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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과 제5공화국의 역사적 의미(5)
전두환과 제5공화국의 역사적 의미(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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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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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공화국의 그늘 : 민족해방 코미디와 민중해방 코미디

 

최진덕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확실히 개인의 자유는 박정희 시대보다 전두환 시대에 더 증진되었습니다. 안보가 튼튼해지고 경제가 발전하고 개방과 자율이 자리를 잡아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는 개인의 자유를 부정하는 괴이한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전두환이 온갖 욕을 다 얻어먹으면서 머슴처럼열심히 일해 간신히 국가위기를 극복하고 바야흐로 대한민국을 중진국에 진입시키고 있던 바로 그 때, 대학가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는 운동권 좌파세력에 의해 완전히 점령되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1986년 사상 처음으로 국제수지 흑자를 기록했습니다. 전두환은 그 해가 평생 가장 기뻤던 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해에 서울대 운동권 중심부에서 주체사상이 다른 모든 사회주의 혁명노선을 누르고 서울대를 넘어 전국 각 대학으로 급속히 전파되고 있었습니다. 전두환의 5공이 북한과의 체제경쟁에서 압도적 국력 차이로 최종 승리를 거두었다고 자부하던 바로 그 해에 서울대 운동권 중심부에서는 북한의 대남적화전략이 여과 없이 수용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1986년 주사파의 등장에 대해 어떤 기자는 김일성의 대남적화전략이 전두환 대통령을 압도하는 순간이고, 한국전쟁 이후 김일성이 한국정부 지도자들을 상대로 한 체제경쟁에서 첫 승리를 거둔 것”(우태영, <<82들의혁명놀음>>, 2005, p.149)이라 평가했습니다. 무려 20년이 지난 뒤의 평가입니다.

대한민국 최고 대학에서 김일성이 은밀하게 거둔 첫 승리의 여파는 컸습니다. 그 후 한국현대사는 계속 좌경화되었고 마침내 주사파 출신들이 대한민국의 권력 핵심부를 송두리째 장악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전두환과 5공은 북한에 대해 겉으로만 승리하고 속으로는 패배했습니다.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다 승리해도 정신적으로 패배하면 실은 다 지는 것입니다.

 

이해하기 힘든 복잡한 사회주의 혁명노선이 각축을 벌이고 있던 서울대 운동권에서 주사파의 대부 서울법대 82학번 김영환이 혜성처럼 등장한 것은 1985년 말이었습니다. 그는 우선 미국을 몰아내고 전두환 괴뢰정부를 타도하는 민족해방 투쟁부터 하자, 그런 다음 사회주의 혁명을 해서 민중이 주인이 되는 사회주의 낙원을 소련 북한 등 주변 공산국가들의 도움으로 건설하자고 주장했습니다. 김영환의 이른바 민족해방(NL)노선은 민족해방민중해방으로 요약됩니다.

 

김영환의 간단명료한 노선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미국의 식민지이고 전두환은 미국의 앞잡이로서 군사파쇼 독재자입니다. 반면 북한은 자주적인 사회주의 낙원이고 김일성은 독립운동가이자 위대한 사회주의 혁명가입니다. 전두환이 미국의 앞잡이라면 5공은 미국의 괴뢰정부입니다. 모든 불행의 원인은 미국입니다. 미국은 우리의 철천지원수입니다. 민족해방과 민중해방의 관건은 반미(反美)입니다. 1986년부터 대학가에서는 반미반핵 양키 고홈과 같은 구호가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주사파의 간단명료한 노선은 골치 아픈 이론엔 흥미가 없는 학생들을 흡입하고 그들을 행동으로 내몰기에 아주 좋았습니다. 김영환은 간편화, 대중화, 행동화로 운동권을 혁신하고 스스로 비밀조직을 만들어 지하에서 운동권을 조종했습니다. 서울법대 82학번 동기인 원희룡의 표현에 따르면 김영환은 학생운동의 천왕봉 같은 존재였습니다.(우태영, p.234) 주사파는 서울대를 넘어 전국 모든 대학을 석권했습니다. 전대협(87)이니 한총련(93)이니 하는 조직은 전국의 모든 대학을 한데 묶어 혁명기지화한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대한민국 좌파세력의 중심에는 확고하게 주사파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따라서 좌파세력의 북한 추종은 불가피합니다. 그들의 사상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김영환이 대성공을 거둔 결정적 원인은 혁명이론을 간편화하면서 민족주의를 앞세운 데 있습니다.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입각한 여타의 사회주의 혁명이론은 모두 사회주의를 민족주의보다 앞세우는 반면 김영환의 민족해방노선은 민족주의를 민중주의(사회주의)보다 앞세웁니다. 광주학살의 주범이 전두환이고 그 배후에 미국이 있다는 항간의 소문에 따라 미국에 분노하고 있던 학생들에게는 주사파의 반미 민족주의는 불 탈 준비가 되어 있는 기름에 던지는 불씨와도 같았습니다. 김영환은 사회주의 혁명이론을 토착화하여 운동권 혁명노선의 대전환을 이루어냈습니다.

