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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과 제5공화국의 역사적 의미(3)
전두환과 제5공화국의 역사적 의미(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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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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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대 군인의 대결구도와 체제위기의 심화

 

최진덕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전두환은 10.26사건 수사로부터 12.12를 거쳐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과정에 대해 어디까지가 나 개인의 자유의지와 결단의 결과이고 또 어디까지가 나 개인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운명적 상황이었는지가늠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회고록>>1, p.17) 자유의지와 운명은 늘 불가분하게 뒤섞여 있습니다만 전두환이 새삼 그렇게 말한 것은 운명의 힘이 너무나 강력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아마 다음 말이 더 솔직한 고백일 것입니다.

나는 대통령이 된다는 꿈조차 꾼 적이 없고 더욱이 대통령이 될 준비를 한 일이 없다. 그것은 분명히 운명처럼 찾아왔다. 내가 대통령이 된 것은 기회를 잡은 것이 아니라 운명을 받아들인 것이다.”(<<회고록>>1, p.586)

 

80년 최규하 정부를 떠받치는 네 기둥은 신현확 국무총리, 이희성 계엄사령관, 최광수 비서실장, 그리고 전두환 보안사령관이었습니다.(<<회고록>>1, p.316) 전두환의 공식적 위치는 네 기둥 가운데 가장 낮았습니다. 하지만 제 기억으로는 그 해 봄쯤부터 전두환이 최고실세라는 소문이 항간에 파다했습니다. 그 해 4월 기능을 상실한 중앙정보부를 정상화하라는 최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정보부장서리를 겸직하게 된 것도 소문을 증폭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2.12를 거치면서 군부의 중심에 서게 되어 중망을 한 몸에 받고 있었으니 분명히 근거 없는 소문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전두환에게는 대권야욕 따위는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에겐 최규하 대통령과 이희성 계엄사령관을 잘 보필해서 국가를 위기에서 구한다는 일념뿐이었습니다. 이것은 전두환 자신의 증언이고 또한 이순자 여사의 증언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사자들의 증언을 어떻게 믿느냐고 반박할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들어가 볼 수 없으니 증언이 맞는지 여부를 입증할 방법은 물론 없습니다. 하지만 군인, 죽음, 조국이라는 세 단어를 상기해보면 위국헌신 일념뿐이었다는 제 추측이 맞지 싶습니다.

전두환은 매일매일 죽음을 각오하고 임무를 수행하는 철저한 군인이었습니다. 무언가를 위해 정말로 죽음을 각오하는 순간 우리의 마음은 사심이나 두려움에서 벗어나 편안해지고 맑아집니다. 사심도 없고 두려움도 없는 편안하고 맑은 마음은 엄청난 힘의 원천이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지혜도 거기에서 나오고, 또 겁 없이 소신껏 행동할 수 있는 용기도 거기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흔들리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대권야욕과 같은 사심이 있다면 마음이 흐려져 지혜와 용기를 발휘하기 어렵습니다. 좀 성급한 추측이지만 전두환은 대권야욕이 없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대권을 손에 쥘 수 있었다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이순자 여사는 신혼 초부터 기회 있을 때마다 남편으로부터 군인은 국가가 요청하면 언제라도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신분이므로 출근한 남편이 퇴근해 반드시 다시 집에 돌아올 거라는 안이한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말을 반복해서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몹시 서운했다고 합니다.(<<당신은외롭지않다>>, p.192) 서운한 정도가 아니라 황당하지 않았을까 짐작됩니다. 전두환은 군인의 생사관을 부인에게까지 강요하다시피 했습니다. 사실 그에겐 군인의 부인도 군인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이게 부부관계에서 바람직한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건 전두환이 매일 죽음을 각오하면서 사는 군인의 삶에 얼마나 철저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전두환은 그런 삶의 자세로 살았으므로 12.12를 겪고 최고실세라는 소문이 나돈다 하더라도 국가수호라는 자신의 임무에 매일매일 열심히 매진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변화도 없었습니다. 이순자 여사 역시 예전과 다름없이 일상의 반복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당시 이 여사는 연세대 외국어학당에서 영어를 배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801월에는 결혼으로 중단했던 공부를 계속하고 싶어 42세의 나이에 외국어대 영어과 편입시험에 응시했으나 불합격의 고배를 마십니다. 실망감이 아주 컸다고 합니다. 남편이 최고실세라는 소문과는 전혀 안 어울리는 일상의 반복입니다.

