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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세미나] 전두환과 제5공화국의 역사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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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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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과 제5공화국의 역사적 의미(1~5)

전두환과 제5공화국의 역사적 의미

 

최 진 덕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철학)

 

1. “전두환 혐오증이라는 질병: 전두환은 악마인가?

 

작년(2021) 11월 전두환 전대통령이 서거하는 날, 저는 경상남도 진주의 어느 병원 6인 병실에서 여동생을 간병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정오 무렵 병실의 TV전두환 씨 향년90세 사망, 국립묘지 대상 아냐라는 자막과 함께 그의 서거 소식을 알렸습니다. 뉴스를 들은 병실의 나이 드신 아주머니 한 분이 TV 화면에 비치는 그의 모습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언성을 높였습니다. “저런 놈은 당장 때려죽여야 해.” 그러자 같은 병실의 다른 아주머니 두 분이 맞장구를 쳤습니다. “맞아, 때려죽여야지.”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저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

 

전두환(이하 호칭 생략)은 경남 합천 출신이므로 병실 아주머니들과 동향입니다. 죽고 나서까지도 동향의 아주머니들로부터 입에 담기조차 힘든 막말을 들어야 했다는 사실은 전두환 혐오증이 지역의 차이를 넘어 우리 국민의 정신 속에 널리 퍼져 있음을 알려줍니다. 병실 아주머니들은 전두환을 만나 얘기를 나눈 적도 없었을 것이고 그의 <<회고록>>을 읽었을 리도 만무합니다. 평생 남편 뒷바라지와 자식 키우기에 바빴을 이 분들에게는 전두환이 누구인지 생각을 해볼 만큼 한가한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분들의 전두환 혐오증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요. 당연히 다른 누군가에 의해 심어졌습니다.

 

한겨레신문은 학살자 전두환, 반성 없이 죽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찬탈하고, 내란을 일으켜 시민을 학살한 뒤 고문과 압제로 인권을 유린했던 독재자 전두환이 23일 사망했다. 국민은 지난 40여년 수없이 사죄의 기회를 줬지만 거짓과 핑계로 일관했던 그는 죽는 날까지 한마디 사과도, 참회도 없었다.” 한겨레신문의 주장이 정말로 옳다면 경남 아주머니들의 막말은 전혀 막말이 아니고 참말일 것입니다. 정말로 전두환이 한국 현대사에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남긴 학살자인데도 사과 한마디 없이 거짓과 핑계로 일관했다면 살아생전에 국민이 나서서 당장 어떻게 했어야 마땅했습니다.

 

보수신문으로 알려진 조선일보의 보도태도 또한 한겨레신문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조선일보는 서거 당일 전두환, 연희동 자택서 사망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이 23일 별세했다고 쓰고는 혈액암으로 수척해진 90 고령의 전두환이 광주법정으로 끌려가는 사진을 실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11.24) 사설에서 조선일보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전 전 대통령이 철권통치했던 8(1980-88)은 정치적 억압과 권위주의 통치, 인권탄압이 이어진 시기였다. 그는 12.12 쿠데타를 통해 권력기반을 잡은 후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 진압하며 집권했다. ‘80년의 봄으로 상징됐던 민주화 바람은 그의 등장으로 싹이 꺾였다.”

 

조선일보는 학살자라는 말을 쓰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전두환의 치적 몇 가지를 마치 사족처럼 덧붙이기도 했습니다. 단군 이래 최대의 경제 호황기를 맞이했다는 것, 그리고 예상을 깨고 권력을 순순히 내놓음으로써 국가적 파국을 피하고 평화적 정권이양을 했다는 것 등이 그것들입니다. 하지만 조선일보는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좌우 진영과 지역, 계층으로 갈라져 대립하고 있다. 이 대립과 갈등이 격화된 출발점이 바로 전 전 대통령 집권 과정이었다. 이 갈등은 현재도 진행형이다. 전 전 대통령이 5.18에 대한 진심 어린 사과를 하지 않고 떠난 것은 개탄스러운 일이다.”

 

조선일보는 1980년 이후 한국현대사의 모든 대립과 갈등의 원인을 전두환 한 사람한테 다 뒤집어씌우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겨레신문의 논조와 별반 다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병실 아주머니들의 막말을 정당화해주기에도 부족함이 없어 보입니다. “전두환 혐오증은 좌와 우를 가리지 않고 지식인들 사이에도 광범위하게 퍼져 있습니다. 조선일보는 사설 마지막에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말을 인용하고는 어두웠던 역사의 기억도 그(전두환)와 함께 떠나보냈으면 한다고 점잖게 말합니다. 전두환을 한국현대사 최고의 악마로 낙인찍어놓고는 미워하지 말자, 과거지사로 돌리자고 하니, 이것은 병주고 약주는 것도 아니고 병만 주고는 그냥 모른 채하자는 것입니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는 늘 찬반양론이 분분하기 마련인데 유독 전두환에 대해서는 좌우를 막론하고 오랫동안 맹목적 증오에 가까운 부정적 평가 일변도였습니다. 해도 해도 너무 한다는 탄식이 절로 나올 지경입니다. 전두환을 악마로 보는 근거가 도대체 무언지를 물어야 했지만 좌파는 물론이고 우파까지도 근거 묻기를 게을리 해온 듯합니다. 당사자의 말은 다 무시하고는 아무 근거 없이 무조건 학살자로, 무조건 악마로 낙인찍어놓고는 사과를 요구하고 심지어 조리돌림까지 한다면 그것은 심각한 인권유린이고 정치폭력입니다.

 

전두환은 정말로 학살자이고 악마였을까요. 스탈린과 모택동은 수천만 명을 학살했습니다. 이 두 악마의 적색폭력은 히틀러의 백색폭력보다도 수십 배 더 악질입니다. 이 두 악마의 새끼에 해당하는 인간이 김일성이고 김정일입니다. 이 두 인간은 6.25남침으로 동족상잔의 비극을 일으켰고 대명천지에 동포 수백만을 굶겨 죽였습니다. 스탈린과 모택동, 김일성과 김정일, 이 잔인한 공산주의 악마들의 천인공노할 만행과 비교해본다면 전두환에 대한 평가는 달라져야 합니다. 전두환은 공산국가 북한과의 체계경쟁에서 압도적인 국력 차이로 자유민주국가 대한민국의 최종 승리를 이끌어낸 대통령이었습니다.

 

전두환은 10.26 이후 국가위기를 극복하고 국민의 삶을 풍요롭고 안정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를 포함 80년대를 살았던 많은 사람들은 전두환 시대가 살기 좋았다고 기억합니다. 물가는 안정되었고 단군 이래 최대의 호황으로 일자리가 풍부했습니다. 사회는 개방적이면서 질서가 잡혀 있었고 안보는 튼튼했습니다. 또한 대학가 운동권 좌경세력과 일부 야권 정치인들 외에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어떤 부자유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반대세력에 대한 탄압도 그다지 심하지 않았습니다. 80년대를 살았던 많은 사람들이 피부로 직접 느낀 역사적 진실은 전두환을 악마로 보는 전두환 혐오증과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하지만 전두환 시대가 살기 좋았다고 말하는 우파 성향의 사람들까지도 그에게 감사를 표하거나 호감을 가지기는커녕 욕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자유민주적 절차를 위반한 듯한 집권과정과 광주사태의 책임에 대한 의혹 때문입니다. 전두환은 법정에서 모든 의혹에 대해 자세하게 해명을 했고 2017년에는 3책의 방대한 <<회고록>>을 출판하여 자신의 해명을 체계화했습니다. 그에 의하면 12.12는 군권을 장악하기 위한 반란이 아니라 합법적 수사를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고, 5.17 계엄확대는 국권탈취를 위한 쿠데타가 아니라 전국 규모의 봉기를 막고 체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습니다. 광주에는 계엄군 투입이 불가피했지만 전두환은 지휘계통에 있지 않았음을 분명히 밝혔습니다.(<<회고록>>1, 4)

 

그런데도 전두환 혐오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전두환의 해명에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전두환의 해명이 모두 자기변명에 불과한 것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전두환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철저한 군인이었습니다. 저는 우선 전두환의 <<회고록>>에 바탕을 두고 군인 전두환의 진면모부터 규명해보고자 합니다. 그가 군인이라는 점은 그 자신과 그의 모든 정치적 행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더 나아가 한국현대사를 이해하는 데에도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한국현대사의 주역은 군인과 기업인이었습니다. 군인과 기업인을 알아야 한국현대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는 한국현대사에서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약30년에 걸친 시대는 학생 대 군인의 대결구도라는 틀 속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시대에는 민족주의와 민중주의를 지향하는 학생 지식인들의 좌파적 성향이 적지 않는 국민들의 공감을 얻으면서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군인 대통령의 우파적 성향과 날카롭게 대결했습니다. 학생들의 좌파적 성향은 유감스럽게도 결국은 반()대한민국, 심지어 친()북한으로 귀착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파 중산층 국민이 아직 형성되지 아니한 상황에서 학생들의 좌파 아이디얼리즘을 막아내고 대한민국을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로 향하게 만든 주역은 두 군인 대통령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관점으로 한국현대사에서 군인 전두환의 정치적 행위와 5공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10.26, 12.12, 5.17, 5.18과 관련된 법적인 논쟁에 대해서는 역사학자도 정치학자도 법률가도 아닌 저로서는 그다지 큰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운명은 법의 차원을 월등히 초월하는 최고의 중대사이기 때문입니다. 철학도인 저의 눈에는 그렇게 보입니다. 저는 한국현대사 전문가가 아닙니다. 아직 아마추어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한국현대사는 우리 모두의 자서전입니다. 누구나 염려할 자격이 있고 누구나 한 마디쯤 할 자격이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 몇 마디 해보겠습니다.

 

2. “군인, 죽음, 조국”: 전두환은 철저한 군인이다

 

전두환은 다른 누구이기 이전에 철저한 군인이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전두환 이해에 있어 가장 중요한 키포인트입니다. 군인은 조국을 위해 죽는 것이 자신의 본분이라 여기는 자입니다. 전두환은 말합니다. “국가는 필요할 때 군인에게 목숨을 요구한다. 그것은 군인의 명예이고 동시에 군인의 영광이다.” 참된 군인이라면 매일매일 죽음을 각오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전두환은 그런 군인이었습니다, 육사생도 시절부터 그는 평생 멸사돌진(滅死突進)’의 정신을 지닌 군인으로 살자는 다짐을 했습니다.(<<회고록>>1, p.585)

 

전두환은 출근할 때 부인에게 , 다녀오리다라는 인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군인이 임지로 가는 길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회고록>>3, p.87) 그의 출근 인사는 늘 , 가요였습니다.(<<회고록>>1, p.180) 전두환이 군인으로서 가장 좋아했던 부대는 공수부대였습니다. “실전보다 더 고된 훈련, 높은 하늘에서 조국을 위해 생명을 던지는 듯한 낙하훈련 등 초인적 훈련을 통해 군인으로서의 자부심과 긍지를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공수부대였다고 그는 말합니다.(<<회고록>>3, p.70) “군인, 죽음, 조국은 전두환 이해를 위해 필수적인 이 세 가지 키워드입니다.