 

그러나 주사파의 민족해방 노선은 다 틀렸습니다. 우선 미국이 제국주의 국가인지도 의심스럽습니다. 설령 제국주의 국가라 하더라도 과거의 로마제국이나 대영제국과는 행태가 다릅니다. 특히 대한민국에 대해 미국은 빼앗은 것보다 준 것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미국은 6.25 때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켜주었고, 그 후 경제발전을 여러 모로 도왔습니다. 대한민국이 미국의 식민지라면 우리도 웃고 미국인도 웃을 것입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은 미국의 앞잡이가 아니었습니다. 국익을 위해 미국과 수도 없이 싸웠습니다. 미국은 수차 이승만과 박정희를 제거하려 했습니다. 전두환은 군인답게 미국이나 일본에 대해 항상 당당했습니다. 그는 레이건의 친구였고 나카소네의 친구였습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이 미국의 앞잡이라면 전 세계 사람들이 다 웃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사파의 민중해방 노선도 다 틀렸습니다. 80년대에는 머리 좋고 공부 잘하는 명문대 운동권 학생들이 앞을 다투어 구로공단으로 달려가 노동운동을 했습니다. 그들은 대학 못 다니고 공장 다니는 근로자들을 불쌍하게 여겨 그들을 억압과 착취에서 해방시키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근로자들을 불쌍하다고 여기는 것은 대학생들의 오만이었고, 근로자들이 공장에서 억압과 착취만 당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운동권 학생들은 근로자들을 민중으로 만들어 그들을 민중혁명의 대열에 끌어들이려 했지만 근로자들이 진실로 바라는 것은 민중도 해방도 혁명도 아니고 중산층이 되어 잘 사는 것이었습니다. 박정희와 전두환은 근로자들의 소박한 꿈을 이루어주었습니다.

 

대학생이라는 이유로 근로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웃기는 착각입니다. 근로자가 노동운동하던 운동권 학생보다 훨씬 더 잘 사는 경우도 너무 많습니다. 제가 사는 동네 수선가게 할머니는 옛날 봉제공 출신인데 자식들 다 대학 보내고 해외여행도 다니며 살다가 소일거리로 아직 일을 합니다. 근로자가 기업주로부터 억압과 착취를 당한다는 것도 웃기는 착각입니다. 남의 집 귀한 자식을 억압하고 착취할 기업주는 별로 많지 않습니다. 기업주도 생존해야 하니까 근로자 못지않게 나름의 고통이 있습니다. 기업주가 근로자보다 더 많이 버는 것을 착취라 한다면 누가 들어도 웃을 것입니다.

 

요컨대 부존자원이 없는 이 좁은 국토에 이 많은 인구가 먹고살려면 미국이나 일본에서 자본과 기술을 빌려와 공장을 짓고 상품을 만들어 전 세계에 값싸게 파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는데 그것을 제국주의와 식민지의 불평등 관계로 설명하고 반미반일 민족해방을 하자는 주사파 학생들의 발상도 웃기는 코미디이고, 늘 억압만 당하고 늘 착취만 당하는 계급으로서의 민중을 발명해서 근로자와 농민을 그들이 원할 리 없는 그 민중 범주에 집어넣고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준 유능한 기업인들을 매판자본가라 욕하면서 민중혁명을 하자는 주사파 학생들의 발상 또한 웃기는 코미디입니다.