 

그러나 일상의 반복이 한 순간에 깨어지는 일이 벌어집니다. 외국어대 편입시험에 낙방하고 3월부터 다시 연세대 외국어학당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4월이 되자 학생들의 시위가 격렬해졌습니다.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하는 4월 어느 날, 연세대 교정에서 선혈 같은 붉은 글씨로 유신괴수 전두환이라 쓰인 거대한 플래카드가 학생회관 옥상에서 지상까지 드리워져 있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이 여사는 심장이 멎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중앙도서관 앞 광장에서는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를 불태우는데 그 허수아비 위에는 붉은 글씨로 전두환 화형식이라 쓰여 있었습니다.(<<당신은외롭지않다>>, pp.196-205) 이 여사는 크나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유신체제를 혁신하겠다고 약속한 최 대통령을 돕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남편이 왜 유신괴수인지, 국가를 위해 매일 죽음을 각오하고 살아가는 남편이 왜 화형식을 당해야 하는지 이 여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 여사는 남편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다니던 의과대학까지 그만두고 가난한 군인 남편을 따라 결혼을 했습니다.(<<당신은외롭지않다>>, 2) 그 남편이 악마라니 너무나 충격적이었습니다. 이 여사가 알고 있는 철저한 애국적 군인 전두환과 학생들이 알고 있는 유신괴수전두환 사이에는 해소 불가능한 모순이 있었습니다.

이 여사를 충격으로 몰아넣은 그 모순은 한국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모순입니다. 그 모순은 5.16 이후 한국사회를 긴장과 갈등 속으로 몰아넣은 학생 대 군인의 대결구도에서 유래하는 바로 그 모순이었습니다. 60, 70, 80년대 한국사회의 심각한 모순은 농민과 지주의 모순도 아니었고 노동자와 자본가의 모순도 아니었습니다. 군인과 학생의 모순이야말로 그 시대의 가장 심각하고 첨예한 모순이었습니다. 박정희는 집권기간 18년 내내 학생들의 반독재 민주화투쟁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노동자 농민의 저항 같은 것은 학생 지식인들의 선동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학생 지식인들이 자본가 편만 드는 독재자라 비판했던 박정희는 생래적으로 특권층을 싫어하고 사회적 약자 편에 서고 싶어 했던 소박하고 인정 많은 농촌빈민 출신이었습니다. 그의 정권은 대기업을 앞세워 경제개발에 매진했지만 노동자와 농민이 경제개발의 최종 수혜자가 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버린 적이 없었습니다. 새마을운동은 농민을 위한 잘살기 운동이었습니다. 박정희는 여공의 복지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의료보험도 경제관료의 반대를 무릅쓰고 박정희가 시작했습니다. 전두환 역시 박정희처럼 소탈한 성품의 농촌빈민 출신이었고 박정희처럼 노동자 농민과 사회적 약자를 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헌신했던 국가에는 노동자 농민과 사회적 약자가 매우 중요했습니다. 5공은 정의사회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경제 살리기에 매진하는 한편 각종 복지정책의 기초를 다졌습니다.(<<회고록>>2, 4)

 

노동자 농민과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가 중요하다는 생각은 박정희와 전두환뿐만 아니고 그 시대를 살았던 거의 모든 사람들이 공유했던 것입니다. 자본가나 대기업가들도 공유했습니다. 일상을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의 현실에서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완전히 둘로 나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책을 많이 읽은 학생 지식인들은 부자와 빈자, 강자와 약자를 날카롭게 둘로 나눈 다음, 빈자와 약자를 편들었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둘로 날카롭게 나눈 다음 사회주의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경향의 좌파 학생 지식인들이 외치는 민주주의는 실은 사회주의였습니다. 반공을 의식해서 사회주의를 민중주의란 말로 바꾸어 부르기도 했습니다. 거기에다 우리의 학생 지식인들은 식민지와 분단 탓에 민족주의를 유별나게 애호했습니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는 일제시대 이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좌파 학생 지식인들이 추구해온 양대 이데올로기였습니다. 그들에게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는 시대가 흐를수록 증오의 대상이 되어갔습니다. 그들은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60년대보다는 70년대에, 70년대보다는 80년대에 더 증오했습니다. 학생 지식인들에 맞서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해온 세력은 군부(두 군인 대통령과 그들을 지지하는 장교들)밖에 없었습니다. 자본주의의 최대수혜자인 기업인들은 대개 탈이념적 방관자세를 취했습니다. 군부도 민족주의적이었지만 군부의 민족주의는 좌파의 민족주의보다 훨씬 더 개방적이었습니다.