 

그는 1960년 힘들기로 유명한 미육군보병학교 레인저 코스를 거친 특수전 전문가였고 우리 공수특전대의 창설요원이기도 했습니다. 공수특전단 대대장 시절 낙하훈련을 할 때면 그는 부인의 경대 위에 신분증을 두고 출근해, 언제나 부하들보다 먼저 뛰어내렸습니다. 신분증을 부인의 경대 위에 둔 것은 위험한 낙하훈련에 임하면서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린다는 나 스스로에 대한 다짐의 몸짓이었다고 그는 말합니다.(<<회고록>>3, p.86) 별을 달고 공수특전단장이 된 다음에도 그는 1호기에서 제일 먼저 낙하했습니다. 부인 이순자 여사는 남편이 여의도 백사장에 뛰어내리는 날이면 한강다리로 나가 낙하 모습을 멀리서 가슴 졸이며 지켜보았다고 합니다.(<<당신은외롭지않다>>, p.125)

 

어린 시절 참담한 빈곤으로 인해 정규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전두환이 19524년제 정규육사 제1(육사 전체로 보면 11) 입학시험에 합격한 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는 입학정원 200명에는 들어가지 못했고 예비합격자 28명 가운데 끝에서 2번째로 간신히 합격했습니다. 228명이 가입교 후 20일 간 기초군사훈련을 받는 동안 28명이 탈락하고 그는 육사생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육사는 매우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미국 웨스트포인트 커리큘럼을 그대로 가져와 철저한 교육훈련으로 자유민주군대의 장교를 양성했습니다. 전두환의 다음 회고는 의미심장합니다. “개인의 인권과 자유 및 평등이 존중되고 토론을 통해 합의를 도출해내는 자유민주주의적 문화를 익힐 수 있었다.”(<<회고록>>3, p.77) 자유민주주의적 문화가 체질화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육사11기 이후 한국의 엘리트 장교들은 일본군 출신 선배 장교들과 달랐습니다.

 

전두환 생도는 잠자는 시간을 아껴가며 하루 24시간 공부와 독서, 훈련과 운동에 몰두했습니다. 생도시절 4년 동안 애국애민의 마음가짐과 주어진 목표와 임무를 목숨을 걸고 완수한다는 소명의식을 체득할 수 있었다고 그는 회고합니다. 그가 생도시절 체득한 결사의 애국심과 결사의 책임의식, 그리고 자유민주주의적 신념은 그의 평생을 지배합니다. 10.26 이후 국가위기 상황에서 그가 보여준 결사적 행동, 대통령 취임, 국정운영 방식, 그리고 단임 약속 이행과 평화적 정권 교체까지 모두 생도시절 체득한 신념의 행동화였습니다.

 

그렇다면 전두환은 무얼 하건 항상 군인이었습니다. 그의 정치적 활동 또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지는 군인의 위국헌신 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헌신하고 희생한다는 생각으로 살아왔다. 5공화국이 출범할 때에도 나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희생한다는 생각이었고, 6.29선언도 나 스스로를 희생했기 때문에 국민을 감동시키고 성공할 수 있었다.”(<<회고록>>3, p.290) 1980년의 국가위기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정치인이 된 다음에도 전두환은 군인정신을 잊지 않았습니다.

 

5.16 이전 육사출신 장교들은 모이면 나라 걱정을 했습니다. “군이 혁명을 해야 한다는 말도 나왔습니다. 그렇다고 반드시 군의 집권을 생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전두환도 군의 혁명을 열망했습니다. “미명을 밀어내며 새벽이 오듯 그렇게 5.16혁명이 찾아오자,”(<<회고록>>3, p75) 그는 곧바로 생면부지의 박정희 장군을 찾아가 지지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리고 혁명 성공을 위해 육사생도의 시가행진을 이끌어내겠다고 제의한 다음 육사로 달려가 육사교장의 애매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우여곡절 끝에 성사를 시켰습니다. 육사생도의 시가행진이 성공하자 공사생도와 해사생도의 시가행진이 뒤를 이었습니다.

 

전두환은 뒷자리에서 세상을 개탄만 해봤자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생각에서, 육사생도의 시가행진을 성사시켜 목숨을 건 혁명 주체세력에게 당신들의 선택은 옳았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고 했습니다.(<<회고록>>3, p.80) 육사생도로서 체득한 그의 신념과 멸사돌진의 정신이 그를 적극적 행동으로 내몰았습니다.

 

전두환은 5.16혁명 첫날 육군 대위의 신분으로 박정희를 만났고, 10.26 당시에는 시해사건의 수사를 책임지는 보안사령관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박정희 시대의 시작과 끝에 전두환이라는 군인이 있었습니다. 허화평의 증언에 따르면 박정희가 가장 좋아했던 사람은 전두환이었습니다.(팬앤마이크, <5공화국역사의 증언> 참조) 전두환은 박정희 시대를 이어 새로운 시대를 열도록 역사의 신에 의해 미리 운명 지워져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최고희의 의장 시절의 박정희는 전두환에게 예편한 뒤 국회의원이 되라고 권유했고 이 권유는 사실상 지시였지만 전두환은 거역을 하고 군으로 복귀했습니다. 군인이 정치를 하면 되느냐 마느냐는 고민 때문이 아니었고 단지 나는 계속 군인의 길을 걷고 싶었을 뿐이었다고 그는 말합니다.(<<회고록>>3, p.76)

 

항상 군인이고 싶어 했던 전두환이 정치권으로 끌려나오게 된 계기는 박정희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10.26이었습니다. 박정희는 10.26이 있기 불과 6개월 전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에 임명했습니다. 대통령이 시해되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고 보안사령관은 합동수사본부장이 되어 시해사건의 진실을 파헤쳐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박정희는 자신이 가장 아끼던 인물에게 사후처리를 맡긴 셈이 되었지만 전두환은 수사 임무를 완수하려면 12.12로까지 갈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짊어지게 되었습니다. 12.12는 그의 생각이나 소망과 관계없이 그를 정치적 중심인물로 부각시켰습니다.

 

어떤 임무이건 주어지기만 하면 목숨을 걸고 완수해야 한다고 믿었던 전두환은 자신이 부여받은 수사 임무가 자신의 개인적 운명은 물론 국가적 운명과도 직결된다는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다음은 <<회고록>> 서문에 나오는 결의에 찬 문장입니다.

 

나는 국가의 운명을 마주해야 했다. 역사의 진행을 시류와 대세에 맡겨둘 수만은 없었다. 나는 청년 시절 조국 수호를 위해 군문에 뛰어들던 때의 초심을 되새겼다. 대의를 살펴 판단했고 내 삶의 신조가 가리키는 대로 결심했고, 내가 일하던 방식대로 행동했다. 12.12였다. 그 일은 나의 주저 없는 선택이었고 목숨을 건 결단이었다.”(<<회고록>>1, p.18)

 

육사에서 훈련받은 철저한 군인이 아니었더라면 전두환은 계엄사령관 정승화 측과 적당히 타협하고 12.12까지 가지는 않았을지 모릅니다. 계엄사령관 연행은 실패할 경우 하극상의 반란자가 되어 패가망신에 이를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전두환은 거사하기 전날 4명의 자식들과 마지막일 수도 있는 저녁 식사를 함께 하면서 다음과 같이 일러주었습니다.

 

너희들에게 슬픔을 안겨주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에게 맡겨진 역사적 임무를 비겁하게 포기할 수 없다. 소신을 지킨 아버지를 기억해야만 한다. 그리고 어머님을 잘 모시도록 해라.”(<<회고록>>1, pp.180-181)

 

전두환에게는 자신보다도, 자신의 가족보다도 국가의 운명이 우선이었습니다. 이순자 여사는 달걀로 바위 치는 격이라면 남편을 말렸지만 대학생이었던 장남 전재국은 아버지를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지지했습니다.(<<당신은외롭지않다>>, p.189)

 

12.12의 경과를 읽어보면 손에 땀을 쥐게 할 정도로 스릴 넘치는 한 편의 잘 만들어진 영화입니다.(<<회고록>>1, 2장 및 신윤희, <<12.12는 군사반란인가?>> 참조) 12.12라는 제목의 영화를 보면서 저는 전두환이 자신의 의지와 전혀 관계없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힘을 장악했고, 그래서 대한민국이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방향으로 계속 나아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사실에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전두환이 12.12를 앞두고 나는 국가의 운명을 마주해야 했다고 말할 때 그 말은 대한민국이 우파적 방향으로 가느냐 아니면 좌파적 방향으로 가느냐 선택의 기로에 자신이 서있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독해는 성급하게 보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박정희를 시해한 김재규 편에 선 정승화 계열의 군인들은 어차피 반()박정희 노선을 걷게 되어 있고, 그러다 보면 민주화를 외치는 좌파 세력과도 손을 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좌냐 우냐는 국가의 운명을 가르는 결정적 사안입니다. 남북대치 상황에서는 특히 더 그렇습니다.

 

국가의 운명과 한국현대사의 방향성을 염려하는 입장에서 보면 군사반란이냐 아니냐는 하는 법적인 논란은 부차적입니다. “국가의 운명은 법의 차원을 초월합니다. 12.12는 전두환이 철저한 군인답게 국가의 운명주저 없이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우파국가 대한민국을 수호할 태세가 갖추어졌음을 알려주는 정치적 사건입니다.

 

그는 이제 루비콘 강을 건넜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한 철저한 군인의 애국충정과 위국헌신의 표현일 뿐, 대권야욕과는 관계가 없었습니다. “12.12 당시 나에게 정권 장악 의도가 있었다면 못할 이유도 없었다고 그는 솔직하게 털어놓습니다. 이어서 성공하면 혁명이요 실패하면 역적이 되는 것인데 훗날 쿠데타했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10개월간 목숨 건 곡예를 할 바보는 없을 것이라는 말까지 덧붙였습니다. 12.12가 어느 날 갑자기 쿠데타로 둔갑한 것은 김영삼, 김대중이 정권을 잡은 다음이었다고도 했습니다.(<<회고록>>1, p.268) 대권을 잡을 힘은 있었지만 대권야욕 자체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전두환은 당시 대권야욕에 불타던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삼김(三金) 씨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이었습니다. 인종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는 어떤 위치에 있건 국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는 철저한 군인이었습니다. “군인, 죽음, 조국이 세 단어를 확실하게 알지 못하면 누구라도 전두환을 삼김 씨와 같은 부류의 대권야욕에 가득 찬 정치꾼으로 몰아가는 항간의 통설에 자신도 모르게 굴복하게 됩니다. 민간을 넘어 언론계와 학계에까지 널리 퍼져서 전두환 혐오증을 고질병으로 악화시키고 있는 항간의 통설의 천박성에 맞서야 합니다. 물론 쉽지 않는 일이지만 그것은 우파적 지성의 의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3. ‘학생 대 군인의 대결구도와 체제위기의 심화

 

전두환은 10.26사건 수사로부터 12.12를 거쳐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과정에 대해 어디까지가 나 개인의 자유의지와 결단의 결과이고 또 어디까지가 나 개인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운명적 상황이었는지가늠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회고록>>1, p.17) 자유의지와 운명은 늘 불가분하게 뒤섞여 있습니다만 전두환이 새삼 그렇게 말한 것은 운명의 힘이 너무나 강력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아마 다음 말이 더 솔직한 고백일 것입니다.

