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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덕 철학 칼럼2] 자유와 개인, 그리고 노장의 무위
[최진덕 철학 칼럼2] 자유와 개인, 그리고 노장의 무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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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4.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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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자생적 질서, 그리고 노장 [2]

자유와 개인, 그리고 노장의 무위



최진덕(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하이에크 철학의 중심에는 자유가 있다. 그는 자유를 그 자체로서 가치있는 어떤 것인 듯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체의 목적론적 사유에 반대하고 합리주의에도 반대하는 하이에크의 진화론적 사유에서는 그 자체로서 가치있는 어떤 것을 인정하기 어렵다. 하이에크의 말은 개인의 자유를 부정하는 사회주의에 맞서 자유주의를 옹호하기 위한 수사학적 웅변일 것이다. 하이에크 철학에서 자유는 변화의 세계 혹은 욕망의 세계 저 너머에 있는 플라톤의 이데아와 같은 것이 아니다.

자유는 전적으로 사람과 타인과의 관계를 뜻하는 것으로, 이때 자유에 대한 유일한 침해는 타인에 의한 강제뿐이라고 하이에크는 말한다. 그렇다면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떠나면 자유는 무의미하다. 하이에크의 자유는 철저하게 인간 세상 안에서의 자유이다. 인간 세상은 인간의 욕망이 없으면 성립하지 않는다. 인간 세상은 수많은 사람들의 욕망이 얽히고설켜 굴러간다. 자유는 욕망의 세계 안에서만 있을 수 있는 것이라면 불변의 최고 가치라고 부를 만큼 고상한 어떤 것일 수는 없다.

하이에크는 인간 세상을 떠나야만 성립할 수 있는 내면의 정신적 자유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신앙인의 자유라든가 우주의 진리를 깨닫는 데서 오는 해탈의 자유는 하이에크의 자유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이 점은 하이에크 철학의 이해를 위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신앙인이나 깨달았다고 자부하는 자들이 자신들이 누리는 정신적 자유를 인간 세상에다 확산시키려 들면 자유는 질식당하고 전체주의적 신정체제가 등장할 수 있다. 그렇다 해도 인간은 정신적 자유 혹은 정신적 자유에 대한 동경이 없이 살 수 있을까. 정신적 자유는 세속적 자유와 다름에도 불구하고 세속적 자유의 숭고한 모델도 되고 세속적 자유를 지켜주는 울타리도 될 수 있지 않을까.

하이에크는 노예의 예속상태와 대비되는 주인의 자유가 자유의 본래적 의미를 잘 보여준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자유의 본래적 의미는 타인의 노예가 아닌 상태를 뜻한다. 하이에크는 자유헌정론의 첫 챕터 첫 문장에서 자유를 타인에 의한 강제가 가능한 한 최소화되는 인간 조건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타인의 강제로부터 자유롭고 싶어도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어느 누구의 노예가 아닌 자유로운 자, 자기 자신의 주인인 자를 개인이라고 한다면 인간은 제아무리 개인이고 싶어도 철저하게 개인일 수는 없다.

인간이란 타인들에 의해 태어나고 타인들에 의해 길러질 뿐만 아니라 타인들의 도움을 받아 살아간다.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준 타인들(부모)라든가 자신을 도와준 타인들(친구들) 앞에서 함부로 자유를 말할 수 없다. 때로는 그들의 강제를 받아들여야 한다. 부모나 친구들 외에 적대적인 수많은 타인들과도 만나야 한다. 그들의 눈빛 자체가 강제일 수도 있다. “가능한 한 최소화라는 하이에크의 단서는 타인들의 강제가 불가피한 인간 세상의 현실을 고려한 유보조건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강제의 최소화가 목적은 아니다. 강제를 최소화하다 보면 타인들과 멀어져 사회적 고립을 자초할 수 있다. 사회적 고립은 자유가 아니고, 개인은 원자적 개인이 아니다. 사회적으로 고립된 원자적 개인에게는 행동이란 있을 수 없고 오직 무위자연만 있다. 하이에크 철학은 인간관계가 중첩되는 사회를 떠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늘 사회로 향해 있고 사회 안에서 적극적으로 행동하고자 한다. 하이에크는 말한다. “자유란 언제나 각 개인이 자신의 결정과 계획에 따라 행동할 수 있음을 뜻한다.” 개인이 인간관계 속에서 타인들의 강제로부터 벗어나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상태가 자유다. 따라서 자유는 늘 금지된 것 외에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소극적 자유라야 한다. 자유의 내용을 채우는 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결정과 계획에 맡겨져야 한다. 자유는 정치적 자유 혹은 능력이라는 식으로 자유의 내용을 다른 누군가가 정해주는 적극적 자유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위험이 있다.

