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07 22:52 (일)
[김문학 칼럼] 한복을 입은 이토 히로부미
[김문학 칼럼] 한복을 입은 이토 히로부미
  • 프리덤뉴스
  • 승인 2023.08.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복을 입은 이토 히로부미

 

김문학(비교문화학자, 문명비평가)

 

한국통감으로 사실상 조선의 지배자로 군림했던 이토 히로부미가 19091026일 오전 하얼빈역에서 조선 청년 안중근에게 암살당했을 때 조선인들은 숫자풀이 노래를 지어 불렀다.

1. 일본에 2. 이등박문이랑 사람이 3. 삼천리 금수강산을 4. 사방에서 바라보고 5. 오적을 매수하여 나라를 앗아 갔기에 6. 육연발 권총으로 7. 칠발 쏘아서 8. 팔도강산을 다시 찾으니 9. 구사일생의 왜놈들은 10. 십만리 밖으로 뺑소니치네

조선왕조의 백성으로 살던 사람들은 통감 이토의 지배에서 쌓인 울분을 이렇게 풀었다. 이토가 한국을 찾은 때는 1905년이다. 1905년 제2차 을사조약에 따라 한국통감부를 설치되고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에 의한 보호정치가 시작되었다. 한국과 일본 및 서양 학자들의 최근의 연구(한명근, 이토 유키오, Beasley)에 따르면 이토는 한국을 독립국으로 하여 자치육성정책을 실시하는 한편 일본이 실권을 쥐는 지배방식을 시도했다. 그는 의도적으로 한국인에게 친한의 이미지를 만들려고 애썼다. <大邱物語, 가와이 1929>에 따르면 190511월 일본전권대사로 한국에 온 이토 통감은 한성근처의 안양에서 유렵을 즐긴 적이 있다. 프록코트를 입은 이토는 백발이 성성한 한국의 농민에게 다가가서 친절하게 인사를 나누고 천진난만하게 담화를 즐겼다는 일화가 등장한다.

이같이 한복 차림으로 노인에게 친절을 베푸는 등 행동에는 자신이 한국을 매우 좋아하고 사랑하는 마음의 소유자이며 따라서 일본과 한국은 한 집안이라는 정치적 은유가 숨어있다”(최재욱<伊藤博文要, 1940> 에 그가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은 에피소드가 나온다. 19161월 이지용와 박희병 그리고 그들의 부인들과 나란히 한복차림으로 사진을 찍은 이토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에서 이토의 왼쪽 앞줄에 앉은 여성이 이토의 부인 우메코인데 역식 한복차림을 하고 있다한복이 한 민족 전통의 상징이며 민족의 심벌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토는 숙지하고 있었기에 그는 한복을 입고 한국을 사랑하고 존중한다는 표상을 적극 자작하였다. 그의 각종 전기, 회상기를 섭렵해 보면 이토는 명예욕과 자부심이 유난히 강했는데 자기 현시욕과 그 표현력이 강한 성격의 인물이었다. 금전욕에는 담박했으나 색욕과 현시욕은 출중했다는 것이 정평이다.

자연히 그런 이토가 한복차림으로 자신의 친한·지한·애한표상 수집에 적극 자작자연 했을 것이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영남대학교 최재묵 교수는 한복을 입는 행위는 한국의 제도나 전통을 존중하고 일정한 자치를 인정한다는 정치적 제스처(시늉)였다. 그것은 한국 민심 향배에 부심한 일종의 계산된 정치적 연기이기도 했다.”라고 말했다한복차림의 이토의 사진은 문인답고 선비다운 풍모를 100년이 지난 우리에게도 느끼게 해준다. 이토가 한국 침략 선두주자라는 한국교과서의 서술은 맞다. 그런데 침범하여 그가 무엇을 어떻게 했느냐 하는 구체적 내용에 대해 우리 자신도 잘 알지 못한다. 그가 극악무도의 인물이란 세평은 사실과 어긋난다. 최근 속속 등장되는 이토 연구서나 전기와 달리 우리 동포들이 피상적으로 막연히 인식하는 이토에 대한 인상은 너무나 조잡하고 편향적이다.