 

나는 대통령이 된다는 꿈조차 꾼 적이 없고 더욱이 대통령이 될 준비를 한 일이 없다. 그것은 분명히 운명처럼 찾아왔다. 내가 대통령이 된 것은 기회를 잡은 것이 아니라 운명을 받아들인 것이다.”(<<회고록>>1, p.586)

 

80년 최규하 정부를 떠받치는 네 기둥은 신현확 국무총리, 이희성 계엄사령관, 최광수 비서실장, 그리고 전두환 보안사령관이었습니다.(<<회고록>>1, p.316) 전두환의 공식적 위치는 네 기둥 가운데 가장 낮았습니다. 하지만 제 기억으로는 그 해 봄쯤부터 전두환이 최고실세라는 소문이 항간에 파다했습니다. 그 해 4월 기능을 상실한 중앙정보부를 정상화하라는 최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정보부장서리를 겸직하게 된 것도 소문을 증폭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2.12를 거치면서 군부의 중심에 서게 되어 중망을 한 몸에 받고 있었으니 분명히 근거 없는 소문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전두환에게는 대권야욕 따위는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에겐 최규하 대통령과 이희성 계엄사령관을 잘 보필해서 국가를 위기에서 구한다는 일념뿐이었습니다. 이것은 전두환 자신의 증언이고 또한 이순자 여사의 증언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사자들의 증언을 어떻게 믿느냐고 반박할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들어가 볼 수 없으니 증언이 맞는지 여부를 입증할 방법은 물론 없습니다. 하지만 군인, 죽음, 조국이라는 세 단어를 상기해보면 위국헌신 일념뿐이었다는 제 추측이 맞지 싶습니다.

 

전두환은 매일매일 죽음을 각오하고 임무를 수행하는 철저한 군인이었습니다. 무언가를 위해 정말로 죽음을 각오하는 순간 우리의 마음은 사심이나 두려움에서 벗어나 편안해지고 맑아집니다. 사심도 없고 두려움도 없는 편안하고 맑은 마음은 엄청난 힘의 원천이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지혜도 거기에서 나오고, 또 겁 없이 소신껏 행동할 수 있는 용기도 거기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흔들리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대권야욕과 같은 사심이 있다면 마음이 흐려져 지혜와 용기를 발휘하기 어렵습니다. 좀 성급한 추측이지만 전두환은 대권야욕이 없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대권을 손에 쥘 수 있었다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이순자 여사는 신혼 초부터 기회 있을 때마다 남편으로부터 군인은 국가가 요청하면 언제라도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신분이므로 출근한 남편이 퇴근해 반드시 다시 집에 돌아올 거라는 안이한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말을 반복해서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몹시 서운했다고 합니다.(<<당신은외롭지않다>>, p.192) 서운한 정도가 아니라 황당하지 않았을까 짐작됩니다. 전두환은 군인의 생사관을 부인에게까지 강요하다시피 했습니다. 사실 그에겐 군인의 부인도 군인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이게 부부관계에서 바람직한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건 전두환이 매일 죽음을 각오하면서 사는 군인의 삶에 얼마나 철저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전두환은 그런 삶의 자세로 살았으므로 12.12를 겪고 최고실세라는 소문이 나돈다 하더라도 국가수호라는 자신의 임무에 매일매일 열심히 매진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변화도 없었습니다. 이순자 여사 역시 예전과 다름없이 일상의 반복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당시 이 여사는 연세대 외국어학당에서 영어를 배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801월에는 결혼으로 중단했던 공부를 계속하고 싶어 42세의 나이에 외국어대 영어과 편입시험에 응시했으나 불합격의 고배를 마십니다. 실망감이 아주 컸다고 합니다. 남편이 최고실세라는 소문과는 전혀 안 어울리는 일상의 반복입니다.

 

그러나 일상의 반복이 한 순간에 깨어지는 일이 벌어집니다. 외국어대 편입시험에 낙방하고 3월부터 다시 연세대 외국어학당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4월이 되자 학생들의 시위가 격렬해졌습니다.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하는 4월 어느 날, 연세대 교정에서 선혈 같은 붉은 글씨로 유신괴수 전두환이라 쓰인 거대한 플래카드가 학생회관 옥상에서 지상까지 드리워져 있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이 여사는 심장이 멎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중앙도서관 앞 광장에서는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를 불태우는데 그 허수아비 위에는 붉은 글씨로 전두환 화형식이라 쓰여 있었습니다.(<<당신은외롭지않다>>, pp.196-205) 이 여사는 크나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유신체제를 혁신하겠다고 약속한 최 대통령을 돕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남편이 왜 유신괴수인지, 국가를 위해 매일 죽음을 각오하고 살아가는 남편이 왜 화형식을 당해야 하는지 이 여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 여사는 남편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다니던 의과대학까지 그만두고 가난한 군인 남편을 따라 결혼을 했습니다.(<<당신은외롭지않다>>, 2) 그 남편이 악마라니 너무나 충격적이었습니다. 이 여사가 알고 있는 철저한 애국적 군인 전두환과 학생들이 알고 있는 유신괴수전두환 사이에는 해소 불가능한 모순이 있었습니다.

 

이 여사를 충격으로 몰아넣은 그 모순은 한국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모순입니다. 그 모순은 5.16 이후 한국사회를 긴장과 갈등 속으로 몰아넣은 학생 대 군인의 대결구도에서 유래하는 바로 그 모순이었습니다. 60, 70, 80년대 한국사회의 심각한 모순은 농민과 지주의 모순도 아니었고 노동자와 자본가의 모순도 아니었습니다. 군인과 학생의 모순이야말로 그 시대의 가장 심각하고 첨예한 모순이었습니다. 박정희는 집권기간 18년 내내 학생들의 반독재 민주화투쟁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노동자 농민의 저항 같은 것은 학생 지식인들의 선동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학생 지식인들이 자본가 편만 드는 독재자라 비판했던 박정희는 생래적으로 특권층을 싫어하고 사회적 약자 편에 서고 싶어 했던 소박하고 인정 많은 농촌빈민 출신이었습니다. 그의 정권은 대기업을 앞세워 경제개발에 매진했지만 노동자와 농민이 경제개발의 최종 수혜자가 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버린 적이 없었습니다. 새마을운동은 농민을 위한 잘살기 운동이었습니다. 박정희는 여공의 복지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의료보험도 경제관료의 반대를 무릅쓰고 박정희가 시작했습니다. 전두환 역시 박정희처럼 소탈한 성품의 농촌빈민 출신이었고 박정희처럼 노동자 농민과 사회적 약자를 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헌신했던 국가에는 노동자 농민과 사회적 약자가 매우 중요했습니다. 5공은 정의사회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경제 살리기에 매진하는 한편 각종 복지정책의 기초를 다졌습니다.(<<회고록>>2, 4)

 

노동자 농민과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가 중요하다는 생각은 박정희와 전두환뿐만 아니고 그 시대를 살았던 거의 모든 사람들이 공유했던 것입니다. 자본가나 대기업가들도 공유했습니다. 일상을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의 현실에서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완전히 둘로 나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책을 많이 읽은 학생 지식인들은 부자와 빈자, 강자와 약자를 날카롭게 둘로 나눈 다음, 빈자와 약자를 편들었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둘로 날카롭게 나눈 다음 사회주의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경향의 좌파 학생 지식인들이 외치는 민주주의는 실은 사회주의였습니다. 반공을 의식해서 사회주의를 민중주의란 말로 바꾸어 부르기도 했습니다. 거기에다 우리의 학생 지식인들은 식민지와 분단 탓에 민족주의를 유별나게 애호했습니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는 일제시대 이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좌파 학생 지식인들이 추구해온 양대 이데올로기였습니다. 그들에게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는 시대가 흐를수록 증오의 대상이 되어갔습니다. 그들은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60년대보다는 70년대에, 70년대보다는 80년대에 더 증오했습니다. 학생 지식인들에 맞서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해온 세력은 군부(두 군인 대통령과 그들을 지지하는 장교들)밖에 없었습니다. 자본주의의 최대수혜자인 기업인들은 대개 탈이념적 방관자세를 취했습니다. 군부도 민족주의적이었지만 군부의 민족주의는 좌파의 민족주의보다 훨씬 더 개방적이었습니다.

 

50년대 이래 지금까지 한국사회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조직력이 있는 두 집단은 군대와 학생이었습니다. 대체로 봐서 학생은 민족주의와 민중주의를 옹호하고, 군대는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했습니다. 학생 대 군인의 대결구조는 60, 70, 80년대 한국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좌우 대결구조였습니다.

 

이런 대결구조의 사회정치적 발생 원인에 대해서는 더 생각해봐야겠지만 저는 그 근본에는 현실보다 책을 더 중시하는 학생의 아이디얼리즘과 책보다 현실을 더 중시하는 군인의 리얼리즘 간의 대결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대결은 한국에만 있는 것은 아니고 인류의 문명사 어디서나 발견되는 문무(文武)의 대립구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단 한국의 경우는 문()을 숭상하고 무()를 멸시했던 조선조 이래 군인을 무시하고 압도적으로 학생 편이라는 점만 달랐습니다.

 

학생 대 군인, 좌파 대 우파의 대결구조 속에서 학생들의 좌파 이상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박정희는 1972년 시월유신을 감행했다는 것이 저의 판단입니다. 만약 시월유신을 하지 않고 민족주의와 민중주의에 집착하는 학생들의 좌파 이상주의에 굴복했더라면 중화학공업 중심의 산업구조는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전두환과 5공 또한 학생들의 좌파 이상주의를 극복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켜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전두환은 동의하기 어렵겠지만 80년 그의 등장과 5공의 성립은 한국현대사의 큰 흐름에서 보면 제2의 유신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학생 대 군인, 좌파 대 우파의 대결은 10.2612.12 이후 더욱 격렬해졌습니다. 이순자 여사가 연세대 교정에서 목격한 것은 학생 대 군인(시위진압경찰)의 대결이 폭발하는 현장이었습니다. 그러나 학생 대 군인의 격렬한 대결이 80년대에는 대학가 시위현장의 일상이 되고, 80년대 말 민주화 이후에는 좌파 학생 지식인들이 군부를 이김으로써 전두환은 학살자, 악마로 영구히 낙인찍히게 되리라는 것을 그때는 상상조차 못했을 것입니다.

