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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역사의 법정에 선 전두환은 무죄다
[토론] 역사의 법정에 선 전두환은 무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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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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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대한민국 현대사 세미나 1주제 '전두환과 제5공화국의 역사적 의미' 에 대한 토론문

역사의 법정에 선 전두환은 무죄다

 

김용삼 전 월간조선 편집장

김용삼 전 월간조선 편집장(사진 윤상구 작가)

 

#. 문화 충격

최진덕 교수의 발제문을 공부하면서 오랜만에 제대로 된 글을 읽었다는 통쾌함과 함께 참으로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이 시대의 핵심 본질이 무엇인지를 모색하는 학자·지식인·교수 집단에서 이 정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시각으로 제5공화국을 냉철하게 분석하는 목소리가 나오기까지 대체 얼마의 시간이 필요했는가 하는 자괴감 때문이다.

5공화국과 전두환 대통령은 우리 시대의 영원한 악의 세력으로 자리매김한 지 이미 오래다. 전두환에 관한 한 시대 퇴보적인 좌익 수구세력은 물론이요, 이 시대의 보수우파 지성인을 자처하는 인사들도 건전한 비판이 아닌, 악귀와 같은 비난을 쏟아내는 세태가 정상인 상황에서 최진덕 교수의 발제문은 신선한 문화 충격 그 자체였다.

그러한 문화 충격의 한복판에서 일본의 한국 정치 전문가 다나카 아키라(田中明)가 쓴 한국 정치를 투시한다라는 저서가 떠올랐다. 다나카 아키라는 한국은 1270년 고려 무신정권의 붕괴 후 750여 년을 붓잡이(文臣)들이 칼잡이(武臣)를 찍어누르고 권력을 행사한 세계사에서 예외의 나라였다고 분석한다.

이 지구상 존재하는 모든 정치집단은 국토를 수호하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안전보장을 최고의 가치로 신봉하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내부의 적을 방어하는 방첩·치안 능력, 외부의 적으로부터 국가 수호하는 국방 능력을 갖추는 일이 그 집단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업무다.

·외부 적의 도전에 대응하지 못해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에 실패하면 그 집단은 멸망하는 것이 순리다. 때문에 어떤 국가든 그 나라 지도층은 무장(武裝) 집단으로서의 능력이 가장 중요하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무()를 천시하고 사농공상의 신분질서를 신주단지 모시듯 하고, 숭문(崇文)주의를 신성한 가치로 추앙하는 것은 정신적 거세 상태를 뜻한다.

19615·16 쿠데타로 박정희 정권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기 전까지 한국 사회에서 군인 따위의 인종이 권력을 장악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정도로 한국은 문치 전성시대였다는 뜻이다. 이러한 문치 전통이 끈질기게 대물림되어 온 사회에서 박정희·전두환 등 무인 세력의 권력 장악은 너무나 이질적인 문화 충격이었다.

박정희의 18년 집권 기간과 육사 출신인 전두환·노태우 집권기까지를 군인 정권의 범주에 넣는다면 30년의 군인 출신 지도자의 통치 시기는 양반 중심의 문치에 익숙했던 한국인에게는 너무나 색다르고 어색한 무인 통치(武治)의 시대였다.

이러한 무치(武治) 시대는 한반도 역사에서 예외 중의 예외에 속했던 시기이므로 한국은 노태우의 퇴장 이후 자연스럽게 한국인의 기질에 적합한 문치의 시대로 회귀할 것이라고 다나카 아키라는 분석했다. 노태우의 후임으로 등장한 김영삼 정부가 군정종식, 문민정부를 선언한 것은 다나카의 주장을 입증하는 내용증명에 해당한다.

사무라이의 나라 출신 정치평론가인 다나카 아키라의 눈에 비친 한국형 문민통치란 어떤 것이었을까? 다나카는 앞에 소개한 책에서 이렇게 분석한다.

앞으로 누가 한국의 대통령이 된다 해도 한국 정치는 나라와 백성이야 어떻게 되든 오직 권력 쟁탈에만 매달렸던 조선시대 당쟁정치의 원형으로 복귀할 것이다. 그것은 한국의 문민정치가 갖고있는 전통이고 존재 양식이다.”

그는 2002년 내놓은 이야기 한국인이란 책에서도 비슷한 경고를 내놓았다.

한국은 역사적으로 지배층이 관념주의에 빠져 나라를 망쳤다. 그 원인은 무()를 가볍게 본 문치주의 때문이었다.”

