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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학 칼럼] 이토히로부미는 한국인일 가능성이 있다.
[김문학 칼럼] 이토히로부미는 한국인일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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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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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히로부미는 한국인일 가능성이 있다.

 

김문학(비교문화학자, 문명비평가)

 

2011년 필자는 <사상가 안중근과 이토히로부미>라는 연구서를 일본어로 출판한 바 있다. 국제 안중근기념협회의 일본지부장으로 활동하면서 수년째 안중근과 이토히로부미 관련 유물 수집, 서적, 자료, 문헌의 섭렵에 힘을 기울이면서 직감한 것은 안중근과 이토의 방정식을 푸는 것은 근대 한일 관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실마리가 된다는 것이다. 안중근이 문인이며 사상가로서의 지대한 요소를 가지고 있는데 이토히로부미 역시 문인형 정치가이며 또한 사상가라는 면에서 유사성을 갖고 있다. 필자는 안중근과 이토히로부미를 연구하면서 두 사람이 서로 입장을 달리하지만 서양 세력의 위협을 대처할 비전으로서 제기한 <동양평화사상>에 의외로 합치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물론 안중근이 평화사상을 갖춘 인물이라고 해도 결국 육혈포 탄환으로 밖에 대결하지 못했다. 이 것은 우리의 안중근에게도 그리도 일본의 이토에게도 조선인과 일본인에게는 다 비극이었다. 평화 주장이 유혈의 인명 말살로 나타나는 아이러니다.

 

때로는 역사의 한 장면, 한 인물이 내뱉은 말 한마디가 지나간 과거의 미지의 공간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되는 법도 있다. 필자는 하얼빈역에서 안중근의 총탄에 맞아 절명하기 직전 이토 히로부미의 마지막 한마디 말이 늘 뇌리의 그물에 걸린다. 총을 맞은 이토는 수행원들에 의해 다시 열차안으로 운송되어 소파에 눕혀지고 나서 상처에서 선지피가 흐르는 이토에게 수행의원 코야마가 브랜디 두컵을 권한다. 첫 잔을 마시고 좀 정신을 차린 이토는 저격한 자가 조선의 청년이라는 말을 듣고 흥분했다.

그래? 어리석도다조선의 청년이 범인이라는 말에 이토가 내뱉은 어리석도다이 말 한마디는 곧 큰 단서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왜 이토는 자신을 저격한 행동을 어리석다고 했을까? 우리는 누구하나 할 것없이 이토가 남기 마지막 말을 진지하게 생각할 여유마저도 없이 흉악한 일제의 우두머리 이토 잘 쓰러졌다는 짜릿한 쾌감에 마비돼왔다.

필자는 안중근 기념협회의 일본 총 책임자로서 또 한민족의 후예로서 되도록 감정적으로 안중근을 높이 추켜올리고 이토를 폄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를 바라보는 작업은 민족감정 또는 감성적으로만 편향하는 것은 큰 어리석음이다.

필자가 수년간 이토히로부미 관련 자료를 독파하면서 떠오른 이미지는 이토히로부미는 한국인의 후예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토는 한국인 일 수 있다고 필자는 대담한 가설을 제기한다. 이 가설을 일본인과 한국인 및 조선족 친구들에게 고백하자 모두 다 놀라면서 오 그럴 수 있겠군하면서 수긍하는 자가 많았다. 아래 나는 나의 대담한 가설에 대해 그 이유를 전개시키겠다.

 

(1) 이토가 안중근의 총탄을 피탄하고 조선인 청년이 저격자라는 것을 알고 어리석도다고 한 것에는 숨겨진 원인이 있다. 사실 이토는 190511월 을사조약 체결후 19063월 초대 한국 통감으로 부임한다. 19096월 통감직을 입증해주듯이 그는 전쟁반대자였으며 민본주의, 법치주의, 점진주의 3요소를 구비한 매우 지적인 지도자였다.

그가 한국통감을 스스로 맡은 것은 문명을 한국에 전파하고 자신이 근대 문명주의로 일본을 계몽시키고 일본을 근대국가로 만든 방식으로 한국도 문명적 근대국으로 만드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따라서 한국인의 자치능력을 개발하여 전쟁이나 무력 통치가 아닌 방법으로 평화롭게 한국인이 스스로 자국을 경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그의 이상이었다. 그러한 본심을 모르고 자신을 오해하고 육혈포로 저격한 한국 청년에 대해 어리석다고 질타했던 것이다.

 

(2) 이토가 당시 한국통감을 자임한 때는 이미 66세의 고령이었다. 그가 이미 퇴직하여 집에서 한시나 쓰고 한적하게 지낼 수 있었는데 왜 자진해서 한국통감 요직을 맡았을까? 그것은 당시 일본 군부가 무단통치, 합방을 노리고 있었기에 자신의 권력으로 이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당시 일본의 한국 경영은 사실 한국의 제반 토대와 경제력으로 보아 일본에게는 사실 힘에 겨운 시끄러운 일이었다. “합병할 필요는 없다. 합병은 너무 성가신 일이다고 이토는 정면에서 반대했다. 그는 한국들 8도의원을 선출하여 자치권을 인정하는 통치이념을 내세우고 한국이 재독립이 열리고 일한 동맹으로 서양의 침략을 막자는 장대한 구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진심으로 한국을 사랑했던 것이다.

 

(3) 이토 개인의 출자에서 보면 그는 원래 이토성이 아니라 하야시(임씨)였다. 가난한 백성이었던 아버지가 명문 이토씨의 양자로 되어 그는 이토 성을 갖게 된다. 야마구치현은 본디 한국이니 현해탄을 건너 많이 살아온 고장으로서 한국인의 후예가 많이 살고 있으며 지금도 시모노세키에는 한국인이 많이 칩거하고 있다. 이토는 한국 문화를 사랑했으며 한복을 즐겼다. 그리고 늘 조선인은 대단하다 역사를 보아도 일본보다 월등히 진보한 시기도 있다고 말하면서 한국의 문화, 가치관, 질서를 존중하면서 점진적으로 문명국으로 전환될 것이라 믿어왔다.

그는 소탈하고 술 좋아하고 호방호락하며, 호언장담을 늘여 놓는 등 한국인의 성격 기질의 소유자인데 일본인 속에는 이런 성격은 드물었다. 이런 여러 상항으로 미루어 그는 성이 임씨인 한국인의 후예일 가능성이 있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필자 나름대로의 가설이다. 아직 가설을 정설로 입증할 만한 문헌은 거의 없으며 찾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그가 한국을 사랑한 이면에는 자신이 한국인의 후손이다는 의식이 있었다는 냄새는 풍긴다. 이토가 한국인이라는 가설이 증명되든 안되든 중요한 것은 그가 한국문화를 사랑하고 한국 국력이 성장하며 보호해주고 그때가 되면 합병시켜 식민지배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는 점이다. 이것이 근대사를 다시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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