 

10.26으로 인해 야기된 80년의 국가위기는 첫째 삼김 씨의 조급한 민주화 요구와 전국적으로 번진 학생소요 및 노사분규의 확산으로 인한 체제위기, 둘째 오일쇼크와 중화학공업 과잉투자로 인한 5.6% 마이너스 성장과 30%에 달하는 살인적 물가고 등의 경제위기, 셋째 북한의 남침 위협으로 인한 안보위기입니다.(<<회고록>>1,3장 및 <<회고록>>2, 1장 참조) 삼중의 위기 앞에서 전두환은 최규하 대통령과 이희성 계엄사령관을 보필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다하기 위해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야당 정치인들과 학생 지식인들은 최규하 정부의 즉각 퇴진을 요구했습니다. 민주화만 되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습니다. 반면 최규하 정부는 먼저 안정화를 한 다음 민주화를 하자고 그들을 설득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최규하 정부를 유신잔당이라 비난하고 민주화를 명분으로 협박을 일삼았습니다. 최 대통령은 민주화란 말 자체를 싫어했습니다. 민주화가 집권야욕의 구실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회고록>>1, p.278) 하지만 최규하 정부는 약체정부였습니다. 야당 정치인들과 학생 지식인들의 최대의 적은 유신괴수 전두환과 신군부였습니다. 그들은 안보문제나 경제문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민주화, 오로지 전두환 물러가라였습니다.

 

안보위기 경제위기 체제위기 세 가지 위기는 결국 체제위기 하나로 수렴됩니다. 안보위기는 바깥에서 체제를 위협하고 경제위기는 안에서 체제를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체제위기의 핵심 원인은 학생소요였습니다. 학생은 민족주의와 민중주의를 표방하면서 해방 이후 지금까지 주로 좌파세력의 전위부대 노릇을 해왔습니다. 80년에 들어와 학생시위가 전례 없이 조직화, 과격화, 전국화되어 국가적 위기상황이 나날이 심각해지다가 마침내 절정에 이른 것이 5월이었습니다. 전두환은 학생시위의 좌경화, 종북화를 심히 우려했습니다. 특히 학생시위를 뒤에서 조종하는 김대중의 언동을 염려했습니다.

 

김대중은 민주주의의 나무는 국민의 피를 먹고 자란다,” “혁명은 혁명을 낳고 우리는 모두가 혁명가다,” “10.26사태는 독재에 항거한 전 국민의 혁명이다,” “김재규도 충신이다라는 연설을 하고 다녔습니다. 그가 이끄는 국민연합의 선언문에서는 노동자, 청년, 학생들의 민주 민권운동은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의 새 시대를 탄생시키는 최후의 진통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고 했습니다.(<<회고록>>1, pp.292-293)

 

민족주의와 민중주의에 입각한 민중혁명 선동이었습니다. 여기에 수많은 학생 지식인들이 호응하고 있었고, 일반 국민들은 뭐가 뭔지 모르는 불안감 속에서 대개는 암묵적으로 학생 지식인들 편이었습니다. 아무도 군인 편은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의 국민은 민주화가 자유민주주의를 가리키는지, 아니면 인민민주주의를 가리키는지에 대해서조차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자유를 사랑하는 우파 중산층은 아직 형성되지 않았음을 말해줍니다. 80년 당시 국민소득은 1600달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아직 분배보다 성장을 위해 더 뛰어야 했을 때였고 개인의 자유를 말하기에는 시기상조였습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중요성을 자각하는 우파국민이 형성되려면 세월을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한 마디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심각한 위기였습니다. 전두환과 신군부가 물러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우파 중산층이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황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유일한 보루였던 전두환과 신군부가 물러나면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끝장이 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두환은 위기상황일수록 강력한 리더십과 돌파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최 대통령의 리더십을 강화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광주사태가 진정된 다음 내각과 군 사이의 협조체계를 강화하여 대통령이 강력한 지휘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제의했습니다. 최 대통령은 531일 전두환을 상임위원장으로 임명하고 국보위를 출범시켰습니다. 국보위가 가동되자 공직사회가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최 대통령은 강하지 못한 성품 탓인지 국정 장악력이 약했습니다.(<<회고록>>1, pp.546-552)

 

전두환은 최 대통령을 존경해서 깍듯이 모셨고, 최 대통령은 전두환을 신뢰하고 좋아했습니다. 최 대통령이 신군부와 함께 이원집정제를 획책한다는 항간의 소문은 양쪽의 친화감을 과장한 데서 생긴 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런데 1980731일 최 대통령은 전두환을 불러놓고 말했습니다. “전 사령관, 미안하지만 중책을 맡을 준비를 해주어야겠소.” 전두환이 현재의 자리도 과분한데 또 무슨 중책입니까라고 되묻자, 최 대통령은 자신은 국가위기 극복을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역부족이고 난세를 극복할 사람은 전 사령관 한 사람뿐이라 답했습니다.

 

최 대통령이 가장 염려한 것은 국가안보였습니다. 최 대통령은 이대로 혼란이 계속된다면 김일성에게 나라를 뺏길까 걱정이라면서 지금은 군을 잘 알고 군의 신뢰를 받는 사람이 대통령 직을 맡는 것이 매우 필요하므로 하늘의 뜻인 로 알고 받아들일 것을 당부했습니다.(<<회고록>>1, p.569-574) 최 대통령의 정확한 시국 판단과 전두환이라는 대안 제시는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위험했던 한 고비를 넘기는 묘수였습니다. 철저한 군인이 아니었다면 전두환은 최 대통령의 물망에 오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전두환은 뜻밖의 제의에 너무 놀라 극구 사양합니다. “오늘 하신 말씀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라는 말을 두 번이나 했습니다. 최 대통령이 휴가를 떠난 사이 전두환은 이희성 계엄사령관과 주영복 국방장관을 만나 상의했습니다. 두 사람은 전두환과 거리가 있는 관계였지만 그들의 견해 또한 최 대통령과 같았습니다. 이걸 보면 당시 자유민주주의 체제 핵심부는 위기극복과 체제보존을 위해 전두환이라는 군인이 필요하다는 데에 암묵적인 합의가 상당한 수준으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학생들이 전두환을 유신괴수라 부른 것은 근거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최 대통령은 안보위기감에서 대통령 직을 기꺼이 포기하고 전두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그를 밀어줌으로써 체제 핵심부의 암묵적 합의 내용을 구체화시켰습니다. 최 대통령에 대한 신군부의 압박설 같은 것은 근거가 불확실한 음모론이고 신군부에 대한 명예훼손이자 애국적 결단을 내린 최 대통령에 대한 명예훼손입니다.

 

전두환과 신군부에 힘을 실어준 최 대통령과는 달리 5.17 계엄 전국확대와 더불어 사임한 신현확 국무총리는 전두환과 신군부의 권력에 대한 접근을 강하게 견제한 바 있습니다. 신 국무총리는 최 대통령과 마찰을 빚으면서 12.12 당시 전두환의 정승화 연행에 반대했고, 또 전두환의 정보부장서리 겸임에도 반대했습니다.(김용삼, <신현확육성증언>, 펜앤마이크, 2019.1.10) 신 국무총리는 전두환과 노태우 등 젊은 군인들을 미덥지 않게 생각했을 수도 있고 당시 체제위기의 심각성을 그다지 심각하지 않게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신 국무총리(2007년 작고)가 수십 년 뒤 불법사기탄핵과 주사파 정권의 등장을 목격했다면 아마 80년 당시의 생각을 수정했을지도 모릅니다.

 

대통령이 된다는 꿈조차 꾼 적이 없는전두환은 그렇게 대통령 직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의 말을 다시 한 번 인용합니다. “그것은 분명히 운명처럼 찾아왔다. 내가 대통령이 된 것은 기회를 잡은 것이 아니라 운명을 받아들인 것이다.”(<<회고록>>1, p.586) 전두환과 신군부가 12.12 때부터 대권을 향해 음모를 꾸며왔다는 통설은 재고되어야 마땅합니다. 전두환과 그를 따르는 장교들은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국가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목숨 걸고 노력했겠지만 위기극복 노력과 대권 음모는 전혀 다릅니다.

 

오늘날 암암리에 우리 언론계와 학계 전반에 널리 퍼져 있는 그런 통설은 역사 속 모든 행위자를 속물로만 보는 저질 유물사관에 기초해 있습니다. 인간은 물론 거의 다 속물이지만 속물이 아닌 진정으로 헌신적인 행위자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런 통설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런 통설은 비과학적이고 신화적이라는 이유로 영웅사관을 배격하면서도 그런 통설을 주장하는 자신만큼은 속물이 아니라 착각하고, 마찬가지로 비과학적인 좌파의 민중사관에는 이유 없이 영합합니다. 전두환과 신군부를 음흉한 정치꾼들로 몰아가는 오만불손하고 저질스러운 통설은 사실적 근거가 없음은 물론이고 전두환 장군과 애국심 넘치는 엘리트 장교들에 대한 명예훼손입니다.

 

전두환에게 운명적으로 대통령 자리가 주어진 것은 학생 지식인들의 좌파적 이상주의의 횡행에 맞서 군부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유일한 보루 역할을 해야 했던 한국현대사의 운명에 따른 것이지, 결코 어느 한 개인이나 어느 한 집단의 의지에 따른 것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전두환은 <<회고록>>에서 대통령 직이 의지적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역사의 부름이고 운명이었음을 거듭 강조합니다. 이것은 역사 현장의 한 행위자의 정직한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운명의 실체를 우리는 다 알 수 없습니다. 누구를 선택하고 누구를 버리는지는 예측 불가능입니다. 한국현대사는 전두환을 불러서 국민을 위해 실컷 부려먹었고 그런 다음 헌신짝처럼 그를 버렸습니다. 전두환은 대통령이 된 다음 나는 젖먹던 힘까지 다 쏟아 부으며 머슴처럼 일했다고 했습니다.(<<회고록>>1, p.21) 그런 전두환은 한국현대사의 속죄양이 되어 수십 년 조리돌림을 당하다가 죽었습니다. 역사의 신이 왜 그랬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역사의 운명이 곧 역사의 신입니다. 인간의 역사도 결국은 알 수 없는 신비입니다. 우리 역사학자들은 역사가 신비라는 사실을 전혀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역사의 법칙을 다 규명할 수 있다는 촌스러운 자만심 때문입니다.

