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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과 제5공화국의 역사적 의미(4)
전두환과 제5공화국의 역사적 의미(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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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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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자유와 그 실현의 조건 : 국가안보와 경제발전

 

최진덕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약 30년 동안 한국현대사를 주도해온 박정희와 전두환 두 군인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킨 자유의 수호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군부의 힘으로 대통령이 되었지만 군사독재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들을 자유의 억압자로 보는 시각은 한국현대사의 실상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국가안보를 지킴으로써 국민의 생명을 보장하고 다른 한편 경제발전에 성공함으로써 국민의 재산을 늘려주었습니다. 이로써 개인의 자유가 실현될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됐습니다. 그들은 자유의 수호자이기 이전에 자유의 창시자이기도 했습니다.

 

박정희와 전두환은 자유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자유의 소중함을 잊지 않았습니다. 박정희는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버린 적이 없지만 시월유신 이후엔 민족주의를 특히 강조했습니다. 미군철수 위협으로 인한 안보위기에 국론통일로 대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박정희의 민족주의는 자유를 부정하는 좌파 내지 북한의 닫힌 민족주의와는 성격이 전혀 달랐습니다. 전두환은 박정희보다 훨씬 더 강한 자유민주주의자로서 개방과 자율을 국정의 모토로 삼았습니다.(<<회고록>>2, 3) 개방과 자율이라는 정책기조가 향하는 곳은 자유입니다.

 

박정희와 전두환이 수호했던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그 자유는 이승만이 젊은 시절 한성감옥에서 <<독립정신>>(1904)을 쓸 때부터 강조해온,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고 따로 서는(獨立)” 개인의 자유 외에 다른 것일 수 없습니다. 개인의 자유는 자유민주주의의 핵심 그 자체입니다. 자유는 반드시 개인의 자유여야 합니다. 민족의 자유(민중해방), 민중의 자유(민중해방)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런 것은 자유(해방)을 빙자해서 개인의 자유를 부정하는 전체주의입니다.

 

이승만은 1948815일 정부수립기념사에서 민주주의의 본질을 개인의 자유에서 찾습니다. “민권과 개인 자유를 보호할 것입니다. 민주정체의 기본 요소는 개인의 근본적 자유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국민이나 정부는 항상 주의해서 개인의 언론과 집회와 종교와 사상 등의 자유를 극력 보호해야 될 것입니다.” 이어서 이승만은 왜적의 학대에서 벗어나려고 지난 40여 년 동안 개인 자유활동과 자유판단권을 위해 쉬지 않고 싸웠음을 상기시킵니다.(<<독립정신>>, 박기봉교정, p.449) 그에게 독립운동은 곧 개인의 자유를 찾는 운동이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이승만은 다른 모든 독립운동가와 달랐습니다.

 

하지만 이승만 역시 평생 민족의 독립을 위해 싸운 민족주의자이기도 했습니다. 민족주의와 개인의 자유는 이론적으로는 양립하기가 어렵습니다. 민족주의는 개인보다 민족을 앞세우는 순간 전체주의가 됩니다. 박정희와 전두환도 민족주의자이면서 자유민주주의 신봉자였기 때문에 같은 딜레마에 봉착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처럼 이론을 따지는 학자가 아닌, 독립운동가나 군인 혹은 현실 정치인의 입장에서 보면 별 문제가 안 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개인의 자유를 위해 민족을 개인보다 중시할 수도 있고, 때로는 개인의 자유를 위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수도 있습니다. 개인의 자유는 아무것도 없는 추상의 진공 속에서가 아니라 복잡한 현실의 구체적 공간 속에서만 향유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개인의 자유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8:31)고 할 때의 그 종교적 자유와는 정반대의 세속적 자유를 가리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종교적 자유는 개인이 자신의 세속적 자유를 다 포기하고 주님의 종이 될 때 얻어지는 자유입니다. 종교적 자유는 가장 소중한 자유이지만 여기서 제가 논의하고자 하는 자유는 아닙니다. 제가 논의하려는 세속적 자유는 남들의 구속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런 자유입니다. 그것은 남들과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 룰을 깨면서라도 자신의 탁월함을 과시하고 남들보다 더 많은 재산과 명예를 차지하고자 하는 인간의 세속적 욕망을 마음대로 충족시킬 수 있는 그런 자유를 가리킵니다.

개인의 자유는 공동체에 기반을 두고 형성된 재래의 도덕 기준에 따르면 사실상 패륜에 속합니다. 개인의 자유에 대한 근대인들의 존중의 근저에는 근대라는 깨어진 세계가 있습니다. 근대가 깨어진 세계라는 것은 경쟁 때문입니다. 경쟁은 저주입니다. 좌파가 근대를 싫어하고 자유를 싫어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좌파가 싫어하건 말건 인간은 누구나 남들의 구속을 받지 않는 자유로운 개인이 되고 싶어 합니다. 자유로운 개인이 창의와 혁신으로 세상을 발전시킵니다. 경쟁은 저주의 가면을 쓴 축복입니다.