따라서 한국이 문치의 시대로 회귀한다는 뜻은 조선시대 당쟁정치로의 복귀”, 그리고 관념주의에 빠져 나라 망치기로 해석된다.

 

#. 12·12는 쿠데타가 아니었다

5공을 주제로 한 세미나의 토론자로 나선 본인은 월간조선 기자 재임 시절 노태우 대통령 육성회고록을 연재하기 위해 노태우 대통령을 심층 인터뷰하느라 2년여 연희동을 출입했다. 김영삼 정부의 소위 역사 바로 세우기재판으로 감옥에 다녀온 노태우 대통령은 자신의 체험담을 기자에게 솔직담백하게 털어놓았다.

기자 입장에서 궁금한 점을 노태우 대통령에게 질문하고 답변을 듣는 과정에서 한국 현대사의 질풍노도와 같았던 10·2612·12, 1980년 서울의 봄, 5·18로 이어지는 역사의 전환기에서 최일선에 서 있었던 신군부 지도부의 대응 방식을 이해할 수 있었다.

또 전두환 대통령의 법률 대리인이었던 이양우 변호사에게 역사 바로 세우기재판에 제출된 총 14만 페이지, 용달차 한 트럭분에 달하는 검찰수사기록을 통째로 제공 받아서 밑줄 그어가며 공부한 덕에 어느 정도 그 시대의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에 대한 문리를 터득할 수 있게 되었다.

노태우 대통령의 증언에 의하면 육사 11기는 그 전의 육사와는 모든 것이 다른 기수였다. 그전까지 국군 지도부를 형성한 사람들은 일본 육사, 만주군관학교, 중국 국민당 정부의 군관학교, 광복군 출신이 주를 이루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애국심은 뛰어났고 전쟁 수행을 위한 전술전략은 교육을 받았으나, 대한민국의 핵심 가치인 자유민주주의 교육은 결여된 세대였다.

6·25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군대의 필요성을 절감한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도움으로 육군사관학교를 4년제로 업그레이드하면서 모든 교과과정과 훈련 프로그램, 정신교육을 미국 웨스트포인트 제도를 그대로 도입했다. 허화평 씨의 증언에 의하면 교과서도 웨스트포인트에서 사용하는 것을 번역하여 사용할 정도였다고 한다.

따라서 육사 11기 출신부터는 그 전의 군과는 확고히 다른 가치관, 즉 이승만 대통령이 원했던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군대로 환골탈태했다. 미국식 민주주의 군대 교육을 철저히 받은 육사 11기는 국내 그 어느 집단보다 투철하게 민주주의 방식으로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하고, 조직을 운영했으며, 자유민주 체제와 그 체제 수호의 상징인 국가를 목숨 걸고 수호하는 확고부동한 철학과 가치관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정신으로 똘똘 뭉친 집단이었기에 대통령 시해로 인한 지도부 공백 상태에 빠진 위기 상황에서 국가의 중심을 잡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는 것이 노태우 대통령의 증언이었다.

19793월 박정희 대통령은 전두환 소장을 보안사령관에 임명했다. 이 조치가 자신이 가장 아꼈던 군 후배를 자신의 시해 사건을 수사하는 책임자로 발탁한 것이란 의미를 박 대통령은 생전에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보안사령관의 핵심 과업은 대전복 업무를 담당하는 지휘관이다. 보안사령관은 박 대통령 시해 사건을 수사하는 합동수사본부의 장을 맡도록 관련 규정이 정해져 있었다. 이 와중에 대통령 시해라는 국가 위기 상황이 발생했다. 범인은 박정희 대통령과 형님, 아우님 하는 사이이자 이 나라 최고 정보기관인 중앙정보부장이었으며, 시해 현장에서 불과 50m 떨어진 곳에 육군참모총장 정승화가 김재규의 명을 받고 대기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뿐만 아니라 박 대통령 시해 후 정승화가 범인과 같은 차를 타고 이동했고, 그의 명령을 받아 수행한 사실, 그런 인물이 계엄사령관에 임명되어 군권은 물론, 정치 개입을 노골화하는 발언을 한 사실을 합동수사본부장이 알고도 침묵했다면 그것은 범행을 방조한 결과가 된다.

전두환이란 군인은 국가를 수호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도록 훈련받은 존재였기에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일신의 안일이 아닌, 목숨 걸고 최고 권력에 오른 계엄사령관을 조사하는 결단을 내렸다.