 

박정희를 빼고는 5.16을 말할 수는 없지만 5.16 또한 박정희 개인의 의지의 산물이라고만 볼 수는 없습니다. 박정희의 시월유신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한국현대사의 운명이 박정희에게 5.16과 시월유신을 요구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80년 전두환과 신군부의 등장, 그리고 제5공화국의 등장 또한 한국현대사의 운명이 요구한 것임을 전두환의 <<회고록>>은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한국현대사의 운명이란 우리가 알 수 없는 역사의 신()을 가리킬 수도 있지만 합리적으로 생각해보면 우파 중산층이 없는 가운데 생겨난 학생 대 군인의 대결구도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합리적 사유가 역사의 신비를 다 파헤칠 수 없음을 저는 잘 압니다. 역사의 신비 앞에서 항상 겸손해야 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너무 오만했습니다.

 

4. 개인의 자유와 그 실현의 조건: 국가안보와 경제발전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약 30년 동안 한국현대사를 주도해온 박정희와 전두환 두 군인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킨 자유의 수호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군부의 힘으로 대통령이 되었지만 군사독재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들을 자유의 억압자로 보는 시각은 한국현대사의 실상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국가안보를 지킴으로써 국민의 생명을 보장하고 다른 한편 경제발전에 성공함으로써 국민의 재산을 늘려주었습니다. 이로써 개인의 자유가 실현될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됐습니다. 그들은 자유의 수호자이기 이전에 자유의 창시자이기도 했습니다.

 

박정희와 전두환은 자유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자유의 소중함을 잊지 않았습니다. 박정희는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버린 적이 없지만 시월유신 이후엔 민족주의를 특히 강조했습니다. 미군철수 위협으로 인한 안보위기에 국론통일로 대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박정희의 민족주의는 자유를 부정하는 좌파 내지 북한의 닫힌 민족주의와는 성격이 전혀 달랐습니다. 전두환은 박정희보다 훨씬 더 강한 자유민주주의자로서 개방과 자율을 국정의 모토로 삼았습니다.(<<회고록>>2, 3) 개방과 자율이라는 정책기조가 향하는 곳은 자유입니다.

 

박정희와 전두환이 수호했던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그 자유는 이승만이 젊은 시절 한성감옥에서 <<독립정신>>(1904)을 쓸 때부터 강조해온,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고 따로 서는(獨立)” 개인의 자유 외에 다른 것일 수 없습니다. 개인의 자유는 자유민주주의의 핵심 그 자체입니다. 자유는 반드시 개인의 자유여야 합니다. 민족의 자유(민중해방), 민중의 자유(민중해방)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런 것은 자유(해방)을 빙자해서 개인의 자유를 부정하는 전체주의입니다.

 

이승만은 1948815일 정부수립기념사에서 민주주의의 본질을 개인의 자유에서 찾습니다. “민권과 개인 자유를 보호할 것입니다. 민주정체의 기본 요소는 개인의 근본적 자유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국민이나 정부는 항상 주의해서 개인의 언론과 집회와 종교와 사상 등의 자유를 극력 보호해야 될 것입니다.” 이어서 이승만은 왜적의 학대에서 벗어나려고 지난 40여 년 동안 개인 자유활동과 자유판단권을 위해 쉬지 않고 싸웠음을 상기시킵니다.(<<독립정신>>, 박기봉교정, p.449) 그에게 독립운동은 곧 개인의 자유를 찾는 운동이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이승만은 다른 모든 독립운동가와 달랐습니다.

 

하지만 이승만 역시 평생 민족의 독립을 위해 싸운 민족주의자이기도 했습니다. 민족주의와 개인의 자유는 이론적으로는 양립하기가 어렵습니다. 민족주의는 개인보다 민족을 앞세우는 순간 전체주의가 됩니다. 박정희와 전두환도 민족주의자이면서 자유민주주의 신봉자였기 때문에 같은 딜레마에 봉착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처럼 이론을 따지는 학자가 아닌, 독립운동가나 군인 혹은 현실 정치인의 입장에서 보면 별 문제가 안 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개인의 자유를 위해 민족을 개인보다 중시할 수도 있고, 때로는 개인의 자유를 위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수도 있습니다. 개인의 자유는 아무것도 없는 추상의 진공 속에서가 아니라 복잡한 현실의 구체적 공간 속에서만 향유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개인의 자유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8:31)고 할 때의 그 종교적 자유와는 정반대의 세속적 자유를 가리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종교적 자유는 개인이 자신의 세속적 자유를 다 포기하고 주님의 종이 될 때 얻어지는 자유입니다. 종교적 자유는 가장 소중한 자유이지만 여기서 제가 논의하고자 하는 자유는 아닙니다. 제가 논의하려는 세속적 자유는 남들의 구속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런 자유입니다. 그것은 남들과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 룰을 깨면서라도 자신의 탁월함을 과시하고 남들보다 더 많은 재산과 명예를 차지하고자 하는 인간의 세속적 욕망을 마음대로 충족시킬 수 있는 그런 자유를 가리킵니다.

 

개인의 자유는 공동체에 기반을 두고 형성된 재래의 도덕 기준에 따르면 사실상 패륜에 속합니다. 개인의 자유에 대한 근대인들의 존중의 근저에는 근대라는 깨어진 세계가 있습니다. 근대가 깨어진 세계라는 것은 경쟁 때문입니다. 경쟁은 저주입니다. 좌파가 근대를 싫어하고 자유를 싫어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좌파가 싫어하건 말건 인간은 누구나 남들의 구속을 받지 않는 자유로운 개인이 되고 싶어 합니다. 자유로운 개인이 창의와 혁신으로 세상을 발전시킵니다. 경쟁은 저주의 가면을 쓴 축복입니다.

 

하지만 개인의 자유는 그냥 주어지지 않습니다. 개인의 자유란 아무거나 제 마음대로 하는 개망나니의 자유도 아니고, 세상과 신체의 구속에서 풀려난 정신의 숭고한 자유도 아닌, 일정한 물질적 조건 하에서의 자유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개인의 자유를 향유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물질적 조건의 충족이 필수적입니다. 첫 번째 조건은 생명 보장입니다.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는 아무도 자유를 향유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조건은 일정 수준의 재산입니다. 누구라도 아무 재산이 없는 적빈 상태에서는 자유가 주어져도 향유하고픈 생각조차 나지 않습니다. 생명, 재산, 자유는 실제로는 어느 것이 먼저랄 것도 없이 불가분하게 상호 연결되어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 정치이론을 처음 만든 17세기 영국의 존 로크는 생명, 재산, 자유를 병렬시키면서 그것들을 인간의 권리(human right)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생명과 재산과 자유에 대한 인간의 권리는 자연적으로 주어져 있는 천부인권(natural right)이라 생각했습니다. 저는 인권이 자연적으로 주어져 있다는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는데 하여간 여기서 말하는 인간은 정치사회적 질서에 선행하는 자연상태의 개인(individium)을 뜻합니다. 중세 이전 공동체에 기반을 둔 재래의 도덕은 인간의 의무를 강조했습니다. 재래의 도덕에서 보면 권리주장은 오만한 것입니다. 인간의 권리 즉 인권이라는 개념은 지극히 근대적입니다. 개인의 자유가 인간의 권리라면 재래의 공동체적 질서는 와해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공동체적 도덕에 기초한 모든 좌파는 개인의 자유라든가 권리 개념을 증오합니다.

 

개인의 자유는 경쟁을 격화시키고 불평등을 심화시킬 수 있습니다. 경쟁과 불평등은 고통입니다. 하지만 개인의 자유를 인정한 모든 나라는 발전했습니다. 개인의 자유가 경쟁을 부르고 경쟁이 창의와 혁신을 불렀기 때문입니다. 반면 개인의 자유를 부정한 모든 나라는 하나같이 후퇴 내지 실패했습니다. 경쟁이 없으니 창의와 혁신이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 국가가 대표적인 실패 사례입니다. 이론적으로만 보면 개인의 자유는 공동체와 모순적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보면 오직 개인의 자유만이 공동체를 살려내는 힘이 됩니다. 창의와 혁신이 없는 공동체는 죽은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이승만, 박정희와 마찬가지로 전두환도 경쟁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경쟁이 없는 사회는 죽은 사회라고 썼습니다.(<<회고록>>2, p.135)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좌파가 죽어라 증오하는 개인의 자유 위에 서있습니다. 개인의 자유는 대한민국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입니다. 오늘날 한류문화의 세계적 확산을 가능케 했던 원천적 힘도 개인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건국 당시에는 개인의 자유가 무언지를 알고 그것을 긍정했던 사람은 아마도 이승만 한 사람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의 발전과정은 개인의 근본적 자유를 깨닫고 그것을 향유하는 중산층의 수를 폭발적으로 늘려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중산층 만들기는 전두환의 5공에 이르러 절정에 이릅니다. 스스로 중산층이라 여기는 국민의 비율이 83년엔 63%, 85년엔 70%, 86년엔 77%였습니다. 전두환은 이것을 전 국민의 중산층화라고 표현했습니다.(<<회고록>>2, 4) 적절한 표현입니다. “전 국민의 중산층화는 전 국민이 개인의 자유를 향유하는 전 국민의 자유화입니다. “전 국민의 중산층화안정 개방 자율이라는 5공의 정책기조의 산물이었습니다. 5공은 강력한 안정 정책으로 사회질서를 잡고 물가를 안정시키면서 한국사회를 세계와 미래로 열어놓는 개방과 자율 정책을 실시했습니다. 통행금지를 해제하고 해외여행의 자유화했습니다.(<<회고록>>1, p.23)

 

그 결과 경제는 다시 고도성장을 회복하면서 수출은 늘어나고 1986년 국제수지는 사상 처음 흑자를 기록했습니다. 전두환은 국민이 모두 신이 나서 뛰었던결과라고 하면서 1986년이 평생 가장 기뻤던 해라고 술회합니다. 그렇게 해서 개인의 자유를 향유하고 싶은 중산층이 형성되었고, 전두환과 5공이 만들어낸 그 중산층이 전두환과 5공에 반대하면서 80년대 말 민주화를 이루어냅니다. 민주화와 더불어 전두환은 80년 이후 한국현대사의 모든 죄를 혼자서 다 뒤집어쓰는 속죄양이 됩니다. 전두환이 뒤집어쓴 죄는 물론 민주화세력이 만들어낸 죄입니다. 역사의 신은 때로는 자비롭고 때로는 무자비해서 예측이 불가능합니다.

