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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학 칼럼] 왜 근대 조선의 엘리트들은 일본과 제휴를 바랐나
[김문학 칼럼] 왜 근대 조선의 엘리트들은 일본과 제휴를 바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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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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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근대 조선의 엘리트들은 일본과 제휴를 바랐나

 

김문학(문명비평가, 비교문화학자)

 

100여 년 전 조선에서는 근대화를 건설하기 위한 모델은 일본이었으며 일본에 대해 인식을 갖춘 엘리트들은 일본과 제휴를 원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당시의 자료(신문)를 보더라도,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대해서도 지금 한국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대다수가 반대를 이유로 소란을 피우거나 하지는 않았다. 의병투쟁의 한계를 엘리트 특히 지식인과 정치가들은 숙지하고 있었기 떄문에, 그들은 섣부른 항쟁보다 실력 양성을 하고 역량이 축적되면 일본을 대적하여 누르고 독립과 근대화에 성공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라 여겼다.

실제로 그들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무모한 유혈투쟁의 희생보다는 좀 더 현명하게 현실을 파악하는 것이 효과적이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 증명해 주고 있다.

독립투사 안중근의 실례를 들어보자. 구국지책을 찾아 해외, 중국, 청도, 상해, 위해위 등 지역의 동포들을 찾아 전전하던 안중근은 상해 성당에서 난곽신부에 의해 구국의 방도는 역시 교육, 민심단결, 실력양성 등이라는 것에 찬동하여 1906년 조선으로 귀국하여 학교를 운영하게 된다. 당시 서울의 서북도(황해, 평안도)출신인 명사들은 서북학회를 결성하여 애국계몽 운동을 활발히 전개시켰다. 그들은 박은식, 안창호, 이갑 등 쟁쟁한 독립운동가, 엘리트 지식인들이었다. 안중근도 서북학회 회원이었으며 안창호와도 친분이 두터웠다. 박은식의 증언에 따르면 안창호가 안중근의 포부와 용기를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안중근은 민족주의 인재 양성을 위해 대학 설립이 급선무라 여겼는데 프랑스 신부에게 속내를 터놓았으나 받아주지를 않았다. 그래서 안중근은 서양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하게 되면서 일본에 대해서는 더 호의를 갖게 된다.

일반대중이나 학계에서도 안중근을 철두철미의 반일투사로서 이미지를 만들고 있으며 또 그렇게 믿고 있지만 현대인에게 고정관념으로 자리잡은 인물표상에 지나지 않는다. 한 인물을 앎에 있어서 그 전기, 사료, 한일관계 등 입체적 고찰, 사색이 중요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한국에서는 안중근을 무조건 반일영웅으로서 표상화하고 신격화시켜서 그 전기, 이야기, 이미지 만드는 추세다. 그러나 필자는 그 보다도 생신의 인간으로서 결점, 약점까지도 포괄한 인간으로서 취급하는 것이 오히려 더 진실에 접근한 인물상을 발견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특히 100년 전의 한일관계나 그 그물망 속에 있었던 인물의 사상과 행동에는 일본적 영향이 상당히 침투돼 있음을 부정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시점으로 역사를 바라보면 또 다른 보이지 않는 부분이 노정되는 법이다. 지금의 한국 사학계에서도 일부 용인하고 있듯이 한국근대화는 행운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일본이란 여과장치를 겪어서 달성된 것이다. 당시를 살던 한국 정치가, 지식인, 독립운동가들도 실지로 누구든 다 홍수처럼 밀려든 일본 근대의식(국민국가, 민족주의 ,애국심 등)을 수용하여 개안한 것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안창호, 신채호, 박은식, 여운형, 서재필, 윤치호의 세대나 그 후세대인 최남선, 이광수, 최린, 김동인 등 한국 근대사를 장식한 쟁쟁한 엘리트는 일본 근대성의 사정권(射程圈)내에서 활동해 온 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다. 당시의 세계적 정세를 감안하여도 한국이 독립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우선 근대화, 국민국가를 성취하는 길 밖엔 없었다.

의외로 들릴지 모르지만 근대 개국이래 한국 개혁을 지향한 유지, 엘리트의 주류는 일본과 제휴를 바랐으며 그것을 주축으로 노력해오자 했던 것이다. 사실 반일, 저항 독립운동가 속에도 일본의 영향을 받은 자는 수없이도 많이 존재했다. 반일운동가들마저도 일본과 관계를 남몰래 갖고 있었던 자가 많았다. 단지 한국에서는 그런 사실의 존재를 터부시하고 공개적 확언을 기피하고 있을 뿐이다. 친일파로 몰리우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거듭 말하지만 한국 근대사에서 그렇게 많은 소위 친일파인물이 많으며 그것이 현재까지 연장되어 한국 정치의 중추적 문제의 하나로 되어 있다.

독립운동가의 대명사인 안중근까지도 사실 일본, 일본인에 대해 만고의 적개심을 품은 인물은 아니었다. 그가 여순 감옥에서의 취조심문기록이나 집필한 자서전 등의 글을 읽어보면 그가 무작정 일본인, 일본을 증오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 역시 일본 천왕에게 기대를 걸었다. ‘독립유묵을 받은 시다라씨 후손의 증언에 의하면 안중근은 메이지 천황에 호감이 있었으며 독립유묵을 통해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자고 했다고 한다. 그의 자서전이나 동양평화론에서도 일,,3국의 연맹을 제안하고 일본이 3국의 지도자로 될 것을 바라고 있었다.

우리가 이미 식민지통치 100년이 지난 오늘 좀 더 이성적이고 넓은 시야, 새로운 시점에서 일본과 우리의 참 좋은 관계를 바라보고 성찰할 수 있는 아량과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고 필자는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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