 

80년대 최고의 코미디언은 이주일이 아니고 민족해방 코미디와 민중해방 코미디를 창시한 주사파의 대부 김영환입니다. 콩을 콩이라 하면 아무도 웃지 않지만 콩을 팥이라 하면 누군가 웃습니다. 뜻밖의 순간 상식에 어긋나는 몰상식이 등장해서 마치 상식처럼 행세할 때 코미디가 성립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이주일의 코미디와 김영환의 코미디는 꼭 같습니다. 하지만 이주일의 코미디는 웃고 마는데 김영환의 코미디는 사람 잡습니다. 김영환의 사람 잡는 코미디는 그 후 수십 년 동안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뿌리째 흔들면서 틈만 나면 국방과 경제를 방해했습니다.

 

80년대에 주사파 극좌세력을 향해 누군가가 다음과 같이 물었어야 했습니다. 민족주의가 민족을 구원할 수 있는가? 민중주의가 민중을 구원할 수 있는가? 민족주의가 지나치면 민족을 말아먹지 않을까? 민중주의가 지나치면 민중을 말아먹지 않을까? 3세계 후진국처럼 촌티 나게 민족이나 민중을 앞세우기보다는 미국과 유럽의 선진국처럼 개인과 자유를 앞세워야 하지 않을까? 개인과 개인의 경쟁을 통해 뛰어난 개인이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여 창의와 혁신을 주도하게 된다면 민족도 살고 민중도 살지 않을까? 개인주의와 자유주의가 진정으로 민족을 위하고 민중을 위하는 길이 아닐까?

 

유감스럽게도 당시엔 아무도 그런 물음을 묻지 않았습니다. 민족주의는 아직 확고부동한 국민적 신념이었습니다. 민중주의(사회주의)를 추구하던 공산국가들은 아직 몰락하기 전이었습니다. 게다가 전두환이 등장하던 1980년은 대한민국의 경제력이 북한을 앞서기 시작한지가 불과 5년 남짓밖에 되지 않던 때였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북한의 전체주의 독재체제만큼은 잘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북한이 사람 살 곳이 못 된다는 것은 시골 할머니들도 다 아는 국민 상식이었습니다. 김영환이 80년대엔 북한정보를 알기 어려웠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북한정보는 대한민국의 TV나 라디오만 켜면 흘러나왔습니다. 김영환은 그런 정보를 하나도 믿지 않았습니다. 주체사상에 빠져 북한을 사회주의 낙원이라 믿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김영환이 북한의 실상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은 19915월 북한잠수정을 타고 밀입북하여 김일성을 직접 만나고난 다음의 일입니다. 그제서야 자신이 시골 할머니들보다 못함을 알았겠지만 너무 늦었습니다. 그가 김일성과 만나기 이전에 동유럽 공산국가들이 무너졌고 중국에서는 천안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환상은 버려도 좋을 만큼 충분한 정보가 축적되어 있었지만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습니다.

 

김영환은 복잡한 과정을 거쳐 전향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아직도 사람중심이라는 허접한 수준의 근대 휴머니즘과 공동체주의는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중심이 사람을 말아먹고 공동체주의가 공동체를 말아먹는다는 것을 왜 모를까? 그와 함께 주사파에서 전향한 이른바 뉴 라이트는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에서 철저히 외면당했습니다. 배신자에 대한 응징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이념적 좌표가 얼마나 극좌적이고 친북적인지를 단적으로 말해줍니다.

 

80년대 전두환의 등장 이후 학생운동은 극단적으로 좌경화되어 반()대한민국적인 방향으로 나아감에 따라 군인 대 학생, 자유 대 반()자유, 우파 대 좌파의 모순이 극단적으로 첨예화되어 거의 폭발지경에 이르는 듯했습니다. 80년대 중반 이후가 되면 반미 구호는 시위의 핵심구호가 되었고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하는 시위현장은 시가전을 방불케 했습니다.