이토가 중요하게 다뤄지는 이유는 한국 식민의 설계자적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민족교육이라는 신성한 차원에서 이토는 반드시 악의 상징으로 평가절하해야 하고 심지어는 왜곡해도 무관하다는 인식이 일반적이다문화상대주의가 결핍한 민족 정서의 유치성이 한일역사에 투영되어 있다. 우리는 역사는 민족정서나 민족의 뜻으로 풀이되는 것이 아니다는 상식을 짓밟고 있다필자가 새로 발견한 이토의 인물상, 한일관계에서 노정된 이토는 극악무도로 일축할 인물이 아니다. 안중근이 우리 민족의 영웅이듯, 그 역시 일본의 근대를 이끌어간 영웅적 정치가, 사상가, 정략가로서 당대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이토의 이름 博文<논어>君子博學於文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을 숭상한 문인이자 시인형 정치인이었다문명’ ‘입헌국가’ ‘국민정치는 그의 평생의 정치이상이었다. 그의 한국 통치 철학은 일본 국민들을 문명으로 계몽하듯이 한국에서도 문명정치를 실시하고 싶다는 것이었다1906년 그는 니이토베 이하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조선인은 대단하다. 이 나라 역사를 보아도 그 진보는 일본보다 월등 앞선다. 이런 민족이 나라를 스스로 경영하지 못한 이유가 없다. 인민이 나쁜 것이 아니라 정치가 나빴기 때문이다. 나라만 잘 되면 인민은 양과 질에 있어서도 부족점은 없다

이토는 한국의 기존 질서, 가치관을 되도록 존중하며 점진적 문명국으로 전환시킬 꿈을 안고 있었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한국 유교 소양에 애착을 갖고 있었으며 한국 유림으로 활동하려 했으나, 한국의 유교적 사상이 개혁을 막고 있는 수구라는 것을 실감한다. 마치 중국에서의 무술변법처럼 유교적인 보수층은 중압적인 존재였다. 그는 유교에 대해 회유책을 시도했으나 결국 실패한다. 그의 문명화는 유교권에서 지지를 얻지 못한 채 흐지부지해졌다. 그러나 이토는 한국전통과 민족성에 대해 관심을 돌려 한국에서 교육에 종사한 일본인 교사들에게 한국 국민성의 존중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가 한국 통치 구상에서 새로 발견된 메모에 다음과 같은 플랜이 보인다한국 8도에서 각 10명씩 의원을 선출해 중의원을 조직한다. 한국문무양반 중에서 각 50명 원로를 선출하여 상을 조직한다 한국정보대신은 한민국으로 조직하고 책임내각을 구성시킨다 정부는 부왕의 수하에 속한다

이토는 19094월에야 한국 병합을 인정하며 병합 후에도 한국의 정치적 자치를 주장했으며 의회정치를 통해 한국의 문명화를 실현하여 장래 한일동맹을 구상했다고 밝혀졌다. 그런데 이토의 암살로 그의 플랜은 종이조각으로 남고 말았다. 이토가 자신을 저격한 인물이 조선 청년이란 것을 알고 절명 직전에 남긴 바보같은 자식이란 말은 그 청년이 자신의 진의를 모른 채 저격했다는 말이었을까이토 사후에 한일병합이 정식으로 이뤄지고 이토의 구상과는 달리 데라우치 초대 조선총독의 가혹하고 강합적인 무단 정치에 들어선다. 이토가 살았다면 조선은 어떻게 됐을까? 상상으로 그 공백을 매울 뿐이다. 그러나 안중근이 이토의 진의를 몰랐다해도 이 것은 그의 죄가 아니다. 죄는 수단의 여하를 불문하고 이 민족을 지배하려 했던 이토에게 문책해야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