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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과 제5공화국의 역사적 의미(2)
전두환과 제5공화국의 역사적 의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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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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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대한민국 현대사 세미나 [1]주제

전두환과 제5공화국의 역사적 의미(2)

 

최진덕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2. “군인, 죽음, 조국”: 전두환은 철저한 군인이다

전두환은 다른 누구이기 이전에 철저한 군인이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전두환 이해에 있어 가장 중요한 키포인트입니다. 군인은 조국을 위해 죽는 것이 자신의 본분이라 여기는 자입니다. 전두환은 말합니다. “국가는 필요할 때 군인에게 목숨을 요구한다. 그것은 군인의 명예이고 동시에 군인의 영광이다.” 참된 군인이라면 매일매일 죽음을 각오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전두환은 그런 군인이었습니다, 육사생도 시절부터 그는 평생 멸사돌진(滅死突進)’의 정신을 지닌 군인으로 살자는 다짐을 했습니다.(<<회고록>>1, p.585)

 

전두환은 출근할 때 부인에게 , 다녀오리다라는 인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군인이 임지로 가는 길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회고록>>3, p.87) 그의 출근 인사는 늘 , 가요였습니다.(<<회고록>>1, p.180) 전두환이 군인으로서 가장 좋아했던 부대는 공수부대였습니다. “실전보다 더 고된 훈련, 높은 하늘에서 조국을 위해 생명을 던지는 듯한 낙하훈련 등 초인적 훈련을 통해 군인으로서의 자부심과 긍지를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공수부대였다고 그는 말합니다.(<<회고록>>3, p.70) “군인, 죽음, 조국은 전두환 이해를 위해 필수적인 이 세 가지 키워드입니다.

 

그는 1960년 힘들기로 유명한 미육군보병학교 레인저 코스를 거친 특수전 전문가였고 우리 공수특전대의 창설요원이기도 했습니다. 공수특전단 대대장 시절 낙하훈련을 할 때면 그는 부인의 경대 위에 신분증을 두고 출근해, 언제나 부하들보다 먼저 뛰어내렸습니다. 신분증을 부인의 경대 위에 둔 것은 위험한 낙하훈련에 임하면서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린다는 나 스스로에 대한 다짐의 몸짓이었다고 그는 말합니다.(<<회고록>>3, p.86) 별을 달고 공수특전단장이 된 다음에도 그는 1호기에서 제일 먼저 낙하했습니다. 부인 이순자 여사는 남편이 여의도 백사장에 뛰어내리는 날이면 한강다리로 나가 낙하 모습을 멀리서 가슴 졸이며 지켜보았다고 합니다.(<<당신은외롭지않다>>, p.125)

 

어린 시절 참담한 빈곤으로 인해 정규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전두환이 19524년제 정규육사 제1(육사 전체로 보면 11) 입학시험에 합격한 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는 입학정원 200명에는 들어가지 못했고 예비합격자 28명 가운데 끝에서 2번째로 간신히 합격했습니다. 228명이 가입교 후 20일 간 기초군사훈련을 받는 동안 28명이 탈락하고 그는 육사생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육사는 매우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미국 웨스트포인트 커리큘럼을 그대로 가져와 철저한 교육훈련으로 자유민주군대의 장교를 양성했습니다. 전두환의 다음 회고는 의미심장합니다. “개인의 인권과 자유 및 평등이 존중되고 토론을 통해 합의를 도출해내는 자유민주주의적 문화를 익힐 수 있었다.”(<<회고록>>3, p.77) 자유민주주의적 문화가 체질화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육사11기 이후 한국의 엘리트 장교들은 일본군 출신 선배 장교들과 달랐습니다.

전두환 생도는 잠자는 시간을 아껴가며 하루 24시간 공부와 독서, 훈련과 운동에 몰두했습니다. 생도시절 4년 동안 애국애민의 마음가짐과 주어진 목표와 임무를 목숨을 걸고 완수한다는 소명의식을 체득할 수 있었다고 그는 회고합니다. 그가 생도시절 체득한 결사의 애국심과 결사의 책임의식, 그리고 자유민주주의적 신념은 그의 평생을 지배합니다. 10.26 이후 국가위기 상황에서 그가 보여준 결사적 행동, 대통령 취임, 국정운영 방식, 그리고 단임 약속 이행과 평화적 정권 교체까지 모두 생도시절 체득한 신념의 행동화였습니다.