50년대 이래 지금까지 한국사회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조직력이 있는 두 집단은 군대와 학생이었습니다. 대체로 봐서 학생은 민족주의와 민중주의를 옹호하고, 군대는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했습니다. 학생 대 군인의 대결구조는 60, 70, 80년대 한국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좌우 대결구조였습니다.

이런 대결구조의 사회정치적 발생 원인에 대해서는 더 생각해봐야겠지만 저는 그 근본에는 현실보다 책을 더 중시하는 학생의 아이디얼리즘과 책보다 현실을 더 중시하는 군인의 리얼리즘 간의 대결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대결은 한국에만 있는 것은 아니고 인류의 문명사 어디서나 발견되는 문무(文武)의 대립구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단 한국의 경우는 문()을 숭상하고 무()를 멸시했던 조선조 이래 군인을 무시하고 압도적으로 학생 편이라는 점만 달랐습니다.

 

학생 대 군인, 좌파 대 우파의 대결구조 속에서 학생들의 좌파 이상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박정희는 1972년 시월유신을 감행했다는 것이 저의 판단입니다. 만약 시월유신을 하지 않고 민족주의와 민중주의에 집착하는 학생들의 좌파 이상주의에 굴복했더라면 중화학공업 중심의 산업구조는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전두환과 5공 또한 학생들의 좌파 이상주의를 극복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켜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전두환은 동의하기 어렵겠지만 80년 그의 등장과 5공의 성립은 한국현대사의 큰 흐름에서 보면 제2의 유신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학생 대 군인, 좌파 대 우파의 대결은 10.2612.12 이후 더욱 격렬해졌습니다. 이순자 여사가 연세대 교정에서 목격한 것은 학생 대 군인(시위진압경찰)의 대결이 폭발하는 현장이었습니다. 그러나 학생 대 군인의 격렬한 대결이 80년대에는 대학가 시위현장의 일상이 되고, 80년대 말 민주화 이후에는 좌파 학생 지식인들이 군부를 이김으로써 전두환은 학살자, 악마로 영구히 낙인찍히게 되리라는 것을 그때는 상상조차 못했을 것입니다.

 

10.26으로 인해 야기된 80년의 국가위기는 첫째 삼김 씨의 조급한 민주화 요구와 전국적으로 번진 학생소요 및 노사분규의 확산으로 인한 체제위기, 둘째 오일쇼크와 중화학공업 과잉투자로 인한 5.6% 마이너스 성장과 30%에 달하는 살인적 물가고 등의 경제위기, 셋째 북한의 남침 위협으로 인한 안보위기입니다.(<<회고록>>1,3장 및 <<회고록>>2, 1장 참조) 삼중의 위기 앞에서 전두환은 최규하 대통령과 이희성 계엄사령관을 보필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다하기 위해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야당 정치인들과 학생 지식인들은 최규하 정부의 즉각 퇴진을 요구했습니다. 민주화만 되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습니다. 반면 최규하 정부는 먼저 안정화를 한 다음 민주화를 하자고 그들을 설득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최규하 정부를 유신잔당이라 비난하고 민주화를 명분으로 협박을 일삼았습니다. 최 대통령은 민주화란 말 자체를 싫어했습니다. 민주화가 집권야욕의 구실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회고록>>1, p.278) 하지만 최규하 정부는 약체정부였습니다. 야당 정치인들과 학생 지식인들의 최대의 적은 유신괴수 전두환과 신군부였습니다. 그들은 안보문제나 경제문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민주화, 오로지 전두환 물러가라였습니다.

안보위기 경제위기 체제위기 세 가지 위기는 결국 체제위기 하나로 수렴됩니다. 안보위기는 바깥에서 체제를 위협하고 경제위기는 안에서 체제를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체제위기의 핵심 원인은 학생소요였습니다. 학생은 민족주의와 민중주의를 표방하면서 해방 이후 지금까지 주로 좌파세력의 전위부대 노릇을 해왔습니다. 80년에 들어와 학생시위가 전례 없이 조직화, 과격화, 전국화되어 국가적 위기상황이 나날이 심각해지다가 마침내 절정에 이른 것이 5월이었습니다. 전두환은 학생시위의 좌경화, 종북화를 심히 우려했습니다. 특히 학생시위를 뒤에서 조종하는 김대중의 언동을 염려했습니다.

