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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학 칼럼] 일본식민지시기 조선의 일본인
[김문학 칼럼] 일본식민지시기 조선의 일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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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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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식민지시기 조선의 일본인

 

김문학(문명비평가, 비교문화학자)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는 서구의 식민지 지배 양식과는 달리 정착형이었다. 따라서 식민지 지배를 침략으로 정의한다면 그것은 군인들에게만 의한 것이 아니라 이름도 없는 많은 일본 대중들의 동조적 지배에 의해 지탱된 것이었다

사실 일제 식민지 시기, 조선땅에 살았던 일본인의 상황에 대해 교과서든 일상생활에서든 별로 다루어지지 않은 영역이다. 일본 정부, 군인의 지배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고 많은 연구와 답론이 전개되어 왔지만 대중적으로 그 지배를 가능케한 일반 일본인의 생활실태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었다.

일본에서는 전전에 조선촉독부가 편찬한 <조선의 내지인(일본인)><조선의 인구연구> 다카사키소지의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 같은 저작이 전후에도 출판되어 당시의 일본인에 대해 조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일본인이 조선에서 체류, 생활하게 된 때는 언제부터일까?

19762<일조수호조약>이 체결되어 부산 등 3개 항구를 개항하며, 188012월 최초의 주찰변리공사 하나부사요시토모가 서울에 주재하게 되면서 조선의 신창석 군대인 별지군의 교관 호리모토가 초빙된다그후 18832월 서울의 외곽 항구 인천항에 일본조계지가 설정되고 11월 서울을 개방하면서 일본인이 서울에 거류하게 시작한다처음 조선에 이주, 정착한 일본인은 주로 일용품 상업, 도자기, 약장사였으며 일본공사관의 심부름꾼으로 활약했다. 1883416명이던 인천의 일본인은 그해 말에는 400명으로 불어난다.

1894-95년이 청일전쟁과 마찬가지로 1904년~ 1905년의 일러전쟁에서도 조선 거주 일본인은 전쟁에 적극 협력하게 된다. 그 즈음 1893년 8871명이었던 조선 거주 일본인이 1894년 연말에는 9354명으로 증가된다. 그때 일본인의 도항자가 증가됨에 따라 일본 정부는 군사, 경제, 문화적 지배 협력을 확립하는 수단으로 이민장려책을 적극 추진하였다1896년 년말에는 12303명이었고, 일본인 여성의 수도 늘어나 1897년에는 경성부인회를 결성하게 되었다. 1895 10월에는 일본의 일반인이 정부의 획책에 가담하여 조선의 국모 민비암살사건의 죄악을 저지른다.

서울의 일본인 중 가장 많은 직업이 여성의 작부였는데 일본 여성의 5명이 작부였으며 그 외 창녀도 다수있었다. 다음은 잡화상, 음식업종이 주류였따1901년 한국 공사 가토마스오은 태양잡지에 한국이민론을 발표해 조선이 인구가 희박하므로 이민할 좋은 고장이라고 역설하면서 적극적으로 이민할 권장한다. 일본의 매스컴도 이민론을 일제히 부르짖게 되고 이로부터 이민은 본격적으로 물꼬를 트게 된다.

1905년 제2차 일한보호협약(즉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실제로 한국을 식민지로 전락시킨다. 1906년 이토히로부미가 초대 한국통감으로 부임되며 한국을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서면서 일본인이 한국에 대거 진출한다. 1905년에는 42460, 06년에는 8321명으로 급증한다그래서 서울에는 일본인 거리가 들어선다. 혼나치 야마토마치 히노데마치 등이 속속 나타난 일본인이 경성거리를 활보한다. 게다소리는 군화소리와 함께 경성의 거리를 요란히 울렸다.

1910년 일한병합의 해에는 어느새 일본인이 171543명으로 늘어났으며 일본인 후손의 교육을 위한 학교도 128개나 탄생된다. 1914년에는 291217명 연평균 3만이나 증폭된 셈이다. 1919년에는 346619명이나 된다합당 당시 조선총독부의 일본인 관리, 직원만으로도 대폭 증가되었는 바 고등관리만해도 15113명이나 되었다.(강창석의 통계)

전기회사, 철도회사, 건축회사가 대거 생기며 기독교 전도사도 조선에 증폭된다. 당시 조선의 일본인 사회에는 두 종류의 차별이 있었다. 하나는 일본인 전체가 조선인에 대한 차별, 천대였고 다른 하나는 상층 일본인에 의한 하층 일본인에 대한 차별되었다1913년 부제 공포에 의해 조선은 일본의 일부분으로 되었으나 표면적으로는 조선 총독부가 일본인, 조선인을 똑같이 대한다고 규정했음에도 실지로는 민족차별이 엄존했다.

당시에 사료, 기록에서도 일본인의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얼마나 현저했는지 알 수 있다. 이런 차별을 목격한 당시 아사히 신문사의 경성특파원 나카노마사오카는<내가 본 만선>1915에서 일본의 동화정책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일본인은 조선인을 부를 때 꼭 바카야로” “이 놈아를 연발했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인인 주제에라는 언사도 서슴치 않았다고 했다.

물론 조선의 문화를 깊이 이해 하고 사랑한 일본인들도 있었다. 아사카와 다쿠미 같이 한국 도자기를 사랑하고 조선인을 깊이 동정한 인물도 적지 않았다. 1924년 조선에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교)이 설립되며, 그 해 여식 경복궁안의 건물에 조선민족미술관이 개관하며 조선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일본의 민간인들이 힘을 기울이기도 한다.

1930년대 내선일체의 정책 아래서도 식민지 지배에 반대하여 조선인의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한 일본인들도 있었다그리고 조선의 '폐창 운동'에 적극 참여한 일본인들도 나타났으며 '내 결혼'이라 불린 일본인과 조선인의 결혼도 활발히 이루어졌는데 1926년에는 읠조 결혼건수가 60건이었지만 1944년에는 5458건 연평균 109건이나 되었다.

1945년 일본 패전시 조선에는 무려 77만의 일본인이 있었는데 일본으로 철퇴해버리고 그해 말에는 28천명만 남았다는 통계가 있다. 조선에서 체류한 일본인의 유형을 (1) 자신의 행동에 자긍하는자 (2) 천진난만하게 조선식민지 체험을 향수로 느끼는 자 (3) 자기비판, 자기성찰, 자기부정하는 자 등 3타입으로 분류된다고 한다.

필자는 한국인측에서 바라본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론이 학문적으로 다루어지지를 바란다. 우리를 지배한 일본인의 전체상을 냉청하게 인식하는 시점이 필요하다고 사료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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