 

그렇다면 전두환은 무얼 하건 항상 군인이었습니다. 그의 정치적 활동 또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지는 군인의 위국헌신 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헌신하고 희생한다는 생각으로 살아왔다. 5공화국이 출범할 때에도 나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희생한다는 생각이었고, 6.29선언도 나 스스로를 희생했기 때문에 국민을 감동시키고 성공할 수 있었다.”(<<회고록>>3, p.290) 1980년의 국가위기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정치인이 된 다음에도 전두환은 군인정신을 잊지 않았습니다.

5.16 이전 육사출신 장교들은 모이면 나라 걱정을 했습니다. “군이 혁명을 해야 한다는 말도 나왔습니다. 그렇다고 반드시 군의 집권을 생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전두환도 군의 혁명을 열망했습니다. “미명을 밀어내며 새벽이 오듯 그렇게 5.16혁명이 찾아오자,”(<<회고록>>3, p75) 그는 곧바로 생면부지의 박정희 장군을 찾아가 지지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리고 혁명 성공을 위해 육사생도의 시가행진을 이끌어내겠다고 제의한 다음 육사로 달려가 육사교장의 애매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우여곡절 끝에 성사를 시켰습니다. 육사생도의 시가행진이 성공하자 공사생도와 해사생도의 시가행진이 뒤를 이었습니다.

전두환은 뒷자리에서 세상을 개탄만 해봤자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생각에서, 육사생도의 시가행진을 성사시켜 목숨을 건 혁명 주체세력에게 당신들의 선택은 옳았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고 했습니다.(<<회고록>>3, p.80) 육사생도로서 체득한 그의 신념과 멸사돌진의 정신이 그를 적극적 행동으로 내몰았습니다.

전두환은 5.16혁명 첫날 육군 대위의 신분으로 박정희를 만났고, 10.26 당시에는 시해사건의 수사를 책임지는 보안사령관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박정희 시대의 시작과 끝에 전두환이라는 군인이 있었습니다. 허화평의 증언에 따르면 박정희가 가장 좋아했던 사람은 전두환이었습니다.(팬앤마이크, <5공화국역사의 증언> 참조) 전두환은 박정희 시대를 이어 새로운 시대를 열도록 역사의 신에 의해 미리 운명 지워져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최고희의 의장 시절의 박정희는 전두환에게 예편한 뒤 국회의원이 되라고 권유했고 이 권유는 사실상 지시였지만 전두환은 거역을 하고 군으로 복귀했습니다. 군인이 정치를 하면 되느냐 마느냐는 고민 때문이 아니었고 단지 나는 계속 군인의 길을 걷고 싶었을 뿐이었다고 그는 말합니다.(<<회고록>>3, p.76)

 

항상 군인이고 싶어 했던 전두환이 정치권으로 끌려나오게 된 계기는 박정희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10.26이었습니다. 박정희는 10.26이 있기 불과 6개월 전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에 임명했습니다. 대통령이 시해되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고 보안사령관은 합동수사본부장이 되어 시해사건의 진실을 파헤쳐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박정희는 자신이 가장 아끼던 인물에게 사후처리를 맡긴 셈이 되었지만 전두환은 수사 임무를 완수하려면 12.12로까지 갈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짊어지게 되었습니다. 12.12는 그의 생각이나 소망과 관계없이 그를 정치적 중심인물로 부각시켰습니다.

어떤 임무이건 주어지기만 하면 목숨을 걸고 완수해야 한다고 믿었던 전두환은 자신이 부여받은 수사 임무가 자신의 개인적 운명은 물론 국가적 운명과도 직결된다는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다음은 <<회고록>> 서문에 나오는 결의에 찬 문장입니다.