김대중은 민주주의의 나무는 국민의 피를 먹고 자란다,” “혁명은 혁명을 낳고 우리는 모두가 혁명가다,” “10.26사태는 독재에 항거한 전 국민의 혁명이다,” “김재규도 충신이다라는 연설을 하고 다녔습니다. 그가 이끄는 국민연합의 선언문에서는 노동자, 청년, 학생들의 민주 민권운동은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의 새 시대를 탄생시키는 최후의 진통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고 했습니다.(<<회고록>>1, pp.292-293)

 

민족주의와 민중주의에 입각한 민중혁명 선동이었습니다. 여기에 수많은 학생 지식인들이 호응하고 있었고, 일반 국민들은 뭐가 뭔지 모르는 불안감 속에서 대개는 암묵적으로 학생 지식인들 편이었습니다. 아무도 군인 편은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의 국민은 민주화가 자유민주주의를 가리키는지, 아니면 인민민주주의를 가리키는지에 대해서조차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자유를 사랑하는 우파 중산층은 아직 형성되지 않았음을 말해줍니다. 80년 당시 국민소득은 1600달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아직 분배보다 성장을 위해 더 뛰어야 했을 때였고 개인의 자유를 말하기에는 시기상조였습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중요성을 자각하는 우파국민이 형성되려면 세월을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한 마디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심각한 위기였습니다. 전두환과 신군부가 물러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우파 중산층이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황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유일한 보루였던 전두환과 신군부가 물러나면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끝장이 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두환은 위기상황일수록 강력한 리더십과 돌파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최 대통령의 리더십을 강화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광주사태가 진정된 다음 내각과 군 사이의 협조체계를 강화하여 대통령이 강력한 지휘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제의했습니다. 최 대통령은 531일 전두환을 상임위원장으로 임명하고 국보위를 출범시켰습니다. 국보위가 가동되자 공직사회가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최 대통령은 강하지 못한 성품 탓인지 국정 장악력이 약했습니다.(<<회고록>>1, pp.546-552)

 

전두환은 최 대통령을 존경해서 깍듯이 모셨고, 최 대통령은 전두환을 신뢰하고 좋아했습니다. 최 대통령이 신군부와 함께 이원집정제를 획책한다는 항간의 소문은 양쪽의 친화감을 과장한 데서 생긴 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런데 1980731일 최 대통령은 전두환을 불러놓고 말했습니다. “전 사령관, 미안하지만 중책을 맡을 준비를 해주어야겠소.” 전두환이 현재의 자리도 과분한데 또 무슨 중책입니까라고 되묻자, 최 대통령은 자신은 국가위기 극복을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역부족이고 난세를 극복할 사람은 전 사령관 한 사람뿐이라 답했습니다.

최 대통령이 가장 염려한 것은 국가안보였습니다. 최 대통령은 이대로 혼란이 계속된다면 김일성에게 나라를 뺏길까 걱정이라면서 지금은 군을 잘 알고 군의 신뢰를 받는 사람이 대통령 직을 맡는 것이 매우 필요하므로 하늘의 뜻인 로 알고 받아들일 것을 당부했습니다.(<<회고록>>1, p.569-574) 최 대통령의 정확한 시국 판단과 전두환이라는 대안 제시는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위험했던 한 고비를 넘기는 묘수였습니다. 철저한 군인이 아니었다면 전두환은 최 대통령의 물망에 오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전두환은 뜻밖의 제의에 너무 놀라 극구 사양합니다. “오늘 하신 말씀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라는 말을 두 번이나 했습니다. 최 대통령이 휴가를 떠난 사이 전두환은 이희성 계엄사령관과 주영복 국방장관을 만나 상의했습니다. 두 사람은 전두환과 거리가 있는 관계였지만 그들의 견해 또한 최 대통령과 같았습니다. 이걸 보면 당시 자유민주주의 체제 핵심부는 위기극복과 체제보존을 위해 전두환이라는 군인이 필요하다는 데에 암묵적인 합의가 상당한 수준으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학생들이 전두환을 유신괴수라 부른 것은 근거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최 대통령은 안보위기감에서 대통령 직을 기꺼이 포기하고 전두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그를 밀어줌으로써 체제 핵심부의 암묵적 합의 내용을 구체화시켰습니다. 최 대통령에 대한 신군부의 압박설 같은 것은 근거가 불확실한 음모론이고 신군부에 대한 명예훼손이자 애국적 결단을 내린 최 대통령에 대한 명예훼손입니다.