 

국민이 개인의 자유를 향유할 수 있게 하려면, 첫째 국민의 생명 보장을 위해 공산침략으로부터 국가를 지키는 튼튼한 안보가 필요하고, 둘째 국민이 빈곤으로부터의 벗어나 일정 수준 이상의 재산 소유가 필요합니다. 이승만에 이어 박정희가 했던 일도 국가안보와 경제발전이었고, 박정희에 이어 전두환이 했던 일도 국가안보와 경제발전이었습니다. 국가안보를 위해서는 때로는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습니다. 경제발전을 위해서도 때로는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습니다. 조건이 미성숙한 상황에서 개인의 자유부터 먼저 허용하면 국가안보도, 경제발전도 안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박정희가 유신시대에 한국적 민주주의를 내세운 것은 국가안보와 경제발전이라는 두 조건이 어느 정도 충족될 때까지 자유민주주의를 유보하자는 뜻이었습니다. 전두환 역시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전두환은 실질적 민주화와 절차적 민주화의 이분법으로 설명합니다. “국민생활의 기본수요인 의식주를 향상시키는 일이 곧 실질적 민주화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나는, 절차적 민주화가 일시적으로 제한을 받더라도 국민생활의 향상을 통한 실질적 민주화를 구현하는 일이 우선이라고 믿고 경제성장을 위해 매진했었다.”(<<회고록>>2, p.624)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일정 수준 이상의 재산을 가진 중산층의 정치체제입니다. 이 점을 박정희도, 전두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군부의 힘을 빌어 등장한 박정희와 전두환 두 군인 대통령은 학생들의 시위에 시달리면서도 결사의 애국심으로 국가안보와 경제발전에 매진하여 대성공을 거둠으로써 이승만이 염원했던 저 개인의 근본적 자유가 보호되고 향유될 수 있는 물질적 기초를 마련했습니다. 한국근현대사에서 이승만은 자유의 진정한 창시자였습니다. 그가 1904년에 쓴 <<독립정신>>은 개인의 자유에 관한 책입니다. 박정희와 전두환은 이승만을 계승한 자유의 수호자이고 자유의 확산자였습니다.

 

그들이 자유를 억압한 독재자라고 하는 것은 착각 내지는 좌파의 선전에 불과합니다. 박정희와 전두환이 이끌었던 정권을 군사정권이라 하는 것도 실상과 다릅니다. 장관, 국회의원 가운데 군인의 비율은 20% 미만이었습니다. 군인을 기용해도 전문성을 고려했습니다. 박정희와 전두환은 유능한 민간 전문가들을 기용했습니다. 박정희와 전두환은 군인 대통령이었지만 군부의 무분별한 정치 개입을 막고 국정을 가장 효율적으로 운영했습니다. 전두환은 나는 군부를 장악하고 통제했지 군부의 영향 아래 있지 않았다”(<<회고록>>3, p.305)고 말합니다. 그는 정치사회적으로 아무리 어려워도 군을 동원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5공이 군사정부라는 말에 반대합니다.

 

전두환 정권은 개방과 자율을 강조함으로써 박정희 정권과의 차별화를 시도했습니다. “박정희 없는 전두환도 없고” “전두환 없는 박정희도 없다고 하면서, 전두환은 박정희 대통령이 미완으로 남긴 조국근대화의 과업을 내가 완성시켰다라고 자부합니다.(<<회고록>>3, p.612) 하지만 전두환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박정희보다 더 강했고 박정희의 장기집권에 대해 비판적이었습니다. 전두환은 스스로 박정희의 비판적 계승자라는 말도 합니다. 그는 비판이 결코 배신이 아님을 강조합니다.(<<회고록>>3, p.613) 전두환은 박정희의 유지를 계승하되 더 발전시켰다고 봐야 합니다.

 

전두환은 장기집권이 역대 대통령들의 불행을 불렀다고 판단하여 평화적 정권교체를 자신의 신앙처럼 여겼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그는 정말로 7년 단임 약속을 지키고 권좌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는 6.29선언이 국민에 대한 항복 선언이라는 항간의 통설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국민과 싸우다 항복한 것이라면 6.29 선언 즉시 물러나야 했었지만 그 후 8개월 더 재임하며 민주화 조치들을 완수했다는 사실을 그는 강조합니다.(<<회고록>>1, p.24) 그러나 중요한 포인트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그가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았지만 실은 전두환과 신군부는 마음만 먹으면 무력으로 정권을 연장할 수도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유민주적 훈련을 받은 엘리트 장교들의 명예심과는 안 맞는 일이었습니다. 한국군부의 명예심이 아니었다면 이른바 민주화는 불가능했을지 모른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전두환처럼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군사독재자가 그렇게 툴툴 털고 물러나 결국 무방비상태로 수십 년 동안 조리돌림을 당하는 경우는 세계사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희한한 일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전두환은 애당초 군사독재자가 아니었다고 보는 편이 앞뒤가 맞는 얘기일 것 같습니다.

 

대통령 전두환과 관련해서 반드시 시정해야 할 항간의 소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전두환은 몸이 건강해서 운동은 잘하는데 머리가 나쁘고, 그래서 유능한 참모들을 발탁하여 그들에게 국정을 다 맡겼다는 항간의 소문입니다. 이 소문이 완전 거짓임은 대통령 시절 국정수행에 대해 쓴 <<회고록>>2권을 읽어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대통령 전두환은 국정 전반에 걸쳐 아주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탁월한 식견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 수준이 실로 경이로울 정도입니다. 그리고 전두환은 유능한 참모들에게 많은 권한을 위임하더라도 그들의 장단점을 미리 파악하고 최종 결정만큼은 늘 자신의 몫이었습니다.

 

그는 대통령의 권위를 항상 생각했습니다. 권위가 있어야 영이 서고 영이 서야 관료들이 국민을 위해 봉사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정책토론을 할 때 참모들로 하여금 자유롭게 발언하게 했고 경청을 한 다음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믿으면 참모들을 설득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럼에도 참모들이 설복이 되지 않을 경우에는 통치권 차원의 결단과 지시에 따르게 만들었습니다. 그의 이런 태도로 인해 5공은 권위주의적 정부니 독재니 하는 악평이 생겼지만 실은 그는 중요한 국가적 의제가 제기되면 여야 가리지 않고 대화를 나누었습니다.(<<회고록>>1, p.22)

 

군인 대통령 전두환은 직업 관료들이 갖지 못한 상상력을 발휘하기도 했습니다. 관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88올림픽을 유치한 것이라든가 일본으로부터 40억불의 안보협력자금을 얻어낸 것은 전적으로 그의 독창이었습니다. 그의 상상력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예는 6.29입니다. 그는 또한 어떤 자리에서나 친화력이 있고 언변이 뛰어나고 유머가 풍부했습니다. 그의 지적 능력은 이승만이나 박정희에 못지않다는 것이 <<회고록>>을 꼼꼼하게 읽어본 저의 결론입니다. 저는 제 결론이 맞는지 여부를 전두환과 함께 군대생활을 했던 몇몇 노장군님들로부터 확인한 바 있습니다.

 

대통령이 된 뒤 전두환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머슴처럼 일했다고 술회합니다. 심지어 잠자는 시간을 쪼개가며 국정을 살피느라 대통령의 자리를 즐겁다고 느껴 본적은 없었다고도 말합니다.(<<회고록>>1, pp.21-23) 나라 걱정에 밤잠을 자지 못해 오래 전에 끊은 담배를 다시 피워 골초라는 소문이 날 정도였습니다. 어떤 조직에서든 이렇게 죽어라 열심히 일하는 상관을 좋아하는 하급자들은 별로 없습니다. 전두환은 관료들에게는 무서운 대통령이었을지 모르지만 실은 그게 바로 국민 머슴이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습니다. 권위주의적 정부건 아니건 전두환 시대에 국민은 먹고살기 편했습니다. 정치보복을 일삼고 민주주의만 외치다가 IMF를 불러와 국가경제를 다 말아먹고 수많은 국민을 도탄에 빠뜨린 김영삼과는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5. 5공화국의 그늘: 민족해방 코미디와 민중해방 코미디

 

확실히 개인의 자유는 박정희 시대보다 전두환 시대에 더 증진되었습니다. 안보가 튼튼해지고 경제가 발전하고 개방과 자율이 자리를 잡아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는 개인의 자유를 부정하는 괴이한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전두환이 온갖 욕을 다 얻어먹으면서 머슴처럼열심히 일해 간신히 국가위기를 극복하고 바야흐로 대한민국을 중진국에 진입시키고 있던 바로 그 때, 대학가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는 운동권 좌파세력에 의해 완전히 점령되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1986년 사상 처음으로 국제수지 흑자를 기록했습니다. 전두환은 그 해가 평생 가장 기뻤던 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해에 서울대 운동권 중심부에서 주체사상이 다른 모든 사회주의 혁명노선을 누르고 서울대를 넘어 전국 각 대학으로 급속히 전파되고 있었습니다. 전두환의 5공이 북한과의 체제경쟁에서 압도적 국력 차이로 최종 승리를 거두었다고 자부하던 바로 그 해에 서울대 운동권 중심부에서는 북한의 대남적화전략이 여과 없이 수용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1986년 주사파의 등장에 대해 어떤 기자는 김일성의 대남적화전략이 전두환 대통령을 압도하는 순간이고, 한국전쟁 이후 김일성이 한국정부 지도자들을 상대로 한 체제경쟁에서 첫 승리를 거둔 것”(우태영, <<82들의혁명놀음>>, 2005, p.149)이라 평가했습니다. 무려 20년이 지난 뒤의 평가입니다. 대한민국 최고 대학에서 김일성이 은밀하게 거둔 첫 승리의 여파는 컸습니다. 그 후 한국현대사는 계속 좌경화되었고 마침내 주사파 출신들이 대한민국의 권력 핵심부를 송두리째 장악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전두환과 5공은 북한에 대해 겉으로만 승리하고 속으로는 패배했습니다.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다 승리해도 정신적으로 패배하면 실은 다 지는 것입니다.

 

이해하기 힘든 복잡한 사회주의 혁명노선이 각축을 벌이고 있던 서울대 운동권에서 주사파의 대부 서울법대 82학번 김영환이 혜성처럼 등장한 것은 1985년 말이었습니다. 그는 우선 미국을 몰아내고 전두환 괴뢰정부를 타도하는 민족해방 투쟁부터 하자, 그런 다음 사회주의 혁명을 해서 민중이 주인이 되는 사회주의 낙원을 소련 북한 등 주변 공산국가들의 도움으로 건설하자고 주장했습니다. 김영환의 이른바 민족해방(NL)노선은 민족해방민중해방으로 요약됩니다.