 

하지만 뜻밖에도 전두환과 5공은 1984년 학원자율화 조치를 취하는 등 극좌적 학생운동에 대해 상당히 관대했습니다. 실무자들의 과잉 대처로 고문치사 사건이 있었고 이에 대해서는 전두환도 <<회고록>>에서 사과를 하고 있습니다만 운동권을 대하는 5공의 태도는 기본적으로 버릇없는 동생을 대하는 형의 태도와 비슷했습니다. 이 때문에 학생 대 군인의 모순이 폭발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19882월에는 예상을 깨고 전두환과 5공이 순순히 자진 퇴장했습니다. 그것은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로 포장되었으나 실은 군인에 대한 학생의 승리, 자유에 대한 반자유의 승리, 우파에 대한 좌파의 승리였습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미래가 염려되는 순간이었지만 학생 운동권이 주사파에 의해 장악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국민이 극히 드물었습니다. 당시 박사과정에 다니던 저도 몰랐습니다. 언론은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전혀 보도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회고록>>를 통해 판단하건대 전두환도 그 사실을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는 평화적 정권이양과 그 이후의 시국 전개에 대해 낙관적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친구 노태우 대통령의 배신으로 백담사로 귀양을 가서 2년 넘게 제1차 조리돌림을 당합니다. 노태우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을 겁니다. 친구 대통령마저 어쩔 수 없게 만들었던 그 사정이 무엇일까요. 결국 신군부의 자진 퇴장 이후 누구도 어찌 할 수 없었던 한국현대사의 좌경화 추세입니다. 바로 이 추세가 전두환과 5공을 그 빛나는 성취에도 불구하고 오명의 수렁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일제시대 이래 학생 지식인들의 민족주의와 민중주의에 대한 선호는 시간이 갈수록 도를 높여갔습니다. 70년대 유신시절 대학생 시국선언문을 보면 자유란 말은 찾기가 어렵고 민족, 민주, 민중 같은 말들만 절규처럼 쏟아집니다. 80년대에 접어들어 전두환과 5공의 등장하자 민족주의와 민중주의는 더욱 극단화되어 운동권 주사파 학생들의 정치코미디로 발전했습니다. 그들의 민족혁명 코미디, 민중혁명 코미디와 같은 혁명놀음을 돌이켜 보면 저절로 전두환과 5공의 등장에 대해 그나마 감사한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두환과 5공마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전두환이 권좌에서 물러나자마자 노태우 정권 때부터 조금씩 좌 클릭을 시작하다가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거치면서 운동권 출신이 대거 정치권에 진출함으로써 대한민국은 빠른 속도로 좌경화했습니다. 박근혜 불법사기탄핵과 문재인 주사파 정권의 등장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지난 30여년을 돌이켜 보면 80년대 말 전두환과 신군부의 자진 퇴장이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켜왔던 마지막 보루의 자진 퇴장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파까지 포함해서 많은 지식인들은 전두환과 5공의 등장으로 민주화가 좌절되는 바람에 운동권 학생들이 과격하게 되어 마침내 주체사상까지 받아들였다고 해석합니다. “주사파는 전두환 키즈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 같은 역사 해석이 과연 옳을까요. 80년에 전두환 대신 김영삼이나 김대중이 대통령 직을 차지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김영삼과 김대중이 90년대에 대통령이 되어 어떻게 국정운영을 했는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민족주의와 민중주의는 필시 주사파 학생들의 사람 잡는 정치 코미디에 영합하여 국민 소득 2천 달러 수준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구제불능 상태에 빠뜨렸을 가능성이 큽니다.

 

80년대 우리나라 대학가의 좌경화는 그 뿌리가 매우 깊습니다.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가깝게는 일제시대 학생 지식인들에 이르지만, 더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조에 이르고, 또 더 거슬러 올라가면 역사와 문명 이전의 종족사회에 이르게 되고, 또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인간의 본성과 이어집니다. 좌파는 인간의 본성이 공동체적이라 봅니다. 성선설을 신봉하는 셈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타인과 얽혀 있고 홀로 고립되어 있지 않습니다. 자유주의자 하이예크는 사회주의를 인간의 본성이라 봅니다.

