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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덤 논단] 군인정신과 한국현대사(1)
[프리덤 논단] 군인정신과 한국현대사(1)
  • 프리덤뉴스
  • 승인 2023.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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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정신과 한국현대사 [1]

 

최 진 덕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철학)

 

1. 고대국가, 군인, 영웅

 

세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다. 전쟁 속에서 국가가 탄생하고 전쟁의 승패에 따라 국가의 흥망이 결정된다. 따라서 세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인 동시에 수많은 국가들의 흥망의 역사다. 전쟁과 국가가 이처럼 불가분의 관계이므로 동서를 막론하고 고대로 올라갈수록 국가는 전투조직이었다. 삼국시대의 신라와 고구려와 백제, 희랍과 로마를 위시한 서양의 고대국가들, 춘추전국시대 중국의 고대국가들이 모두 다 전투조직이었다. 고대국가의 공통된 특성은 오늘날까지 국가의 본질로 남아있다.

근대 이후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국민국가 또한 민주국가든 독재국가든 관계없이 다 본질적으로 전투조직이다고대국가에서는 군대가 따로 있지 않았다. 모든 국민이 군인이고 국가의 수장은 당연히 최고 군사령관이었다. 뒷날에 가서야, 남들보다 더 잘 살고 싶은 인간의 욕망으로 인해, 직업의 분화 혹은 계층의 분화가 이루어졌다. 국방을 담당하는 군인 외에 생산을 담당하는 농민과 수공업자, 교역을 담당하는 상인, 정신을 담당하는 종교인이 생겨났다. 군인도, 상인도, 종교인도 모두 남들보다 더 잘 살고 싶은 인간의 욕망의 산물이다.

유사 이래 전쟁은 끊인 적이 없었고 국가의 흥망은 늘 군인의 손에 달려 있었기 때문에 고대국가에서는 직업이 다른 여러 계층의 사람들 가운데 유독 군인만이 귀족이 되어 정치권력까지 장악했다. 군인은 나가면 장군이 되고 들어오면 재상이 되었다(出將入相).” 로마의 황제는 대부분 군인이었다. 스토아 철학자로 유명한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전쟁터에서 살다시피 했다. 고대사회는 군인 중심의 사회였다. 그래서 전쟁에 나가서 용감하게 목숨 걸고 싸워 큰 공을 세우고 불멸의 이름을 역사에 길이 남기는 것은 남자들의 로망이었다. 당연히 용기는 고대사회 최고의 미덕이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위대한 행동으로 명예를 추구하는 군인을 고대 희랍인들은 영웅이라 불렀다. 자신을 과시하고자 하는 영웅들이 명예를 추구하는 것은, 신적인 차원의 영원(eternity)과는 다른, “죽어야 하는 자들 사이에서의 불멸의 영광(immortal glory among mortals)”을 추구하는 것이었지만 이익이나 감각적 만족를 추구하는 것보다 우월하다고 희랍의 철학자들은 생각했다불멸의 명예를 추구했던 아킬레스와 같은 영웅들의 이름은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인구에 회자(膾炙)되고 있다.

영웅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남기고, 다른 시민들은 그들의 이름을 기억해주고, 무엇보다 용기를 최고의 미덕으로 숭상하는 상무적인 군사문화의 전통은 유사 이래 늘 전쟁의 위협 속에서 생존과 번영을 모색해 온 모든 국가들에 공통된 것이었다. 영웅은 죽음을 댓가로 지불하고 불멸의 명예를 얻고자 하지만 영웅이라 해서 반드시 불멸의 명예를 얻는 것은 아니다. 위대한 영웅인데도 명예는 커녕 오명을 뒤집어쓰고 비참한 삶을 살다가 비참하게 죽어가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의 장난이 시작되고 비극(tragedy)이 시작된다. 현실의 영웅은 운명의 장난에 놀아나는 비극적 영웅이다. 세상 사람들 또한 그 어이없는 운명의 장난에 같이 놀아나 영웅의 얼굴에 침을 뱉는다.