 

김영환의 간단명료한 노선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미국의 식민지이고 전두환은 미국의 앞잡이로서 군사파쇼 독재자입니다. 반면 북한은 자주적인 사회주의 낙원이고 김일성은 독립운동가이자 위대한 사회주의 혁명가입니다. 전두환이 미국의 앞잡이라면 5공은 미국의 괴뢰정부입니다. 모든 불행의 원인은 미국입니다. 미국은 우리의 철천지원수입니다. 민족해방과 민중해방의 관건은 반미(反美)입니다. 1986년부터 대학가에서는 반미반핵 양키 고홈과 같은 구호가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주사파의 간단명료한 노선은 골치 아픈 이론엔 흥미가 없는 학생들을 흡입하고 그들을 행동으로 내몰기에 아주 좋았습니다. 김영환은 간편화, 대중화, 행동화로 운동권을 혁신하고 스스로 비밀조직을 만들어 지하에서 운동권을 조종했습니다. 서울법대 82학번 동기인 원희룡의 표현에 따르면 김영환은 학생운동의 천왕봉 같은 존재였습니다.(우태영, p.234) 주사파는 서울대를 넘어 전국 모든 대학을 석권했습니다. 전대협(87)이니 한총련(93)이니 하는 조직은 전국의 모든 대학을 한데 묶어 혁명기지화한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대한민국 좌파세력의 중심에는 확고하게 주사파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따라서 좌파세력의 북한 추종은 불가피합니다. 그들의 사상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김영환이 대성공을 거둔 결정적 원인은 혁명이론을 간편화하면서 민족주의를 앞세운 데 있습니다.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입각한 여타의 사회주의 혁명이론은 모두 사회주의를 민족주의보다 앞세우는 반면 김영환의 민족해방노선은 민족주의를 민중주의(사회주의)보다 앞세웁니다. 광주학살의 주범이 전두환이고 그 배후에 미국이 있다는 항간의 소문에 따라 미국에 분노하고 있던 학생들에게는 주사파의 반미 민족주의는 불 탈 준비가 되어 있는 기름에 던지는 불씨와도 같았습니다. 김영환은 사회주의 혁명이론을 토착화하여 운동권 혁명노선의 대전환을 이루어냈습니다.

 

그러나 주사파의 민족해방 노선은 다 틀렸습니다. 우선 미국이 제국주의 국가인지도 의심스럽습니다. 설령 제국주의 국가라 하더라도 과거의 로마제국이나 대영제국과는 행태가 다릅니다. 특히 대한민국에 대해 미국은 빼앗은 것보다 준 것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미국은 6.25 때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켜주었고, 그 후 경제발전을 여러 모로 도왔습니다. 대한민국이 미국의 식민지라면 우리도 웃고 미국인도 웃을 것입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은 미국의 앞잡이가 아니었습니다. 국익을 위해 미국과 수도 없이 싸웠습니다. 미국은 수차 이승만과 박정희를 제거하려 했습니다. 전두환은 군인답게 미국이나 일본에 대해 항상 당당했습니다. 그는 레이건의 친구였고 나카소네의 친구였습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이 미국의 앞잡이라면 전 세계 사람들이 다 웃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사파의 민중해방 노선도 다 틀렸습니다. 80년대에는 머리 좋고 공부 잘하는 명문대 운동권 학생들이 앞을 다투어 구로공단으로 달려가 노동운동을 했습니다. 그들은 대학 못 다니고 공장 다니는 근로자들을 불쌍하게 여겨 그들을 억압과 착취에서 해방시키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근로자들을 불쌍하다고 여기는 것은 대학생들의 오만이었고, 근로자들이 공장에서 억압과 착취만 당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운동권 학생들은 근로자들을 민중으로 만들어 그들을 민중혁명의 대열에 끌어들이려 했지만 근로자들이 진실로 바라는 것은 민중도 해방도 혁명도 아니고 중산층이 되어 잘 사는 것이었습니다. 박정희와 전두환은 근로자들의 소박한 꿈을 이루어주었습니다.

 

대학생이라는 이유로 근로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웃기는 착각입니다. 근로자가 노동운동하던 운동권 학생보다 훨씬 더 잘 사는 경우도 너무 많습니다. 제가 사는 동네 수선가게 할머니는 옛날 봉제공 출신인데 자식들 다 대학 보내고 해외여행도 다니며 살다가 소일거리로 아직 일을 합니다. 근로자가 기업주로부터 억압과 착취를 당한다는 것도 웃기는 착각입니다. 남의 집 귀한 자식을 억압하고 착취할 기업주는 별로 많지 않습니다. 기업주도 생존해야 하니까 근로자 못지않게 나름의 고통이 있습니다. 기업주가 근로자보다 더 많이 버는 것을 착취라 한다면 누가 들어도 웃을 것입니다.

 

요컨대 부존자원이 없는 이 좁은 국토에 이 많은 인구가 먹고살려면 미국이나 일본에서 자본과 기술을 빌려와 공장을 짓고 상품을 만들어 전 세계에 값싸게 파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는데 그것을 제국주의와 식민지의 불평등 관계로 설명하고 반미반일 민족해방을 하자는 주사파 학생들의 발상도 웃기는 코미디이고, 늘 억압만 당하고 늘 착취만 당하는 계급으로서의 민중을 발명해서 근로자와 농민을 그들이 원할 리 없는 그 민중 범주에 집어넣고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준 유능한 기업인들을 매판자본가라 욕하면서 민중혁명을 하자는 주사파 학생들의 발상 또한 웃기는 코미디입니다.

 

80년대 최고의 코미디언은 이주일이 아니고 민족해방 코미디와 민중해방 코미디를 창시한 주사파의 대부 김영환입니다. 콩을 콩이라 하면 아무도 웃지 않지만 콩을 팥이라 하면 누군가 웃습니다. 뜻밖의 순간 상식에 어긋나는 몰상식이 등장해서 마치 상식처럼 행세할 때 코미디가 성립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이주일의 코미디와 김영환의 코미디는 꼭 같습니다. 하지만 이주일의 코미디는 웃고 마는데 김영환의 코미디는 사람 잡습니다. 김영환의 사람 잡는 코미디는 그 후 수십 년 동안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뿌리째 흔들면서 틈만 나면 국방과 경제를 방해했습니다.

 

80년대에 주사파 극좌세력을 향해 누군가가 다음과 같이 물었어야 했습니다. 민족주의가 민족을 구원할 수 있는가? 민중주의가 민중을 구원할 수 있는가? 민족주의가 지나치면 민족을 말아먹지 않을까? 민중주의가 지나치면 민중을 말아먹지 않을까? 3세계 후진국처럼 촌티 나게 민족이나 민중을 앞세우기보다는 미국과 유럽의 선진국처럼 개인과 자유를 앞세워야 하지 않을까? 개인과 개인의 경쟁을 통해 뛰어난 개인이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여 창의와 혁신을 주도하게 된다면 민족도 살고 민중도 살지 않을까? 개인주의와 자유주의가 진정으로 민족을 위하고 민중을 위하는 길이 아닐까?

 

유감스럽게도 당시엔 아무도 그런 물음을 묻지 않았습니다. 민족주의는 아직 확고부동한 국민적 신념이었습니다. 민중주의(사회주의)를 추구하던 공산국가들은 아직 몰락하기 전이었습니다. 게다가 전두환이 등장하던 1980년은 대한민국의 경제력이 북한을 앞서기 시작한지가 불과 5년 남짓밖에 되지 않던 때였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북한의 전체주의 독재체제만큼은 잘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북한이 사람 살 곳이 못 된다는 것은 시골 할머니들도 다 아는 국민 상식이었습니다. 김영환이 80년대엔 북한정보를 알기 어려웠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북한정보는 대한민국의 TV나 라디오만 켜면 흘러나왔습니다. 김영환은 그런 정보를 하나도 믿지 않았습니다. 주체사상에 빠져 북한을 사회주의 낙원이라 믿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김영환이 북한의 실상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은 19915월 북한잠수정을 타고 밀입북하여 김일성을 직접 만나고난 다음의 일입니다. 그제서야 자신이 시골 할머니들보다 못함을 알았겠지만 너무 늦었습니다. 그가 김일성과 만나기 이전에 동유럽 공산국가들이 무너졌고 중국에서는 천안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환상은 버려도 좋을 만큼 충분한 정보가 축적되어 있었지만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습니다.

 

김영환은 복잡한 과정을 거쳐 전향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아직도 사람중심이라는 허접한 수준의 근대 휴머니즘과 공동체주의는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중심이 사람을 말아먹고 공동체주의가 공동체를 말아먹는다는 것을 왜 모를까? 그와 함께 주사파에서 전향한 이른바 뉴 라이트는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에서 철저히 외면당했습니다. 배신자에 대한 응징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이념적 좌표가 얼마나 극좌적이고 친북적인지를 단적으로 말해줍니다.

 

80년대 전두환의 등장 이후 학생운동은 극단적으로 좌경화되어 반()대한민국적인 방향으로 나아감에 따라 군인 대 학생, 자유 대 반()자유, 우파 대 좌파의 모순이 극단적으로 첨예화되어 거의 폭발지경에 이르는 듯했습니다. 80년대 중반 이후가 되면 반미 구호는 시위의 핵심구호가 되었고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하는 시위현장은 시가전을 방불케 했습니다.

 

하지만 뜻밖에도 전두환과 5공은 1984년 학원자율화 조치를 취하는 등 극좌적 학생운동에 대해 상당히 관대했습니다. 실무자들의 과잉 대처로 고문치사 사건이 있었고 이에 대해서는 전두환도 <<회고록>>에서 사과를 하고 있습니다만 운동권을 대하는 5공의 태도는 기본적으로 버릇없는 동생을 대하는 형의 태도와 비슷했습니다. 이 때문에 학생 대 군인의 모순이 폭발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19882월에는 예상을 깨고 전두환과 5공이 순순히 자진 퇴장했습니다. 그것은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로 포장되었으나 실은 군인에 대한 학생의 승리, 자유에 대한 반자유의 승리, 우파에 대한 좌파의 승리였습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미래가 염려되는 순간이었지만 학생 운동권이 주사파에 의해 장악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국민이 극히 드물었습니다. 당시 박사과정에 다니던 저도 몰랐습니다. 언론은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전혀 보도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회고록>>를 통해 판단하건대 전두환도 그 사실을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는 평화적 정권이양과 그 이후의 시국 전개에 대해 낙관적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친구 노태우 대통령의 배신으로 백담사로 귀양을 가서 2년 넘게 제1차 조리돌림을 당합니다. 노태우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을 겁니다. 친구 대통령마저 어쩔 수 없게 만들었던 그 사정이 무엇일까요. 결국 신군부의 자진 퇴장 이후 누구도 어찌 할 수 없었던 한국현대사의 좌경화 추세입니다. 바로 이 추세가 전두환과 5공을 그 빛나는 성취에도 불구하고 오명의 수렁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일제시대 이래 학생 지식인들의 민족주의와 민중주의에 대한 선호는 시간이 갈수록 도를 높여갔습니다. 70년대 유신시절 대학생 시국선언문을 보면 자유란 말은 찾기가 어렵고 민족, 민주, 민중 같은 말들만 절규처럼 쏟아집니다. 80년대에 접어들어 전두환과 5공의 등장하자 민족주의와 민중주의는 더욱 극단화되어 운동권 주사파 학생들의 정치코미디로 발전했습니다. 그들의 민족혁명 코미디, 민중혁명 코미디와 같은 혁명놀음을 돌이켜 보면 저절로 전두환과 5공의 등장에 대해 그나마 감사한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두환과 5공마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전두환이 권좌에서 물러나자마자 노태우 정권 때부터 조금씩 좌 클릭을 시작하다가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거치면서 운동권 출신이 대거 정치권에 진출함으로써 대한민국은 빠른 속도로 좌경화했습니다. 박근혜 불법사기탄핵과 문재인 주사파 정권의 등장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지난 30여년을 돌이켜 보면 80년대 말 전두환과 신군부의 자진 퇴장이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켜왔던 마지막 보루의 자진 퇴장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파까지 포함해서 많은 지식인들은 전두환과 5공의 등장으로 민주화가 좌절되는 바람에 운동권 학생들이 과격하게 되어 마침내 주체사상까지 받아들였다고 해석합니다. “주사파는 전두환 키즈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 같은 역사 해석이 과연 옳을까요. 80년에 전두환 대신 김영삼이나 김대중이 대통령 직을 차지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김영삼과 김대중이 90년대에 대통령이 되어 어떻게 국정운영을 했는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민족주의와 민중주의는 필시 주사파 학생들의 사람 잡는 정치 코미디에 영합하여 국민 소득 2천 달러 수준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구제불능 상태에 빠뜨렸을 가능성이 큽니다.

