람이 성령의 은사를 구하는 기도를 위해 기도원을 갔던 날, 사람들이 방언을 받았다면서 눈물, 콧물 흘리며 방바닥을 뒹굴고 인디언처럼 랄랄라~럴럴러~ 소리를 지르고 발광하는데, 나는 맨 뒤에 앉아 그 모습을 구경하면서 저게 뭔가? 하고 의심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위엄은 간데없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다고 느꼈다.

그날 많은 사람이 방언 은사를 받았다고 간증하고 있는데, 나를 비롯한 몇 사람은 받지 못했다.

집에 돌아와 나는 그 이상한 경험이 화가 나서 하나님께 항의하기 시작했다.

예수가 가르쳐준 대로만 할 거야.

목사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을 거야.

그래서 나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기로 했다.

 

초저녁이었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침대 밑에 무릎 꿇고 앉아서 무슨 말을 할까 망설이다가 무작정 하나님께 도발했다.

"그 사람들이 방언 은사 받았다는 게 정말이에요?

무슨 방언 은사가 미친 사람들처럼 그래요?

나는 못 믿겠어요. 하나님이 정말 계시면 내게도 은사를 보여주세요.

정말 계시면 내게 증명하세요. 이번에 증명하지 않으시면 나는 이제 하나님을 안 믿을 겁니다.

내게 보이세요, 살아계심을."

정말 싸가지 없게 하나님께 딜을 했다.

그래놓고 또 뭐라고 해야 하나 하다가 그냥 '아멘'이라고 말하고 가만히 있었다.

실눈을 뜨고 하나님이 혹시 나타나나 살피면서.

처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곧 내 입이 내 뜻과 달리 움직이더니 '아멘'을 계속 외우는 거였다.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빠르고 정확하게 그러더니 결국 누군가 잡아 비트는 것처럼 내 얼굴 근육이 마구 틀어지고 '아멘''멘멘멘멘' 메아리처럼 되풀이하다가 평생 들어보지 못한, 내가 알지도 못하는 말이 내 입에서 마구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세상의 언어란 언어는 죄다 말하는 듯했다.

심지어 내가 대충 알아듣는 중국어나 일본어, 동남아 언어와 러시아어, 인디언 고대 언어같은 말도 튀어나오고, 내가 뜻까지 알아먹을 전공 프랑스어까지 나오고, 독일어까지 하더니 세상 말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희한하고 곡조 있는 어떤 언어로, 때론 서글프게, 때론 호통을 치듯, 때로는 싹싹 빌면서, 때론 찬양하면서 그렇게 정착을 했다.

그 과정을 새벽까지 지속했고, 내 몸의 차디찬 얼음이 화살처럼 정수리를 뚫고 나가고, 정수리 바로 그 자리로 아주 뜨거운 불이 창처럼 내 몸을 곧게 뚫고 휙 들어와 온몸에 불길로 퍼지는 것을 느꼈다.

땀범벅이 되었고, 입은 옷까지 흠뻑 젖었으며, 내 영혼은 내가 토하는 말들이 거룩한 회개임을 알고 있었다.

눈물은 비처럼 흘렀고, 기쁨은 온몸을 떨게 했다.

아침이 되어서야 내 기도는 끝났다.

내 오장육부가 쏟아져 나오는 듯한, 허리가 끊어질 듯한 거룩한 회개를 했고, 성령의 가르침을 받으며, 성령의 탄식을 들으며, 그렇게 밤을 꼬박 지새우며 기도를 했다.

 

기도가 끝났을 때 내게는 평안이 찾아왔고, 하나님을 만났다는 기쁨과 함께 오만했던, 교만했던 나 자신을 내려놓은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을 때 내 눈앞에는 가족들이 놀란 표정으로 있었다.

방에서 천둥치는 소리처럼 내 소리가 크게 들렸고 알 수 없는 말로 고함쳐대는 내 소리에 너무 놀라서 내가 미친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런데 그들은 땀에 호조론히 젖은 내 얼굴이 빛나고 있으며 너무나 밝은 모습에 또다시 놀랐다고 했다.

그렇게 오순절 다락방의 제자들처럼 나는 성령의 불 세례를 받았다.

