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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봉 칼럼) 애국심
(노재봉 칼럼) 애국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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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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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봉 전 국무총리
 
군인들은 경례를 할 때 <충성>이란 구호를 외친다. 그 충성이 전쟁터에서 죽음으로 이어졌을 때, 국립묘지의 현충탑 그늘 아래 안장된다. 미국의 알링턴 국립묘지에는 라틴어로 “조국을 위해 죽다”라는 비석이 서있다. 이렇게 조국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게 만드는 열정을 애국심이라고 한다.
 
이것은 모든 근대국가의 기반이 되는 민족주의가 열정과 연결되어 행동으로 표현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그 것 없이는 민족적 정치공동체의 유대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것이 민족적이라는 의미에서 노스탈쟈를 수반하는 향토애와도 다른 것이다. 그런데 애국심의 발로가 도를 넘을 때에는 다른 민족에 대한 배타성을 수반하는 쇼비니즘이나 또는 전쟁을 주장하는 징고이즘으로 흐를 수도 있다. 
 
이런 위험 때문에 톨스토이 같은 사람은 애국심을 강하게 규탄하기도 했다. 애국심의 발로를 전쟁원인으로 본 것이다. 그러니까 애국심의 발로에는 언제나 용기있는 의지와 함께 절제가 필요하다는 말이 된다. 어떤 경우에 죽음을 각오한 용기가 필요하며 또 어떤 경우에 절제가 필요한가 는 문제의 성격과 상황에 따라 구체적으로 달라진다. 가령 지금 한국에 일제청산이라는 주장과 함께 위안부 문제가 시끄러운데, 이것이 이른 바 원한으로 발로 되면서 외교문제로 연결되어 안보에 상당한 차질을 빚고 있다. 이것이 절제를 잃게 되면 나라를 잃게 만든 사람들의 죄는 묻어져 버리고, 왜 일본 제국주의가 사랑을 베풀지 않았느냐는 비현실적 도덕주의로 빠질 우려가 생기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외교적으로는 고립으로 치다를 수 밖에 없게된다.
 
이와 반대로, 통일문제와 연결시켜 생각해 보자. 북한에 대해 국제사회는 노예국가로 규정하고 있다. 올바른 민족주의라면 그 노예들을 해방시켜야하는 것이 당연한 애국심의 목표가 되는 것이다. 링컨 미국 대통령은 노예를 해방시키기 위해 전쟁을 선포하고 근 230 만명의 인명피해를 초래했었다. 그 애국심의 의지가 없었다면 오늘의 미국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에 비추어, 대한민국이 북한의 노예를 해방시키기 위해 죽음의 각오로 싸울 의지가 없다면 이 민족은 근대국가의 완성에 이를 수가 없다. 그렇게 되면 역사적 사명은 증발되고 이 민족은 세계사의 미아가 되고 말 것이 뻔한 일이다.
 
스스로 북한의 노예를 해방시킬 의지가 없다면 우리가 노예의 길로 끌려 갈수 밖에 없다는 것을 깊이 새겨야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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