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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학 칼럼] 세계는 이토 통감통치에 대해 어떻게 평가했나.
[김문학 칼럼] 세계는 이토 통감통치에 대해 어떻게 평가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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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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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이토 통감통치에 대해 어떻게 평가했나.

 

김문학(비교문화학자, 문명비평가)

 

근대사를 바라볼 때 특히 일본과의 식민지통치에 연관된 역사시기를 인식함에 있어서 우리에게는 하나의 결정적인 결함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지나친 민족주의적 정서적 관념으로 조선의 전통 사회의 특징들은 모두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일본의 통치에 대해서는 무조건 부정적이거나 부당하게 평가하고 인식하는 것이다. 그런 평가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입증해주는 역사적 사실들이 우리 눈 앞에 있어도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한다. 민족주의 절대적 관념이 바로 우리의 장점이기도 한 동시에 우리의 결함이라는 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이토 히로부미의 한국 통감정치에 대해서도 이토가 우리가 아닌 타자 즉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부정적으로 평가하거나 인식하고 있다. 민족주의의 편향적, 절대적 시간에서 벗어나 중립적 평상심으로 이토 통감통치에 대해 그 전 과정을 바라본다면 오히려 봉건적 조선왕조는 개혁이 소생할 가망이 거의 없었던 반면에 일본식 개혁은 한국을 직접 개혁시킨 첩경이었다.

영국 <데일리 메일Daily mail>의 조선특파원인 캐나다인 기자 F.A,메켄지는 오래동안 조선에 체류하면서 이토의 보호정책이 진행된 이듬해 의병 토벌상황을 취재하여 명작 <조선의 비극>을 썼다.그는 조선에 대한 일본이 엄혹한 만행을 고발하면서도 조선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편견없는 관찰자라면 누구라도 한국의 낡고 부패한 국가통치자의 유약으로 인해 독립을 상실하는 것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일본의 한반도 정책이 노회한 궁정파의 음모와 고집 때문에 더 어렵게 되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장애를 감안하더라도 조선점령 이후에 일어난 여러 가지 일들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비통한 실망감을 고백할 수 밖에 없다

메켄지는 그 후에도 한국이 독립을 상실한 원인에 대해 일본의 궁정의 음모에 곤란을 겪었다고 지적하면서 일본에 대해 동정적이었다. 그러나 한편 메켄지는 일본이 의병(폭도)”진압을 위해 만행을 거듭 감행했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이러한 메켄지의 평가는 이토 통감정치가 시작된 지 일년 이내의 일에 데한 것인데, 그 시기는 이토 통치의 정치가 궤도에 오르지 못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토의 통치가 3년이 경과하자 이토의 한국 경영의 구상과 실천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이토는 메이지 일본을 만든 공로자였으며 원훈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새로 밝혀진 연구에 의하면 65세에 자진하여 한국통감이 된 이유는 자신의 힘으로 군부의 무단 통치를 미연에 막고 물리적인 보호를 통해 한국의 문명화를 통해 독립의 힘을 키워 자신이 일본에서 성공한 근대 국가를 한국에도 만들자는 의도였다.

이토는 외교와 내정의 근대화를 시도했지만 당시 고종은 조선 왕조의 왕권을 고수하기 위해 근대국가화에는 소홀히 했다. 고종은 헤이그밀사사건으로 양다리걸치기 술책을 써서 이토의 노여움을 샀다. 고종의 책임은 사실 을사오적이나 모든 정치가들보다 더 컸던 것이지만 고종에 대한 책임 추궁은 아직도 그 어떤 역사학자도 행하지 않고 있다.

파란만장의 생애를 마친 이토는 단순히 오늘의 민족주의 관점에서 침략의 원흉으로만 일축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이토는 한국에 당시로는 거액인 천 만엔을 투자하여 근대적 경찰, 재판소, 사법체제를 정비시켰고 그리고 수도, 도로, 토목공사, 학교, 병원, 철도 건설 등 근대적 시설을 도입했다. 역사적 사실을 냉정히 평가한다면 한국의 근대화는 이토의 직접적 근대화 도입, 추진으로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은 한국의 지식인들조차 조선조가 안되면 일본의 힘이라도 빌리려고 했던 것 역시 그 무렵의 사회적 풍조이기도 했다.

한국에서 장기간 체류한 선교사 라드 박사는 5년간의 이토 통치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한국은 일본의 보호로 인해 신생명, 신광명을 얻게 되었다. 높은 차원의 정치도덕을 중시하는 진보적이고 원만한 이토 통감에 의해 한국인은 암흑시대에서 광명시대로 미개한 시대에서 문명시대로 인솔되었으며, 낡은 유구한 막장에서 탈피하여 그들의 생명과 재산은 확실히 보호되었다. 모든 면에 있어서 3년간에 2배의 진보를 이루었다

그리고 역시 선교사인 하리스 박사는 요미우리신문에 대해 이토의 정치치적에 대해 이렇게 진술했다.

내가 보건대 이토 후작의 통치는 최대의 칭찬을 받을 만한 것으로 대만족합니다. 한국 국민은 지금이야말로 드디어 그를 자신의 벗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행동에 옮기기도 했습니다

외국인 관찰자들의 이토에 대한 전면적, 긍정적 평가는 우리에게 충격적이다. 그리고 또한 일본만 부정하던 우리에게 있어서 너무 생소하다. 필자는 제국주의 시대의 서양인들이 본 이토의 통치에 대해 다 수긍하자는 뜻이 아니다. 민족주의의 절대적 시각에서 탈피해서 보면 세계에도 여러 가지 평가도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역사를 평가하고 인식할 때 민족주의의 절대성을 초월하는 것이 우리 모두가 부여받은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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