 

2. 중국화, 유교화, 문민화

 

세계사에는 상무적인 군사문화의 전통이 단절된 예외적인 지역이 하나 있다. 그곳은 유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한나라 이후의 중국이다. 공자의 유교는 군주에 대한 충성보다 부모에 대한 효도를 더 중시하고, 무예(武藝)보다 문예(文藝)를 더 중시하고, 국가의 법률보다 가족질서에 기반한 예의를 더 중시했다. 이로써 공자의 유교는 군인 즉 무사(武士) 중심의 고대사회를 문인(文士) 지식인들의 사회로 바꾸어버렸다. 유교의 국교화와 더불어 중국문화는 고대사회의 웅혼(雄渾)한 기상을 상실하고 유약(柔弱)해졌다. 삼국사기는 우리의 삼국시대가 상무적 군사문화의 전통이 살아있어 웅혼한 기상이 넘치던 시대인 동시에 인도에서 생겨나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거쳐 들어온 불교의 시대였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삼국통일 이후 중국화 내지 유교화가 진행됨으로써 한국 또한 서서히 웅혼한 기상을 상실해 갔다. 8세기 원성왕 때 독서삼품과설치는 하나의 분수령이었다. 인재 선발의 기준이 그때부터 무예에서 한문이나 유교 교양과 같은 문예로 바뀌었다. 중국화, 유교화, 문민화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고려에 오면 문신귀족들이 무신을 경멸하다가 무신란이 일어나는 사태까지 발생했지만 군사문화의 전통은 아직 살아있었기에 몽골의 침략에 끈질기게 저항할 수 있었다. 조선을 세운 이성계도 뛰어난 군인이었다. 하지만 이성계는 불교를 버리고 유교와 주자학을 선택한 지식인들에 의해 끌려다녔다. 오백 년 내내 무예를 도외시하고 문예만 익힌 지식인들이 정치권력을 장악했던 조선은 중국화, 유교화, 문민화의 절정이었다. 조선은 주자학을 지독하게숭상하는 동아시아 역사상 가장 철저한 유교국가로서 중국보다 더 중국적인 나라였고 중국 주변 여러 나라들 가운데 가장 자주성이 없는 약체 국가였다.

주자학의 가르침을 절대의 진리로 받들었던 조선의 주자학자들은 전쟁과 군비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순진한 도덕적 평화주의자들로서 국가가 전투조직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망각했다. 그들에게는 전쟁 속에서 생존을 모색하는 현실의 국가보다는 가족과 마을 및 전쟁을 알지 못하는 요순의 나라와 같은 이상의 국가가 우선이었다. 그러니 군인을 존중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유교국가에서 군역은 천역(賤役)이고 군인은 천민이었다.

군인만 무시된 것은 아니다. 상인과 종교인도 함께 무시되었다. 군인을 무시하면 안보가 불안해지고 상인을 무시하면 경제가 주저앉는다. 종교인을 무시하면 정신이 메말라간다. 주자학은 효제와 삼강오륜이라는 유교윤리와 무위자연(無爲自然)에 대한 동경만을 남겨놓았다. 어느 것도 안보와 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정신에 도움이 되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유교윤리를 앞세우면 남의 간섭을 받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질식되고 무위자연을 동경하면 하면 된다는 의지가 말살된다.

그 후과는 참담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조선의 백성은 어육(魚肉)이 되었다. 두 차례의 전란은 주자학이 국가경영에 부적합함을 뼈아프게 증명해 주었다. 하지만 유교와 주자학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지식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조선은 전후에도 전혀 바뀌지 않고 후기로 갈수록 더 완고한 주자학의 나라가 되었다. 군인과 상인과 종교인은 더 심하게 무시되었다. 예컨대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구한 이순신까지도 주자학자들은 그다지 높이지 않았다. 이순신과 같은 군사적 영웅은 주자학자들의 입맛에 맞지 않았다.

조선후기의 역사는 주자학에 중독된 지식인들의 머릿속 관념 즉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위력적인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계몽군주로 잘못 알려진 정조는 골수 주자학자였다. 정조대는 주자학의 나라 조선의 절정기라 할 수 있다. 조선의 지식인들이 근대라고 하는 새로운 관념 혹은 새로운 현실에 눈뜨기 시작한 것은 이미 17세기부터 근대화의 길을 걸어오다가 19세기 말 서세동점의 물결에 편승하여 조선을 침략하기 시작한 일본 덕분이었다. 일본은 우리 고대국가와는 비슷하지만 조선과는 정반대의 나라였다. 역사의 신은 그런 일본에게 악역을 맡겨 잠자던 한국인을 깨웠는지도 모른다.