합법적인 수사 권한이 있는 합수본부가 수사선상에 오른 인물을 조사하기 위해 연행하는 것은 누구의 지시나 허락을 받을 일이 아니다. 하지만 수사 대상이 권력의 핵인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이니 함부로 조사를 강행할 수도 없었다. 전두환 합수본부장은 정승화 사령관 수사에 앞서 예의상 보고를 하기 위해 최규하 대통령에게 이를 알렸다.

매사 일처리가 신중한 공무원 출신인 최규하 대통령은 국방부장관과 함께 와서 보고하라는 원론적인 지적에 합수본부는 국방부장관을 수소문했다. 그 시각 노재현 국방부장관은 자신의 공관 바로 옆에 있는 육군참모총장 공관에서 총소리가 나자 도망을 가서 행방불명 상태였다. 이 와중에 정승화를 지지하는 육본 측이 먼저 군부대를 동원하여 사단이 벌어진다.

최규하 대통령은 군부대를 출동시킨 육본 측에 즉각 원대복귀를 명령했지만, 육본 측은 이를 거부했다. 국가원수의 명령 없이 군부대를 출동시킨 것은 국가 전복행위가 된다. 이에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정식 보고 절차를 밟아 합법적으로 대전복 부대를 출동시켜 육본 측을 제압한 것이 12·12.

전두환이 12·12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했다고 하는 주장은, 그와 신군부가 12·12 밤에 무력을 동원하여 육본 측을 강제 진압하고, 합헌적으로 수립된 정부를 타도했다는 뜻이 된다. 이런 주장은 역사적 사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 육사 11기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애정과 관심

다시 노태우 대통령의 증언으로 돌아간다. 노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이 전두환을 비롯한 육사 11기를 끔찍하게 아꼈다고 한다. 요직을 두루 경험할 수 있도록 인사를 했고, 때로는 용돈도 주었으며,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에 임명하여 정치자금의 흐름을 살펴보도록 배려했다는 것이다.

전두환을 비롯한 육사 11기에 대한 박 대통령의 각별한 관심에 대해 노태우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박 대통령은 자신이 퇴임하면 김영삼·김대중 둘 중 하나가 자신의 후임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선거에 의해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국가 입장에서 보면 백해무익한 사람이다. 안보가 뭔지, 국가의 미래를 위해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할 지를 알지 못하는 백면서생에 불과하다. 이런 인물로는 김일성을 상대할 수 없다.

따라서 박 대통령은 아직 산업화·근대화가 성취되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의 후임으로는 군부가 한 번 더 국가를 책임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군부 중에서 적임은 4년제 정규 육사 선두주자인 11기들일 수밖에 없다고 본 것 아닌가 하는 해석이다.

이것은 노태우 대통령의 개인적 관점이니 그렇다 치고, 그렇다면 박 대통령이 김영삼·김대중 가지고는 국가 미래가 불투명하다고 본 것은 타당한가 하는 점을 짚어본다.

최진덕 교수께서 발제문을 통해 소개했듯이 197910·26부터 19805·18에 이르는 과정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심각한 위기였다. 우파 중산층이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황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유일한 보루였던 전두환과 신군부가 물러나면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끝장이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정치활동을 재개한 김영삼·김대중이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던 리더였는가는 1971년 대선에 출마했던 김대중 신민당 후보의 경제정책을 들여다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증산·수출·건설을 슬로건으로 내세우고 수출주도형 공업화 전략을 통해 국민소득 향상을 위해 총력전을 전개했다.

박정희 장군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이유는 빈곤 타파’, 즉 밥도 제대로 못 먹는 국민들에게 배불리 밥을 먹이기 위해서였다. 어린 시절 뼈저리게 가난을 체험한 박정희 입장에서 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 지니는 신성물이었다. 당시 정치인이나 지식인, 언론인, 대학생들이 민주주의를 신성물로 추앙할 때 박정희의 신성물은 이었다. 같은 시대에 살면서 서로 다른 가치를 숭배한 것이 비극이었다. 이처럼 가치관이 상극이다보니 김대중 후보의 발전방식도 박정희와 정반대 노선을 걸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971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은 1950년대를 암흑의 전제 시대”, 1960년대를 개발을 빙자한 독재 시대로 규정하고 1970년대를 희망에 찬 대중의 시대라고 선언했다. 김대중 후보가 대선 과정에서 주장한 대중경제론은 해외 수출시장이 아니라 국내시장을 무대로, 대기업이 아니라 농업과 중소기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켜 농민과 서민, 자영업자에게 혜택이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외자는 필요악이며, 개방정책을 지양하고 상대적인 자급자족 체제를 주장했다. 정유·화학섬유·자동차조립·전자공업 등 외자에 기초한 대기업 중심의 공업육성은 사치적 낭비적 공업이니 더 이상 투자해서는 안 된다는 논지를 펼쳤다. 특히 노동조합의 직접적인 경영참여를 위한 노자(勞資)공동위원회 구상은 노동자들을 설레게 했다.