 

하지만 개인의 자유는 그냥 주어지지 않습니다. 개인의 자유란 아무거나 제 마음대로 하는 개망나니의 자유도 아니고, 세상과 신체의 구속에서 풀려난 정신의 숭고한 자유도 아닌, 일정한 물질적 조건 하에서의 자유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개인의 자유를 향유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물질적 조건의 충족이 필수적입니다. 첫 번째 조건은 생명 보장입니다.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는 아무도 자유를 향유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조건은 일정 수준의 재산입니다. 누구라도 아무 재산이 없는 적빈 상태에서는 자유가 주어져도 향유하고픈 생각조차 나지 않습니다. 생명, 재산, 자유는 실제로는 어느 것이 먼저랄 것도 없이 불가분하게 상호 연결되어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 정치이론을 처음 만든 17세기 영국의 존 로크는 생명, 재산, 자유를 병렬시키면서 그것들을 인간의 권리(human right)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생명과 재산과 자유에 대한 인간의 권리는 자연적으로 주어져 있는 천부인권(natural right)이라 생각했습니다. 저는 인권이 자연적으로 주어져 있다는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는데 하여간 여기서 말하는 인간은 정치사회적 질서에 선행하는 자연상태의 개인(individium)을 뜻합니다. 중세 이전 공동체에 기반을 둔 재래의 도덕은 인간의 의무를 강조했습니다. 재래의 도덕에서 보면 권리주장은 오만한 것입니다. 인간의 권리 즉 인권이라는 개념은 지극히 근대적입니다. 개인의 자유가 인간의 권리라면 재래의 공동체적 질서는 와해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공동체적 도덕에 기초한 모든 좌파는 개인의 자유라든가 권리 개념을 증오합니다.

 

개인의 자유는 경쟁을 격화시키고 불평등을 심화시킬 수 있습니다. 경쟁과 불평등은 고통입니다. 하지만 개인의 자유를 인정한 모든 나라는 발전했습니다. 개인의 자유가 경쟁을 부르고 경쟁이 창의와 혁신을 불렀기 때문입니다. 반면 개인의 자유를 부정한 모든 나라는 하나같이 후퇴 내지 실패했습니다. 경쟁이 없으니 창의와 혁신이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 국가가 대표적인 실패 사례입니다. 이론적으로만 보면 개인의 자유는 공동체와 모순적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보면 오직 개인의 자유만이 공동체를 살려내는 힘이 됩니다. 창의와 혁신이 없는 공동체는 죽은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이승만, 박정희와 마찬가지로 전두환도 경쟁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경쟁이 없는 사회는 죽은 사회라고 썼습니다.(<<회고록>>2, p.135)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좌파가 죽어라 증오하는 개인의 자유 위에 서있습니다. 개인의 자유는 대한민국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입니다. 오늘날 한류문화의 세계적 확산을 가능케 했던 원천적 힘도 개인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건국 당시에는 개인의 자유가 무언지를 알고 그것을 긍정했던 사람은 아마도 이승만 한 사람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의 발전과정은 개인의 근본적 자유를 깨닫고 그것을 향유하는 중산층의 수를 폭발적으로 늘려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중산층 만들기는 전두환의 5공에 이르러 절정에 이릅니다. 스스로 중산층이라 여기는 국민의 비율이 83년엔 63%, 85년엔 70%, 86년엔 77%였습니다. 전두환은 이것을 전 국민의 중산층화라고 표현했습니다.(<<회고록>>2, 4) 적절한 표현입니다. “전 국민의 중산층화는 전 국민이 개인의 자유를 향유하는 전 국민의 자유화입니다. “전 국민의 중산층화안정 개방 자율이라는 5공의 정책기조의 산물이었습니다. 5공은 강력한 안정 정책으로 사회질서를 잡고 물가를 안정시키면서 한국사회를 세계와 미래로 열어놓는 개방과 자율 정책을 실시했습니다. 통행금지를 해제하고 해외여행의 자유화했습니다.(<<회고록>>1, p.23)

 

그 결과 경제는 다시 고도성장을 회복하면서 수출은 늘어나고 1986년 국제수지는 사상 처음 흑자를 기록했습니다. 전두환은 국민이 모두 신이 나서 뛰었던결과라고 하면서 1986년이 평생 가장 기뻤던 해라고 술회합니다. 그렇게 해서 개인의 자유를 향유하고 싶은 중산층이 형성되었고, 전두환과 5공이 만들어낸 그 중산층이 전두환과 5공에 반대하면서 80년대 말 민주화를 이루어냅니다. 민주화와 더불어 전두환은 80년 이후 한국현대사의 모든 죄를 혼자서 다 뒤집어쓰는 속죄양이 됩니다. 전두환이 뒤집어쓴 죄는 물론 민주화세력이 만들어낸 죄입니다. 역사의 신은 때로는 자비롭고 때로는 무자비해서 예측이 불가능합니다.