 

3. 인욕의 긍정, 상인, 종교인

 

일본을 구경하고 충격을 받은 김옥균은 근대화 혁명을 꿈꾸기 시작했지만 그에게는 근대화의 이념을 현실화할 수 있는 힘이 없었다. 1884년 갑신정변의 실패는 힘의 부재가 원인이었다. 1910년 조선이 전쟁 한 번 치르지 않고 서류에 도장 찍어 나라를 일본에 넘긴 것도 힘이 없기 때문이었다. 군인, 상인, 종교인을 모두 무시했으니 군사력, 경제력, 정신력 모두 엉망이었다유길준이 서유견문에서 문명개화(文明開化)”라고 불렀던 근대화는 남들보다 더 잘 살고 싶은 인간의 욕망, 자유와 평화와 번영을 향한 그 욕망의 충족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런 욕망을 충족시키려면 힘이 필요하다. 근대화는 힘의 논리에 의해 인도된다. 주자학자의 눈으로 보면 근대화는 당연히 왕도(王道)가 아니라 패도(霸道). 하지만 과연 아무 힘도 없이 인간이 살 수 있는지 주자학자들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도덕윤리도, 사회정의도 힘이 있고 난 다음의 일이다. 힘이 없다면 국가는 개인보다 더 존립하기가 어렵다. 국가는 힘 그 자체다. 근대화를 위해서는 군사력, 경제력, 정신력이 필요하고, 그런 힘을 만들어내는 군인, 상인, 종교인이 필요하다.

개화파 지식인들은 공통적으로 상인의 중요성을 말했다. 이승만은 한성감옥에서 쓴 독립정신에서 무엇보다 먼저 통상의 중요성을 말했다. 통상이야말로 근대화의 동력이고 상인이 근대화의 주역임을 그는 잘 알았다. 또한 개화파 지식인들은 유교를 대신할 새로운 종교를 모색하기도 했다. 윤치호와 이승만은 양반 출신임에도 유교를 버리고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유교국가 조선이 무너져 가면서 불교가 부활하고 기독교가 들어왔을 뿐만 아니라 동학과 같은 새로운 종교들이 탄생했다. 한국의 20세기는 종교의 시대였다.

그런가 하면 개화파 지식인들은 중국화, 유교화, 문민화되기 이전 고대로 돌아가 무교라든가 불교가 살아 숨 쉬던 삼국시대의 웅혼한 기상을 강조하고 김유신이나 강감찬 혹은 이순신과 같은 군사 영웅들을 재조명하기도 했다. 군사 영웅들은 외침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해온 조선의 도학군자(道學君子)”들과는 정반대였기에 상상만 해도 답답함을 풀어주는 시원함이 있었다. 고대의 군사 영웅들은 탈중국, 탈유교, 탈문민의 상징이었다. 따라서 군사 영웅들에 대한 뜨거운 관심은 통일신라 이후 시작되어 조선에 와서 정점에 이른 중국화, 유교화, 문민화라는 한국사의 흐름이 역전되기 시작했다는 가장 확실한 징표로 읽을 수 있다.

이처럼 조선조 오백 년 동안 도학군자들이 일방적으로 무시해온 군인, 상인, 종교인을 다시 호출하게 된 배경에는 남들보다 더 잘살고 싶은 인간의 세속적 욕망을 긍정하게 만들어 준 놀라운 사상의 변화가 있었다. 조선의 도학군자들은 인간의 세속적 욕망을 천리(天理)가 아니라 인욕(人欲)이라는 이유로 억압했다. 인간의 세속적 욕망이 인욕이라는 것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역사와 문명을 발전시키는 원동력 또한 인욕이었다. 인욕을 억압하고 상인과 종교인과 군인을 무시하면 역사와 문명은 끝이 나고 역사 이전, 문명 이전의 원시상태로 돌아간다. 실제로 천리자연의 질서을 뜻한다. 조선의 주자학자들은 유교적 가족윤리까지 넘어 무위자연을 동경했다. 인욕의 산물인 역사와 문명이라든가 근대화는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근대화의 주역은 상인이라고 했다. 상인은 군자가 아니라 소인이다. 근대는 소인들의 시대다. 시장에서 이익을 추구하는 상인은 철저하게 인간의 세속적 욕망의 현실 즉 세속(世俗)을 떠나지 않는다. 반면 종교인은 세속을 넘어 인욕이 사라지고 없는 초월적 정신의 세계를 추구한다. 주자학의 눈으로 보면 허구의 신을 말하면서 백성을 현혹하는 종교인은 상인보다 더 나쁜 사기꾼이다. 상인과 종교인은 정반대의 지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근대화에는 종교인도 필요하다. 인간에게는 물질적 욕망 외에도 정신적 욕망이 있다. 정신적 욕망은 물질적 욕망보다 더 근본적이다. 정신적 욕망을 도외시하면 근대화는 타락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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