당시 김대중 후보가 주장한 내수 위주, 농업 우선, 중소기업 위주, 폐쇄적 자급자족 시스템, 대기업 중심의 공업 육성 반대, 노조의 경영 참여는 북한이나 유고슬라비아가 채택했던 발전방식이다. 많은 나라에서 실패한 내포적 공업화론, 포퓰리즘, 신민주주의의 혼합 형태인 대중경제론이 이 나라가 나갈 길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집권이 가장 유력했던 정치인은 신민당의 정통 적자임을 앞세운 김영삼, 그리고 재야 세력으로 명명된 국내 좌익세력과 손잡은 김대중이었다. 두 사람 모두 대중경제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인물들이었다. 김영삼이 1993년 집권하여 5년 내내 허둥대다가 외환위기를 초래한 사례를 기억한다면, 과연 그가 이란 회교 혁명으로 인한 제2차 석유파동이라는 미증유의 경제위기가 닥친 1980년 집권했다면 이 나라는 어떤 상황을 맞았을까?

1979년 박 대통령 시해 후 출범한 최규하·신현확 정부는 스스로 과도정부임을 선언하고 자신들은 민주헌법을 제정하고, 새로 제정된 민주헌법에 의해 국회를 구성하고, 대통령이 선출되면 퇴진한다고 약속했다. 헌법 제정과 새 정부 구성에는 1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면서 이때까지 혼란 방지를 위한 사회 각계각층의 자중자애를 당부했다. 따라서 1년만 인내하면 순수 민간정부의 출범이라는 새 역사 창조가 기대되는 순간이었다.

이 와중에 합헌적으로 수립된 정부를 타도하기 위해 일어선 세력은 전두환 신군부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신처럼 떠받들던 김영삼과 김대중이었다. 그들은 1년이란 시간을 인내하지 못하고 하루빨리 최규하·신현확 내각을 무너뜨리고 자신들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대학생들을 부추겨 거리로 내몰았다. 그러한 역사적 사실들이 역사 바로 세우기재판에 제출된 검찰수사기록과 5공 창출의 주역이었던 허화평 씨(보안사령관 비서실장) 등의 증언(펜앤드마이크)을 통해 상세히 밝혀졌다.

일본 총리를 역임한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가 발간한 회고록 제목이 정치인은 역사의 법정에 선 피고였다. 12·12가 전두환과 신군부의 쿠데타인가? 이 문제로 지하에 있는 전두환이 역사의 법정에 선다면 역사의 법정은 그에게 무죄를 선고했을 것이 틀림없다. 왜냐. 12·12가 전두환과 신군부의 쿠데타가 아니라 정승화 육본 측의 불법적인 군부대 출동으로 야기된 소란이었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므로.

 

#. 역사적 분업으로 국가건설 성취

12·12가 군사 반란이 아니라면, 전두환의 원죄는 5·18 책임론으로 압축된다. 광주학살의 주범이 전두환이 확실하다면 그는 역사적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5·18에 대한 작전지휘는 당시 계엄사령관 이희성 장군의 권한이었다. 보안사령관 겸 합수본부장, 중앙정보부장 직무대리 신분으로 광주 작전을 지휘할 수 없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이희성 계엄사령관의 조선일보 인터뷰(비록 그 인터뷰가 배달판에서 삭제되었지만)에서 밝혔듯이 전두환 장군은 5·18 당시 광주 작전과 관련하여 지휘계선상에 있지 않았으며, 광주 진압작전과 관련한 모든 지휘는 자신이 행했음을 증언한 바 있다. 12·125·18의 사실이 이렇다면, 전두환이 권력을 찬탈했다는 비난에 대해서는 면책시켜주는 것이 올바른 사고 아니겠는가.