 

개인의 자유는 본성이 아니라 본성의 극복에서 성립합니다. 따라서 개인의 자유를 향유하는 데는 큰 힘이 듭니다. 개인의 자유에 바탕을 둔 근대문명은 인간의 본성 속에 주어지지 아니한 것을 힘든 사유와 노동을 통해 인위적으로 만들어내야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개인의 자유를 부정하는 좌파는 결국 근대문명에 대한 부정입니다. 인간의 공통체적 본성의 회복을 요구하는 마르크스주의는 근대문명뿐만 아니라 역사와 문명에 대한 전면 부정이라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증오에 찬 반달리즘은 마르크스주의의 본질입니다.

 

이렇게 보면 좌경화 문제는 정치 사회 경제의 차원을 넘어 종교 내지 철학의 차원과 연결됩니다. 주사파는 유물론자들인데도 천주교 기독교 불교 등의 성직자들이 주사파에 동조하는 괴이한 현상도 눈여겨 볼만한 대목입니다. 요즘 학자들은 민족과 민중이 근대의 발명품이라 하지만 민족과 민중에 열광하는 것을 보면 민족과 민중의 유래는 근대를 훨씬 더 넘어 인간의 공동체적 본성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듯합니다. 80년대 대학가의 좌경화 문제는 정치 사회 경제의 차원에서만 접근해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철학도인 제게는 인간의 본성에 관한 철학적 문제입니다. 철학적 문제라는 것은 정치 사회 경제의 차원의 노력으로는 해결이 안 된다는 것, 사실상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뜻일지 모릅니다.

 

따라서 전두환의 등장으로 민주화가 좌절되는 바람에 주사파가 등장했다는 식의 얘기는 아주 피상적입니다. 설령 그때 김영삼이나 김대중의 정부가 아니라 서유럽이나 미국 수준의 선진 민주정부가 들어섰다 해도 급격한 산업화로 각종 사회문제가 빈발하고 있던 국민소득 1600달러 수준 개발도상국의 머리 좋은 학생들이 가지고 있던 과격한 이상주의에는 아무 대책이 없었을 것입니다. 서울대 연고대 같은 명문대 교수들이 학생들의 과격한 이상주의에 제동을 걸었어야 했으나 우리 학계의 지적 역량은 거기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당시 교수들은 좌파 학생들의 눈치나 봐야 했습니다.

 

착하고 머리 좋고 성실한 학생이었던 김영환은 대학1학년 2학기 무렵 공산주의 혁명가의 길을 가기로 결심합니다.(우태영, p.67) 김영환이 출세의 길을 포기하고 혁명가가 되고자 했던 데에는, 그가 경험한 한국의 현실, 그의 선량한 마음, 그리고 그가 읽었던 책, 이 세 가지 요인이 크게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이 요인들 가운데 한국의 현실은 그만이 경험했던 게 아니고, 선량한 마음 또한 그만이 가진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한국의 아픈 현실을 아파하던 모범생 김영환의 선량한 마음이 공산주의에 눈을 뜨게 된 결정적 계기는 일 것입니다. 책이 그에게 인간의 공동체적 본성을 가르쳐주고,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를 가르쳐주고, 더 나아가 민족주의와 민중주의와 주체사상을 가르쳐주고, 혁명의 방법까지 가르쳐주었습니다.

 

책에 의해 만들어진 혁명가는 김영환만이 아닙니다. 실은 모든 혁명가가 책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혁명가의 무기는 사상이고 사상은 책에서 공급되기 때문입니다. 책 읽기가 주업인 동서고금 모든 먹물들(literati)은 책으로부터 숭고한 이상(관념=idea)을 배우고, 그 이상이 세상의 더러운 현실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혁명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들에게는 책과 책에서 배운 이상이 늘 현실보다 더 숭고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현실 앞에서 겸손을 모르고 오만방자해질 수 있습니다. 80년대 주사파 학생들은 무지몽매해서가 아니고 오만방자해서 민족주의와 민중주의를 짬뽕하고 그 위에 수령론을 얹어놓은, 세상의 그 어떤 파시즘보다 더 잔인한 전체주의 사상인 주체사상으로 달려갔습니다. 이상주의적 먹물이 현실 앞에서 오만방자해지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폭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명분이 뚜렷한 폭력은 제한을 모릅니다.