자유인이란 금지된 것 외에는 무엇이든 자신의 결정과 계획에 따라 행동하는 독자적인 행동인이다. 독자적 행동인이 곧 개인이다. 여기서 개인과 행동, 두 단어가 중요하다. 하이에크에게는 자유인과 개인, 자유주의와 개인주의는 같은 뜻이다. 그가 말하는 개인은 인간관계로부터 고립된 원자적 개인이 아니다. 개인주의는 흔히 오해하듯 타인보다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자기중심주의나 이기주의가 아니라고 그는 강조한다. 그의 개인주의는 사람마다 각기 가치관이 다르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사람들의 가치관은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는데 하이에크는 다르다는 것이 논쟁의 여지가 없는 기본적 사실이라고 단정한다. 이 단정에 의거해서 개인이란 다른 사람의 가치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가치에 따라 행동할 수 있어야 하고, “자신의 가치를 최고선 혹은 목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개인주의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그의 개인주의에 국가가 제시하는 공동의 가치나 목적보다도 각 개인의 가치나 목적이 훨씬 더 중요하다. 국가는 공동의 가치나 목적을 공동선 혹은 사회정의와 같은 이름으로 개인에게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 국가는 공동의 규칙만 제시하는 데서 그쳐야 한다. 심지어 하이에크는 국가도 여러 사람들 중의 한 사람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개인은 오로지 자신의 가치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행동하는 자이다. 개인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자신의 지식을 마음대로 이용하는 것이 바로 자유라고 하이에크는 자주 말한다.

개인과 자유에 대한 하이에크의 이상의 설명들은 어딘가 만족스럽지 않다. 삼라만상이 다 그렇듯이 사람들 역시 서로 얽히고설켜 살아간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타인과 구별되는 개인과 그의 자유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 더 설명이 필요하다. 하지만 하이에크는 개인과 자유의 존재를 당연시하는 듯하다. 개인주의가 자기중심주의 혹은 이기주의가 아니라는 그의 주장도 근거가 빈약하다. 개인이 자신의 목적과 다르다는 이유로 국가가 제시하는 공동의 목적을 무시해도 되는 건지, 또 현실적으로 무시할 수나 있는 건지 의문이다. 철학적으로 보면 하이에크의 논의는 이런 의문들을 사전에 막을 수 있을 만큼 치밀하지 않다. 논의를 서둔다는 느낌은 아마도 20세기 사회주의와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이 너무나 시급했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개인과 자유에 대한 하이에크의 논의의 본령은 철학적 해명이 아니라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자들의 추측의 역사(conjectural history)”와 같은 식의 역사적 해명에 있다. 하이에크 철학의 기초라 할 수 있는 문화적 진화론은 합리적 논증 대신 경험적 추측에 의거하는 역사적 해명 방식이라 볼 수 있다.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이 자연의 역사를 다룬다면 하이에크의 문화적 진화론은 인간의 역사를 다룬다. 하이에크에 따르면 진화론의 원조는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이 아니고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자들의 문화적 진화론이다. 이성이 도덕과 질서와 문명을 낳았다는 합리적 사유에 반대하고 거꾸로 이성 자체가 도덕과 질서와 문명의 산물이라는 발상의 전환이 문화적 진화론의 출발점이므로 추측의 역사의 일종인 문화적 진화론에서는 합리적 논증에 기초한 철학적 해명을 기대해선 안 된다.

하이에크에 따르면 신 혹은 이성이 아니라 자유로운 개인이 문명의 기초다. 개별 인간과 그의 가치관을 존중하고 각자 자신의 뜻에 따라 자신의 삶을 살기를 요구하는 개인주의는 희랍과 로마 이래 서양문명의 오랜 전통이었다. 하이에크는 개인주의를 싫어했던 전체주의자 꽁트의 말을 빌어 종족에 대한 개인의 반란이 서양문명의 본질이란 지적까지 한다. 르네상스 이후 그 개인주의가 시장경제의 발달, 과학기술과 산업의 발달을 가져와 모든 계층에 걸쳐 사람들의 다양한 욕망을 빠르게 충족시켰다.

하이에크에 따르면 개인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수백 만년에 걸친 수렵채취시대 동안 인간은 생존을 위해 소규모 공동체 속에 살았다. 그 시대에는 개인이 있다 해도 인정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수백 만년에 걸친 공동체적 습성으로 인해 사회주의는 지금도 인기를 끌고 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반개인주의적이고 사회주의적이다. 개인은 한참 뒤에 교역의 발달과 함께 등장했다. 개인주의는 상업발달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이에크에 따르면 교역은 농업보다도 오래되었고 국가보다도 오래되었다. 역사 이전 구석기 시대에도 교역이 있었다. 그렇다면 그때 이미 희미하게나마 개인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개인의 소유를 인정하지 않으면 교역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개인과 교역 가운데 어느 것이 먼저인지는 애매하다. 개인이 교역의 발전을 촉진하기도 하고, 교역이 개인의 발전을 촉진하기도 한다. 개인과 교역의 동시적 상호작용 속에서 소규모 공동체의 중요성이 줄어드는 대신, 교역중심지에서는 인구가 증가하고, 노동분업이 일어나고, 새로운 질서가 생겨남으로써 문명의 발전이 시작되었다. 문명의 기초가 되는 새로운 질서를 하이에크는 자생적 질서”(spontaneous order) 혹은 확장된 질서”(extended order)라 부른다. 개인들 간의 교역활동으로부터 저절로 발생한 자생적 질서에 대해서는 다음 절에서 다룬다.