 

전두환과 신군부에 힘을 실어준 최 대통령과는 달리 5.17 계엄 전국확대와 더불어 사임한 신현확 국무총리는 전두환과 신군부의 권력에 대한 접근을 강하게 견제한 바 있습니다. 신 국무총리는 최 대통령과 마찰을 빚으면서 12.12 당시 전두환의 정승화 연행에 반대했고, 또 전두환의 정보부장서리 겸임에도 반대했습니다.(김용삼, <신현확육성증언>, 펜앤마이크, 2019.1.10) 신 국무총리는 전두환과 노태우 등 젊은 군인들을 미덥지 않게 생각했을 수도 있고 당시 체제위기의 심각성을 그다지 심각하지 않게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신 국무총리(2007년 작고)가 수십 년 뒤 불법사기탄핵과 주사파 정권의 등장을 목격했다면 아마 80년 당시의 생각을 수정했을지도 모릅니다.

대통령이 된다는 꿈조차 꾼 적이 없는전두환은 그렇게 대통령 직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의 말을 다시 한 번 인용합니다. “그것은 분명히 운명처럼 찾아왔다. 내가 대통령이 된 것은 기회를 잡은 것이 아니라 운명을 받아들인 것이다.”(<<회고록>>1, p.586) 전두환과 신군부가 12.12 때부터 대권을 향해 음모를 꾸며왔다는 통설은 재고되어야 마땅합니다. 전두환과 그를 따르는 장교들은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국가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목숨 걸고 노력했겠지만 위기극복 노력과 대권 음모는 전혀 다릅니다.

 

오늘날 암암리에 우리 언론계와 학계 전반에 널리 퍼져 있는 그런 통설은 역사 속 모든 행위자를 속물로만 보는 저질 유물사관에 기초해 있습니다. 인간은 물론 거의 다 속물이지만 속물이 아닌 진정으로 헌신적인 행위자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런 통설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런 통설은 비과학적이고 신화적이라는 이유로 영웅사관을 배격하면서도 그런 통설을 주장하는 자신만큼은 속물이 아니라 착각하고, 마찬가지로 비과학적인 좌파의 민중사관에는 이유 없이 영합합니다. 전두환과 신군부를 음흉한 정치꾼들로 몰아가는 오만불손하고 저질스러운 통설은 사실적 근거가 없음은 물론이고 전두환 장군과 애국심 넘치는 엘리트 장교들에 대한 명예훼손입니다.

전두환에게 운명적으로 대통령 자리가 주어진 것은 학생 지식인들의 좌파적 이상주의의 횡행에 맞서 군부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유일한 보루 역할을 해야 했던 한국현대사의 운명에 따른 것이지, 결코 어느 한 개인이나 어느 한 집단의 의지에 따른 것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전두환은 <<회고록>>에서 대통령 직이 의지적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역사의 부름이고 운명이었음을 거듭 강조합니다. 이것은 역사 현장의 한 행위자의 정직한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운명의 실체를 우리는 다 알 수 없습니다. 누구를 선택하고 누구를 버리는지는 예측 불가능입니다. 한국현대사는 전두환을 불러서 국민을 위해 실컷 부려먹었고 그런 다음 헌신짝처럼 그를 버렸습니다. 전두환은 대통령이 된 다음 나는 젖먹던 힘까지 다 쏟아 부으며 머슴처럼 일했다고 했습니다.(<<회고록>>1, p.21) 그런 전두환은 한국현대사의 속죄양이 되어 수십 년 조리돌림을 당하다가 죽었습니다. 역사의 신이 왜 그랬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역사의 운명이 곧 역사의 신입니다. 인간의 역사도 결국은 알 수 없는 신비입니다. 우리 역사학자들은 역사가 신비라는 사실을 전혀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역사의 법칙을 다 규명할 수 있다는 촌스러운 자만심 때문입니다.

박정희를 빼고는 5.16을 말할 수는 없지만 5.16 또한 박정희 개인의 의지의 산물이라고만 볼 수는 없습니다. 박정희의 시월유신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한국현대사의 운명이 박정희에게 5.16과 시월유신을 요구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80년 전두환과 신군부의 등장, 그리고 제5공화국의 등장 또한 한국현대사의 운명이 요구한 것임을 전두환의 <<회고록>>은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한국현대사의 운명이란 우리가 알 수 없는 역사의 신()을 가리킬 수도 있지만 합리적으로 생각해보면 우파 중산층이 없는 가운데 생겨난 학생 대 군인의 대결구도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합리적 사유가 역사의 신비를 다 파헤칠 수 없음을 저는 잘 압니다. 역사의 신비 앞에서 항상 겸손해야 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너무 오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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