 

그 결과는 근대를 넘어 전근대로, 민족과 민중으로, 문명 이전으로, 종족본능으로의 밑도 끝도 없는 퇴행입니다. 하지만 퇴행을 아무리 거듭해도 공동체적 본성으로 돌아간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공동체적 본성은 원근법의 소실점처럼 실제로 가보면 자꾸자꾸 뒤로 후퇴하는 그런 것입니다. 공동체적 본성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인간은 너나 할 것 없이 천사가 아니고 이기적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공동체적 본성의 회복을 위하여 역사와 문명 이전으로 퇴행할 때 현실적 종착점은 기껏해야 북한입니다. 북한은 공산국가의 최대한계까지 가본 나라,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말살한 나라, 인류역사상 최악의 나라입니다. 오늘날 북한은 실로 역사와 문명 이전의 홉스적 자연상태에서 살고 있습니다. 인간은 배가 고프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만인 대 만인의 투쟁입니다. 북한의 경우 기아선상에서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을 막고 최소한의 질서나마 보장해주는 장치가 바로 수령과 강제수용소와 북핵입니다. 제가 보기에 수령과 강제수용소와 북핵은 정치군사적 문제이기 이전에 철학적 문제입니다.

 

전두환과 5공은 대한민국이 북한으로 퇴행하는 길을 차단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런 노력이 가능했던 것은 전두환이 철저한 군인이었고 신군부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군인의 현실주의가 학생의 이상주의를 막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한국현대사에서 전두환과 5공이 갖는 최대의 역사적 의미입니다. 하지만 전두환과 5공의 노력이 충분했는지 아닌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결국 대한민국이 장차 존속하느냐 여부에 따라 전두환과 5공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것입니다. 미래가 과거를 평가합니다. 역사에서는 동기보다 결과가 중요합니다. 전두환과 5공의 성취가 제아무리 위대해도 불과 몇 십 년 뒤에 나라가 망한다면 다 빛을 잃고 맙니다. 역사 속의 인간, 역사 속의 국가는 무엇보다도 살아남아 오래 오래 지속해야 합니다. 사실 불안합니다. 인간이 역사를 만들지만 역사의 주인은 인간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에 한 가닥 희망을 걸어볼 정도입니다.

 

한국사회에서 장래가 가장 촉망되는 서울대 연고대 등 명문대 학생들이 주사파가 되었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대책 없는 이상주의와 오만방자함도 문제인데다, 그들에게 큰 기대를 거는 그들의 부모형제와 그들의 친구들까지 생각해보면 한국사회의 최상층부가 좌경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거기에다 해방후 지금까지 예외 없이 이상주의와 선동기술로 무장한 대학의 데모꾼들이 졸업후 20년쯤 지나면 정치지도자로 부상했습니다.

 

과연 한국현대사는 전두환과 5공이 물러난 다음 좌경화의 큰 진통을 겪어야 했고 아직도 겪고 있습니다. 학생 대 군인, 반자유 대 자유, 이상 대 현실, 좌파 대 우파의 대결구도에서 저울추는 학생, 반자유, 이상, 좌파 쪽으로 기울어버렸습니다. 먹물들이 모든 것을 지배하던 조선조 5백년 이래 우리의 숙명일지 모릅니다.

 

그래도 전두환과 같은 철저한 군인이 있었다는 것은 한국현대사의 큰 축복이었습니다. 그는 대통령이 되기 전에도 군인이었고, 대통령일 때도 군인이었으며, 권좌에서 물러난 다음에도 군인이었습니다. 그의 군인다움이 가장 빛난 때는 권좌에서 물러나 조리돌림을 당할 때였습니다. <<회고록>>서문에 나오는 그의 다음 발언은 우리의 가슴을 웅장하게 만들면서 눈가를 적시게 합니다.

 

나의 불행이 5공화국의 성공에서 초래된 필연적 결과였다면 그것은 불행이 아니고 국가적으로나 나 개인으로나 축복이요 행운이라고 나는 믿는다. 나는 죽어서 나오지도 않았고 해외로 쫓겨 가지도 않았다. 나는 퇴임 후의 그 모든 매도와 능멸과 저주까지도 감당할 수 있었던 내 삶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지금 나는 원고지를 앞에 놓고 지난 생애를 돌아보면서, 나의 조국과 국민과 역사 앞에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된다.”(<<회고록>>1, p.25)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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