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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시 산책] 고씨동굴의 박쥐
[명시 산책] 고씨동굴의 박쥐
  • 프리덤뉴스
  • 승인 2018.11.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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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 민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진별리라는 곳,
고씨동굴에 나는 산다

임진왜란때 고씨 일가가 왜군을 피해 숨어살던
곳이라, 고씨동굴이라 한다

남한강을 가로지르는 긴 다리 건너편에
있는 고씨동굴.

나를 보려면, 사람들은 매표소에서 동굴 입구까지
200m정도 걸어와야 한다

나를 보려면, 동굴 입구에서 입장권을
기인 긴 동굴을 타고가는 기차표의 탑승권처럼
펀칭으로 확인받고,
나눠주는 안전모를 착용하고 입장해야 한다

나를 보려면, 동굴 내부에는 좁고 낮은 천장들이
가끔 있어서 머리를 보호해야 한다

나를 보려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계단을 오르고
콘크리트 바닥을 딛고 와야 한다

나를 보려면, 조명빛이 들어오는 안내판들의
손에 이끌려 들어와야 한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점점 나에 대해서
더 궁금해지고 나를 보고싶어 조바심을 낸다

더욱 깊숙이 들어가면 갈수록
어두워지는 동굴의 암흑을 지워버리려는 듯
조명빛들은 미쳐 날뛴다

중간 중간 설명이 너무 잘 되어 있을수록
도대체 나는 어떻게 생겼는지
사람들은 궁금해 가슴이 터져버릴 듯 하다

고씨의 거실이었다고 한 곳은
넓직 넓직하고 평평하고 아늑한 곳으로 고씨는
모처럼 난리난 세상사를 모두 잊고
편안하게 지냈었을 것이다

나를 보려면, 좁고 낮은 천정들의 기인 긴
회랑을 계속 걸어와야 한다

사람들은 동굴을 이동하면서
남은 거리나 걸어온 거리의 표시도 볼 수 있다
차암 사람들은 친절하기도 하여라

고작 나를 보러 그러다니...

나를 보려면, 동굴 중간 중간에
눈멀은 황소처럼 씩씩거리며 엄청난 속도와 힘으로
흘러내려가는 지하수를 목도해야 한다

나를 보려면, 좁은 통로 사이에 그리스신전을
떠받드는 기둥같이 우뚝 솟은 석주들도 많이 보아야
한다

원한다면 축축하고 미끈미끈한 석주를
직접 만져도 보고...

인디아나 존스 영화 속의 동굴 같은
느낌의 넓은 공간들도 꽤 많았는데 전반적으로
억겁의 세월동안 시간의 물이 흘러가면서
깍아먹히느라 생긴 이런 모양 저런 모양의 다양한
형태들을 하고 있어서 볼거리가 많아도

아직 나는 동굴 깊숙이 숨어
나타나지 않아

사람들은 내가 있기는 있는가하고 의아해
할 만해도,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이곳을
나는 나가지 않는다

나는 선천적인 맹인이라
사람들처럼 꿈을 꾸지 않는다. 예가 아니면
보고 싶어도 보지를 않는 나

사람들이 찾으러 온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 나

내게는
삶처럼 낡아가는 계절의 햇살들,
비바람에 떨어지는 벚꽃잎들, 변덕스런 동서남북의
바람들, 장맛비에 젖어가는 콩밭들, 들판의 말라가는
풀잎들, 단풍 들어 나뭇잎을 떨구는 나뭇가지들,
붉으러니 노오란 저녁 노을들이

도통 보이질 않는다

보이는 거기에 눈물 젖어가는 시인들의
눈시울이 내게는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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