이승만 대통령은 1952년의 부산 정치파동, 1954년의 사사오입 개헌 파동이라는 격랑을 타고 넘으며 12년을 재임했다. 박정희·전두환 장군은 국민들의 선거에 의해 선출되어 전 국민의 박수 속에서 출범한 합헌적 집권 방식이 아니라, 헌법에 의해 선출된 합헌 정부를 무력으로 타도하고 권력을 쟁취하는 방식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이러한 정변이나 권력 찬탈 행위는 유교적 대의명분과 질서 의식이 유달리 강한 한국 사회에서 집권에 대한 정통성을 결여함으로써 통치 기간 내내, 그리고 무덤으로 간 후에도 소위 민주화 세력으로부터 공격당하는 도구로 이용되어 왔다. 그렇다면 과연 이 분들이 정상적인 절차를 밟아 선거에 임했다면 선동과 포퓰리즘, 돈 정치의 귀재들을 따돌리고 선거에서 승리하여 집권하는 것이 가능했을까?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국가발전의 결정적인 전기를 만들어 성공 국가의 길로 이끈 지도자는 건국 대통령 이승만, 근대화 대통령 박정희, 호국 및 부국 대통령 전두환을 꼽는다. 세 사람의 공통점은 정상적 선거 절차, 즉 국민의 선택에 의한 집권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부산 정치파동(이승만), 5·16(박정희), 10·2612·12, 5·18 같은 급변사태가 아니었다면 국민이 선거를 통해 이런 지도자를 선출할 수 있었을까? 여러분들은 이 나라 국민이 선전선동과 포퓰리즘에 쩔은 속물 정치인이 아닌, 국리민복을 추구하는 진정한 국가 지도자를 선출할 수 있는 합리적 이성과 통찰력 등 성숙한 판단력이 작동하고 있다고 믿으시는가?

그 나라 국민의 수준과 그 나라 정치 지도자의 수준은 정비례한다는 것이 인류 역사의 준엄한 교훈이다. 어리석은 국민이 많아 나라의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는 정치의식 미성숙 사회에서 국가의 미래를 내다보며 피와 땀과 눈물을 요구하는 지도자를 선출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 과도한 기대 아닐까?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이란 지도자가 연이어 등장하여 이 나라를 명실상부한 선진국 반열에 올려놓은 것은 민주 선거 덕분이 아니라, 정변과 쿠데타 덕분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겸허히 현실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사족을 하나 덧붙인다. 민주주의의 석학으로 알려진 로버트 달의 연구에 의하면 1인당 국민소득 4~7천 달러 사이에 정치적 고도화와 민주주의 혁명 일어났다고 한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참다운 민주주의는 1인당 4~7천 달러 상당의 물적 토대가 건설되고, 탄탄한 중산층이 형성되어야 하며, 중산층들이 민주주의 제도를 정상 작동시키는 데 필요한 민주시민교육이 완비될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승만 대통령 시대에 건국을 했고, 공산 침략자들의 남침을 막아냈으며, 문맹 퇴치와 인재 양성을 통해 산업화로의 도약을 위한 기초를 닦았다.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중화학공업화를 통해 근대화의 전기 마련해 한강의 기적으로의 도약을 한 시기였다. 전두환 대통령 시대는 박정희 시대의 중화학공업화에 대한 구조조정과, 신성장동력인 IT산업 건설, 개방화·안정화·자유시장경제의 뿌리를 내려 전임자들이 추진한 한강의 기적을 완성한 시대였다.

이처럼 세 지도자들의 역사적 분업에 의한 국가건설을 추진한 결과 한국은 전두환 정부 말기인 1987년에 1인당 소득 5천 달러에 근접했다. 한국이 민주화로 이행한 시기가 바로 19876·29 선언부터였으니 로버트 달의 이론이 한국에서도 정확하게 들어맞은 셈이다.

민주주의 신성론자들은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시대에 민주주의는 뒷전으로 미뤄놓고 독재를 하기 위해 부정선거를 자행하고, 권력욕에 눈이 멀어 헌정질서를 파괴했으며, 1인 장기 집권에 미쳐 있었다고 비난한다.

그렇다면, 1987년 이전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시대는 우리에게 어떤 시대였다고 정의를 내려야 하는 것일까? 그 시기는 인권이 말살되고 개인의 자유를 억압당한 독재의 어두운 시대가 아니라, 참다운 인권과 개인의 자유가 만개한 민주주의 시대로 이행하는 데 필요한 물적 토대 건설과 중산층 형성을 위해 고군분투했던 권위주의 통치 시대였다고 자랑스럽게 주장할 때가 오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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