나는 국가의 운명을 마주해야 했다. 역사의 진행을 시류와 대세에 맡겨둘 수만은 없었다. 나는 청년 시절 조국 수호를 위해 군문에 뛰어들던 때의 초심을 되새겼다. 대의를 살펴 판단했고 내 삶의 신조가 가리키는 대로 결심했고, 내가 일하던 방식대로 행동했다. 12.12였다. 그 일은 나의 주저 없는 선택이었고 목숨을 건 결단이었다.”(<<회고록>>1, p.18)

육사에서 훈련받은 철저한 군인이 아니었더라면 전두환은 계엄사령관 정승화 측과 적당히 타협하고 12.12까지 가지는 않았을지 모릅니다. 계엄사령관 연행은 실패할 경우 하극상의 반란자가 되어 패가망신에 이를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전두환은 거사하기 전날 4명의 자식들과 마지막일 수도 있는 저녁 식사를 함께 하면서 다음과 같이 일러주었습니다.

너희들에게 슬픔을 안겨주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에게 맡겨진 역사적 임무를 비겁하게 포기할 수 없다. 소신을 지킨 아버지를 기억해야만 한다. 그리고 어머님을 잘 모시도록 해라.”(<<회고록>>1, pp.180-181)

전두환에게는 자신보다도, 자신의 가족보다도 국가의 운명이 우선이었습니다. 이순자 여사는 달걀로 바위 치는 격이라면 남편을 말렸지만 대학생이었던 장남 전재국은 아버지를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지지했습니다.(<<당신은외롭지않다>>, p.189)

12.12의 경과를 읽어보면 손에 땀을 쥐게 할 정도로 스릴 넘치는 한 편의 잘 만들어진 영화입니다.(<<회고록>>1, 2장 및 신윤희, <<12.12는 군사반란인가?>> 참조) 12.12라는 제목의 영화를 보면서 저는 전두환이 자신의 의지와 전혀 관계없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힘을 장악했고, 그래서 대한민국이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방향으로 계속 나아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사실에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전두환이 12.12를 앞두고 나는 국가의 운명을 마주해야 했다고 말할 때 그 말은 대한민국이 우파적 방향으로 가느냐 아니면 좌파적 방향으로 가느냐 선택의 기로에 자신이 서있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독해는 성급하게 보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박정희를 시해한 김재규 편에 선 정승화 계열의 군인들은 어차피 반()박정희 노선을 걷게 되어 있고, 그러다 보면 민주화를 외치는 좌파 세력과도 손을 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좌냐 우냐는 국가의 운명을 가르는 결정적 사안입니다. 남북대치 상황에서는 특히 더 그렇습니다.

국가의 운명과 한국현대사의 방향성을 염려하는 입장에서 보면 군사반란이냐 아니냐는 하는 법적인 논란은 부차적입니다. “국가의 운명은 법의 차원을 초월합니다. 12.12는 전두환이 철저한 군인답게 국가의 운명주저 없이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우파국가 대한민국을 수호할 태세가 갖추어졌음을 알려주는 정치적 사건입니다.

 

그는 이제 루비콘 강을 건넜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한 철저한 군인의 애국충정과 위국헌신의 표현일 뿐, 대권야욕과는 관계가 없었습니다. “12.12 당시 나에게 정권 장악 의도가 있었다면 못할 이유도 없었다고 그는 솔직하게 털어놓습니다. 이어서 성공하면 혁명이요 실패하면 역적이 되는 것인데 훗날 쿠데타했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10개월간 목숨 건 곡예를 할 바보는 없을 것이라는 말까지 덧붙였습니다. 12.12가 어느 날 갑자기 쿠데타로 둔갑한 것은 김영삼, 김대중이 정권을 잡은 다음이었다고도 했습니다.(<<회고록>>1, p.268) 대권을 잡을 힘은 있었지만 대권야욕 자체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전두환은 당시 대권야욕에 불타던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삼김(三金) 씨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이었습니다. 인종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는 어떤 위치에 있건 국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는 철저한 군인이었습니다. “군인, 죽음, 조국이 세 단어를 확실하게 알지 못하면 누구라도 전두환을 삼김 씨와 같은 부류의 대권야욕에 가득 찬 정치꾼으로 몰아가는 항간의 통설에 자신도 모르게 굴복하게 됩니다. 민간을 넘어 언론계와 학계에까지 널리 퍼져서 전두환 혐오증을 고질병으로 악화시키고 있는 항간의 통설의 천박성에 맞서야 합니다. 물론 쉽지 않는 일이지만 그것은 우파적 지성의 의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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