 

80년대 우리나라 대학가의 좌경화는 그 뿌리가 매우 깊습니다.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가깝게는 일제시대 학생 지식인들에 이르지만, 더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조에 이르고, 또 더 거슬러 올라가면 역사와 문명 이전의 종족사회에 이르게 되고, 또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인간의 본성과 이어집니다. 좌파는 인간의 본성이 공동체적이라 봅니다. 성선설을 신봉하는 셈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타인과 얽혀 있고 홀로 고립되어 있지 않습니다. 자유주의자 하이예크는 사회주의를 인간의 본성이라 봅니다.

 

개인의 자유는 본성이 아니라 본성의 극복에서 성립합니다. 따라서 개인의 자유를 향유하는 데는 큰 힘이 듭니다. 개인의 자유에 바탕을 둔 근대문명은 인간의 본성 속에 주어지지 아니한 것을 힘든 사유와 노동을 통해 인위적으로 만들어내야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개인의 자유를 부정하는 좌파는 결국 근대문명에 대한 부정입니다. 인간의 공통체적 본성의 회복을 요구하는 마르크스주의는 근대문명뿐만 아니라 역사와 문명에 대한 전면 부정이라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증오에 찬 반달리즘은 마르크스주의의 본질입니다.

 

이렇게 보면 좌경화 문제는 정치 사회 경제의 차원을 넘어 종교 내지 철학의 차원과 연결됩니다. 주사파는 유물론자들인데도 천주교 기독교 불교 등의 성직자들이 주사파에 동조하는 괴이한 현상도 눈여겨 볼만한 대목입니다. 요즘 학자들은 민족과 민중이 근대의 발명품이라 하지만 민족과 민중에 열광하는 것을 보면 민족과 민중의 유래는 근대를 훨씬 더 넘어 인간의 공동체적 본성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듯합니다. 80년대 대학가의 좌경화 문제는 정치 사회 경제의 차원에서만 접근해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철학도인 제게는 인간의 본성에 관한 철학적 문제입니다. 철학적 문제라는 것은 정치 사회 경제의 차원의 노력으로는 해결이 안 된다는 것, 사실상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뜻일지 모릅니다.

 

따라서 전두환의 등장으로 민주화가 좌절되는 바람에 주사파가 등장했다는 식의 얘기는 아주 피상적입니다. 설령 그때 김영삼이나 김대중의 정부가 아니라 서유럽이나 미국 수준의 선진 민주정부가 들어섰다 해도 급격한 산업화로 각종 사회문제가 빈발하고 있던 국민소득 1600달러 수준 개발도상국의 머리 좋은 학생들이 가지고 있던 과격한 이상주의에는 아무 대책이 없었을 것입니다. 서울대 연고대 같은 명문대 교수들이 학생들의 과격한 이상주의에 제동을 걸었어야 했으나 우리 학계의 지적 역량은 거기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당시 교수들은 좌파 학생들의 눈치나 봐야 했습니다.

 

착하고 머리 좋고 성실한 학생이었던 김영환은 대학1학년 2학기 무렵 공산주의 혁명가의 길을 가기로 결심합니다.(우태영, p.67) 김영환이 출세의 길을 포기하고 혁명가가 되고자 했던 데에는, 그가 경험한 한국의 현실, 그의 선량한 마음, 그리고 그가 읽었던 책, 이 세 가지 요인이 크게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이 요인들 가운데 한국의 현실은 그만이 경험했던 게 아니고, 선량한 마음 또한 그만이 가진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한국의 아픈 현실을 아파하던 모범생 김영환의 선량한 마음이 공산주의에 눈을 뜨게 된 결정적 계기는 일 것입니다. 책이 그에게 인간의 공동체적 본성을 가르쳐주고,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를 가르쳐주고, 더 나아가 민족주의와 민중주의와 주체사상을 가르쳐주고, 혁명의 방법까지 가르쳐주었습니다.

 

책에 의해 만들어진 혁명가는 김영환만이 아닙니다. 실은 모든 혁명가가 책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혁명가의 무기는 사상이고 사상은 책에서 공급되기 때문입니다. 책 읽기가 주업인 동서고금 모든 먹물들(literati)은 책으로부터 숭고한 이상(관념=idea)을 배우고, 그 이상이 세상의 더러운 현실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혁명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들에게는 책과 책에서 배운 이상이 늘 현실보다 더 숭고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현실 앞에서 겸손을 모르고 오만방자해질 수 있습니다. 80년대 주사파 학생들은 무지몽매해서가 아니고 오만방자해서 민족주의와 민중주의를 짬뽕하고 그 위에 수령론을 얹어놓은, 세상의 그 어떤 파시즘보다 더 잔인한 전체주의 사상인 주체사상으로 달려갔습니다. 이상주의적 먹물이 현실 앞에서 오만방자해지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폭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명분이 뚜렷한 폭력은 제한을 모릅니다.

 

그 결과는 근대를 넘어 전근대로, 민족과 민중으로, 문명 이전으로, 종족본능으로의 밑도 끝도 없는 퇴행입니다. 하지만 퇴행을 아무리 거듭해도 공동체적 본성으로 돌아간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공동체적 본성은 원근법의 소실점처럼 실제로 가보면 자꾸자꾸 뒤로 후퇴하는 그런 것입니다. 공동체적 본성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인간은 너나 할 것 없이 천사가 아니고 이기적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공동체적 본성의 회복을 위하여 역사와 문명 이전으로 퇴행할 때 현실적 종착점은 기껏해야 북한입니다. 북한은 공산국가의 최대한계까지 가본 나라,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말살한 나라, 인류역사상 최악의 나라입니다. 오늘날 북한은 실로 역사와 문명 이전의 홉스적 자연상태에서 살고 있습니다. 인간은 배가 고프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만인 대 만인의 투쟁입니다. 북한의 경우 기아선상에서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을 막고 최소한의 질서나마 보장해주는 장치가 바로 수령과 강제수용소와 북핵입니다. 제가 보기에 수령과 강제수용소와 북핵은 정치군사적 문제이기 이전에 철학적 문제입니다.

 

전두환과 5공은 대한민국이 북한으로 퇴행하는 길을 차단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런 노력이 가능했던 것은 전두환이 철저한 군인이었고 신군부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군인의 현실주의가 학생의 이상주의를 막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한국현대사에서 전두환과 5공이 갖는 최대의 역사적 의미입니다. 하지만 전두환과 5공의 노력이 충분했는지 아닌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결국 대한민국이 장차 존속하느냐 여부에 따라 전두환과 5공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것입니다. 미래가 과거를 평가합니다. 역사에서는 동기보다 결과가 중요합니다. 전두환과 5공의 성취가 제아무리 위대해도 불과 몇 십 년 뒤에 나라가 망한다면 다 빛을 잃고 맙니다. 역사 속의 인간, 역사 속의 국가는 무엇보다도 살아남아 오래 오래 지속해야 합니다. 사실 불안합니다. 인간이 역사를 만들지만 역사의 주인은 인간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에 한 가닥 희망을 걸어볼 정도입니다.

 

한국사회에서 장래가 가장 촉망되는 서울대 연고대 등 명문대 학생들이 주사파가 되었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대책 없는 이상주의와 오만방자함도 문제인데다, 그들에게 큰 기대를 거는 그들의 부모형제와 그들의 친구들까지 생각해보면 한국사회의 최상층부가 좌경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거기에다 해방후 지금까지 예외 없이 이상주의와 선동기술로 무장한 대학의 데모꾼들이 졸업후 20년쯤 지나면 정치지도자로 부상했습니다.

 

과연 한국현대사는 전두환과 5공이 물러난 다음 좌경화의 큰 진통을 겪어야 했고 아직도 겪고 있습니다. 학생 대 군인, 반자유 대 자유, 이상 대 현실, 좌파 대 우파의 대결구도에서 저울추는 학생, 반자유, 이상, 좌파 쪽으로 기울어버렸습니다. 먹물들이 모든 것을 지배하던 조선조 5백년 이래 우리의 숙명일지 모릅니다.

 

그래도 전두환과 같은 철저한 군인이 있었다는 것은 한국현대사의 큰 축복이었습니다. 그는 대통령이 되기 전에도 군인이었고, 대통령일 때도 군인이었으며, 권좌에서 물러난 다음에도 군인이었습니다. 그의 군인다움이 가장 빛난 때는 권좌에서 물러나 조리돌림을 당할 때였습니다. <<회고록>>서문에 나오는 그의 다음 발언은 우리의 가슴을 웅장하게 만들면서 눈가를 적시게 합니다.

 

나의 불행이 5공화국의 성공에서 초래된 필연적 결과였다면 그것은 불행이 아니고 국가적으로나 나 개인으로나 축복이요 행운이라고 나는 믿는다. 나는 죽어서 나오지도 않았고 해외로 쫓겨 가지도 않았다. 나는 퇴임 후의 그 모든 매도와 능멸과 저주까지도 감당할 수 있었던 내 삶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지금 나는 원고지를 앞에 놓고 지난 생애를 돌아보면서, 나의 조국과 국민과 역사 앞에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된다.”(<<회고록>>1, p.25)

좌측부터 한진상, 김용삼, 최진덕, 김기수, 유승수, 이동환(사진 윤상구 작가)

 

맨 왼쪽 한진상(5.18특별법위반 피고발 청년) 사진 윤상구 작가
2022년 대한민국 현대사 세미나 기념사진(사진 윤상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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