개인 즉 자유인의 독자적 행동은 시장에서의 교역활동을 가리킨다. 교역활동에는 상품의 교환 외에도 사람들 간의 교류, 풍습과 문화의 교류, 지식의 교환 등도 포함된다. 교역의 활성화를 촉진한 것은 경쟁이다. 경쟁은 약육강식의 투쟁이 아니다. 경쟁은 각자 자신의 잠재력을 개발하고 더 많은 정보와 지식을 발견하여 자원의 효율적 활용의 길을 찾는 협동의 과정이다. 법이라는 금지규칙의 지배 하에서 경쟁이 격화될수록 오히려 협력은 더 강화되고 문명은 더욱 발전한다. 그렇다면 자유야말로 인간 세상에서의 교역활동과 문명발전을 촉진하는 개인의 독자적 행동의 조건이라 할 수 있다.

하이에크의 자유 개념은 사람들간의 관계로 구성되는 인간 세상을 떠나지 않고 그 안에서 금지된 것 외에 무엇이건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개인의 자유를 가리킨다. 유물론과 진화론에 바탕을 둔 하이에크 철학은 인간의 욕망이 들끓는 세상 너머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의 철학은 그런 점에서 마르크스주의와 마찬가지로 근대 휴머니즘의 일종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하이에크 철학은 대우주의 눈으로 인간 세상을 조망하면서 문명을 건설하는 활동보다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위로 돌아가기를 촉구하는 노장 사상과는 정반대라 할 수 있다. 장자는 인간을 천지 사이 만물 가운데 하나의 사물에 불과하다고 본다. 이것을 생각해보면 하이에크 철학이 얼마나 인간중심적인지 알 수 있다.

노자는 유위보다는 무위를 더 중시한다. 그리하여 문명보다는 자연을, 욕망보다는 무욕을, 지식보다는 무지를, 통치는 보다는 방임을, 질서보다는 무질서를, 도덕보다는 무도덕을, 전진보다는 후퇴를 더 중시한다. 유위보다 무위를 더 중시하는 노자의 이런 사상은 독자적 행동인으로서의 개인 혹은 자유인을 중시할 수 없다. 개인 혹은 자유인은 무위, 자연, 무욕, 무지, 방임, 무질서, 무도덕, 후퇴를 버리고 유위, 문명, 욕망, 지식, 질서, 도덕, 전진을 선택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노자가 보기에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지식을 사용하는하이에크의 개인 혹은 자유인은 도()를 모르는 인간이다.

개인 혹은 자유인은 장자의 소요유(逍遙遊)와는 거리가 더 멀어 보인다. 소요유는 천지만물과 한 몸이 되어 시작도 끝도 없이 흘러가는 한없는 유희를 가리킨다. 그런데 하이에크 철학에는 생존과 번영을 위한 개인의 분투노력만 있고 무목적적인 초탈적 행위로서의 유희가 전혀 없다. 무목적적 행위로서의 유희는 하이에크가 보기에는 게으름 혹은 죽음에 불과할 것이다.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신의 지식을 사용하는 자유인의 계산적 행동은 경쟁 속에서 이루어지므로 늘 세상과의 긴장 관계 속에 있다. 다른 자유인들과의 경쟁은, 초개인적 협동의 질서에 의해 결국은 평화와 질서를 가져온다 할지라도, 우선은 힘든 일일 수밖에 없다. 장자는 세상과 더불어 눕기도 하고 일어서기도 하라(與世偃仰)”고 가르치는데 반해 자유인은 늘 일어서서 무언가를 하려고만 한다.

노장 사상은 기존의 상식과 질서를 다 해체한다. 그런 점에서 노장 사상은 외적 강제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하이에크 철학과 친화적이라 생각할 수 있다. 기존의 공동체적 질서로부터 벗어난 인간은 개인일 수밖에 없다는 점도 하이에크의 개인주의와 닮아있다. 노장 사상은 도덕윤리를 앞세우는 유가와는 달리 인간의 욕망에 대해 부정적이지 않다는 점 또한 하이에크 철학과 유사해 보인다. 제자백가 가운데 자유주의 혹은 개인주의와 유사한 학파를 굳이 찾자면 노장의 도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양자 간의 이 같은 유사성은 피상적 관찰의 결과일지 모른다.

노장의 무위는 유위에 대한 극단적인 부정과 해체가 될 수 있는 반면, 하이에크는 자유를 말하더라도 기존의 상식과 질서를 다 해체하지 않고 외적 강제에 대해서만 반대한다. 또한 하이에크는 욕망의 무분별한 해방에는 단연코 반대한다. 그는 자유와 질서, 욕망과 규칙()은 늘 같이 간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이야말로 그의 철학의 핵심이다. 하이에크는 자유방임주의나 무정부주의에는 찬성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하이에크는 스스로 보수주의자가 아니라고 공언하지만 그의 철학은 노장 사상보다 더 온건하고 더 보수적이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욕망과 자유에 대한 간섭을 가급적 배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질서와 법을 잠시도 잊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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