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07 22:52 (일)
[박소향 詩수다] 상처와 치유의 시간들
[박소향 詩수다] 상처와 치유의 시간들
  • 프리덤뉴스
  • 승인 2018.09.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소향/시인(한국문인협회 회원)​
박소향/시인(한국문인협회 회원)​

기울어진 달빛도 혼자여서 더 반짝이는가.

당신도 한 번 쯤은 겪었을, 한 번 쯤은 느껴보았을…그런 날들. 나와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한 자아전의 서막이 내게도 있었다. 너무나 치열해서 죽지 않을 만큼의 피를 흘리고 나뒹굴었던 다시없을 간절함과 궁핍의 격전지.

이제는 무뎌진 마음자리의 오래된 흑백 소묘. 기억의 한 곳에서 유기하고 싶은 그 때 그 시간들에 대한 격변의 이야기 말이다.

그 골목길의 따뜻했던 가로등 불빛처럼 지금은 말 한마디가 소중한 나이가 되었다. 사람들은 이미 충분히 상처 받고 있기 때문에…

오래 된 골목의 내력

바람이 참다간 오래 묵은 동네에 그런대로 살다보면 
낯설고 두려운 풍경도 어느새 정이 들고 
비좁게 들어선 낮은 지붕들과도 친해지게 마련 
월세 방 층층 계단이 힘겹게 내려앉는 소리도 정겨워지기 마련

길고 긴 비탈길 한참 오가다보면 
여기저기 땜질한 비린내 나는 보도블록도 
아무렇게나 내딛는 발걸음 편히 받아주어 좋고 
70년대나 걸었음직한 근대화체인 이라는 낡은 간판도 
촌스러워 보이지만 옛 생각나게 해 주어 좋지

막걸리 잔에 비틀어진 북어 한 마리 올려놓고 
누군가의 소원을 빌어 놓은 듯한 보살집 앞 
삐걱이는 파란 깃발이 무성영화 촬영지인양 펄럭거리면 
근질근질한 과거의 영상들이 기어 나와 지금의 풍요를 비웃기라도 하듯 
폭삭 주저앉은 늙은 대문을 꼬나보기도 하는 오래된 골목

서늘한 어둠 등 뒤로 깔리기 시작하면 
이끼 낀 성곽 불빛이 쿵쿵 소리 내며 걸어 나와 
제법 근엄한 모습으로 좁은 골목을 비추고 
빈곤만큼 쌓인 쓰레기봉투를 사정없이 뒤지던 
도둑고양이 날카로운 눈빛도 무섭지만은 않지

사랑 하나면 모든 문제 헤쳐 나갈 수 있을 것 같던 소녀 적 철없던 상상력도 
무딘 세월의 상처 앞에서 산산이 깨어졌지만 
홀로 서는 일 만큼은 아직 서툴러 누군가의 가슴을 가끔 헤집어놓곤 하는데 
가난의 냄새가 십리 쯤 퍼져나갈 듯한 묵은 골목들의 내력을 눈치 채고야 만 
내 나이는 이제 철이 든 것인가 실감나게 느껴질 때면 
오금이 저려오는 건 또 어쩔 수 없지

오랫동안 아집의 중심이 되어 온 막막한 세월의 이기를 
거기서 혼자 이겨내다 보면 
마음 끝에 매달린 인연의 고리를 끊어버리는 일도 
감당하기 힘든 사랑보다 더 어렵다는 걸 깨닫게 되지 
중심 잃은 마음의 커브 길을 돌아가고 나면 
평평한 진리의 길이 나온다는 것도 그 때 쯤은 알게 되지

상처가 된다는 걸 알면서도 꿋꿋이 저질러온 못된 근성만큼 
고쳐지지 않는 아집과 성질은 때로 사랑보다 더 짙게 제 색을 드러내고 
인생의 절반을 싸움판으로 만들어 주기도 한다고 누가 그랬든가 
눈을 반만 뜨거나 혹은 남보다 조금 더 미련한 척 하지 않으면 
인생은 참으로 까다롭고 어렵다는 걸 알게 해 주는 오래된 골목의 내력

거기엔 현재와 과거가 함께 공존하며 
이 시대 빈곤한 서민들의 고향이 되고 
모자란 자신에게도 만족하며 살아가는 곳이란 걸 알게 해 주니 
결국 애꿎은 인생이라 해도 고맙지 않은가

낮은 지붕아래 육중한 성곽의 달빛이 반사되면 
인생에 미련한 나도 그들과 함께 잠이 들겠지 
눈 다 뜨면 보이는 욕심 너무 많고 
똑똑하면 가장 쉬운 사랑조차 하기 어려운 세상

눈을 반만 뜨고 쓴 웃음 한 번 더 웃어버리면 
우리 사는 일들 훨씬 더 쉬워질 것이다 
오래전부터 꼿꼿한 사람들의 발을 낮아지게 했던 
저 오래된 골목의 내력처럼 말이다
      -2007년 11월 늦은 밤, 수원성의 한 외곽에서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