 

신기하게도 그 이후, 성경통독을 그렇게 하면서도, 교회의 성경공부에서도, 목사와 토론할 때도 풀리지 않던 구절과 의미가 저절로 풀렸고, 굳이 책을 펴 찾지 않아도 때에 따라 말씀이 저절로 떠올랐으며 내가 어떤 허튼짓을 하려 하면 권고의 말씀이 곧바로 나를 때려 움츠러들게 하였다.

나도 모르게 낯선 이에게조차 하나님에 대해 증언하곤 했고, 교회에서 잘못 가르치고 있는 것들에 대해 절로 알게 되었다.

그러나 예전처럼 얄팍한 성경 지식으로 교만하게 그들을 가르치려 들지 않았고, 그들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데서 그쳤다.

성령은 하나님과 나의 일대일 소통의 통로였으며, 나를 악으로부터 격리하고 보호했으며, 말씀으로 때리기도, 말씀으로 위로하기도, 말씀으로 가르치기도, 함께 기뻐하거나 슬퍼하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교회에 나가지 않아도 하나님을 섬기는 자유를 얻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항상 기도하고,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며, 항상 하나님을 바라는 것.

그것이 내 믿음이다.

교회에서 가르친 찬송가가 아닌데도 내 입에서는 참으로 아름다운 찬양이 툭툭 튀어나온다.

때론 내 말로, 때론 방언으로 그렇게 곡조 있는 기도로 나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찬양하는 동안 내 영혼에 평안이 임하고 새 힘을 얻는다.

나는 욥이다.

나는 요나다.

그리고 지금, 남편 사건을 기화로 나는 하나님의 나팔수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주위의 눈치를 보며 우상숭배를 하지 않아도 되어 자유롭다.

성주상을 차리며 조왕신을 모시는 시댁의 압박으로부터도 자유로웠다.

남편이 불교에 귀의하고 절에 다녔어도 나는 자유로웠다.

IMF 금모으기를 할 때, 나는 십자가 목걸이와 십자가 귀걸이를 기부해버렸다.

내 십자가는 내 영혼에 새겼고, 사는 동안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하니, 금붙이로 만든 십자가 따위를 목에 거는 것은 아름다움과 재물에 대한 욕심을 드러내는 행위 이외에 아무것도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 이후 내 몸에서는 치장하는 금붙이가 사라졌다.

반지, 목걸이, 귀걸이, 브로우치, 허리띠 등등...

나를 부각하고 자랑하기 위해 착용하던 것들이 내게서는 사라졌다.

내게는 귀에 뚫은 구멍만 남아 나날이 메워지더니 지금은 두 개의 점처럼 남았다.

 

하나님의 자녀는 본인이 되고 싶다고, 교회만 다닌다고, 예수 믿는다고 공표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선택하고 풀무질로 연단하여 정금 같이 나오도록 그렇게 가르치시는 것이다.

그래서 은혜로 택함을 받은 자들이라 하는 것이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예수의 본을 따라 각자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비로소 너는 내 아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나를 붙들어주시고, 가르치시고, 아버지의 자녀로 인을 쳐 주신 그분의 영광을 위해 나는 죽음보다 고통스러운 내 십자가의 현실을 산다.

예수가 직접 본을 보이시고 앞서가신 그 길로 힘겹지만 한 걸음씩 뚜벅뚜벅 걸어간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우상숭배를 하는 자들의 종말이 어떠할지를 알기에 안타깝다.

영광은 사람의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의 것이다.

그것을 가리고, 빼앗고, 심지어 자기 영광을 취하는 자들은 반드시 그 책임을 물으실 예수님의 놀라운 위엄과 두려움을 맛보게 될 것이다.

아기 예수?

유약하고 아무 힘도 없는 인간 아기 모형을 두고 거짓 제사를 지내며 거룩한 체하는 자들을 보며 나는 진짜 거룩한 분노를 느낀다.

비록 시골에서 강아지 열세 마리와 사는 희귀병 환자인 처지라 해도,

으리번쩍하게 차려입고, 갖은 모양새를 갖추며, 경건한 척하는 자들보다 내 간절하고 깨끗한 영혼의 기도를 열납하시며 기꺼워하시는 내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임마누엘.

할렐루야!

 

2021.12.25. 오전 8:00 크리스마스라는 날에

光明時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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