 

국민이 개인의 자유를 향유할 수 있게 하려면, 첫째 국민의 생명 보장을 위해 공산침략으로부터 국가를 지키는 튼튼한 안보가 필요하고, 둘째 국민이 빈곤으로부터의 벗어나 일정 수준 이상의 재산 소유가 필요합니다. 이승만에 이어 박정희가 했던 일도 국가안보와 경제발전이었고, 박정희에 이어 전두환이 했던 일도 국가안보와 경제발전이었습니다. 국가안보를 위해서는 때로는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습니다. 경제발전을 위해서도 때로는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습니다. 조건이 미성숙한 상황에서 개인의 자유부터 먼저 허용하면 국가안보도, 경제발전도 안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박정희가 유신시대에 한국적 민주주의를 내세운 것은 국가안보와 경제발전이라는 두 조건이 어느 정도 충족될 때까지 자유민주주의를 유보하자는 뜻이었습니다. 전두환 역시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전두환은 실질적 민주화와 절차적 민주화의 이분법으로 설명합니다. “국민생활의 기본수요인 의식주를 향상시키는 일이 곧 실질적 민주화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나는, 절차적 민주화가 일시적으로 제한을 받더라도 국민생활의 향상을 통한 실질적 민주화를 구현하는 일이 우선이라고 믿고 경제성장을 위해 매진했었다.”(<<회고록>>2, p.624)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일정 수준 이상의 재산을 가진 중산층의 정치체제입니다. 이 점을 박정희도, 전두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군부의 힘을 빌어 등장한 박정희와 전두환 두 군인 대통령은 학생들의 시위에 시달리면서도 결사의 애국심으로 국가안보와 경제발전에 매진하여 대성공을 거둠으로써 이승만이 염원했던 저 개인의 근본적 자유가 보호되고 향유될 수 있는 물질적 기초를 마련했습니다. 한국근현대사에서 이승만은 자유의 진정한 창시자였습니다. 그가 1904년에 쓴 <<독립정신>>은 개인의 자유에 관한 책입니다. 박정희와 전두환은 이승만을 계승한 자유의 수호자이고 자유의 확산자였습니다.

 

그들이 자유를 억압한 독재자라고 하는 것은 착각 내지는 좌파의 선전에 불과합니다. 박정희와 전두환이 이끌었던 정권을 군사정권이라 하는 것도 실상과 다릅니다. 장관, 국회의원 가운데 군인의 비율은 20% 미만이었습니다. 군인을 기용해도 전문성을 고려했습니다. 박정희와 전두환은 유능한 민간 전문가들을 기용했습니다. 박정희와 전두환은 군인 대통령이었지만 군부의 무분별한 정치 개입을 막고 국정을 가장 효율적으로 운영했습니다. 전두환은 나는 군부를 장악하고 통제했지 군부의 영향 아래 있지 않았다”(<<회고록>>3, p.305)고 말합니다. 그는 정치사회적으로 아무리 어려워도 군을 동원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5공이 군사정부라는 말에 반대합니다.

 

전두환 정권은 개방과 자율을 강조함으로써 박정희 정권과의 차별화를 시도했습니다. “박정희 없는 전두환도 없고” “전두환 없는 박정희도 없다고 하면서, 전두환은 박정희 대통령이 미완으로 남긴 조국근대화의 과업을 내가 완성시켰다라고 자부합니다.(<<회고록>>3, p.612) 하지만 전두환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박정희보다 더 강했고 박정희의 장기집권에 대해 비판적이었습니다. 전두환은 스스로 박정희의 비판적 계승자라는 말도 합니다. 그는 비판이 결코 배신이 아님을 강조합니다.(<<회고록>>3, p.613) 전두환은 박정희의 유지를 계승하되 더 발전시켰다고 봐야 합니다.

 

전두환은 장기집권이 역대 대통령들의 불행을 불렀다고 판단하여 평화적 정권교체를 자신의 신앙처럼 여겼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그는 정말로 7년 단임 약속을 지키고 권좌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는 6.29선언이 국민에 대한 항복 선언이라는 항간의 통설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국민과 싸우다 항복한 것이라면 6.29 선언 즉시 물러나야 했었지만 그 후 8개월 더 재임하며 민주화 조치들을 완수했다는 사실을 그는 강조합니다.(<<회고록>>1, p.24) 그러나 중요한 포인트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그가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았지만 실은 전두환과 신군부는 마음만 먹으면 무력으로 정권을 연장할 수도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유민주적 훈련을 받은 엘리트 장교들의 명예심과는 안 맞는 일이었습니다. 한국군부의 명예심이 아니었다면 이른바 민주화는 불가능했을지 모른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전두환처럼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군사독재자가 그렇게 툴툴 털고 물러나 결국 무방비상태로 수십 년 동안 조리돌림을 당하는 경우는 세계사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희한한 일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전두환은 애당초 군사독재자가 아니었다고 보는 편이 앞뒤가 맞는 얘기일 것 같습니다.

 

대통령 전두환과 관련해서 반드시 시정해야 할 항간의 소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전두환은 몸이 건강해서 운동은 잘하는데 머리가 나쁘고, 그래서 유능한 참모들을 발탁하여 그들에게 국정을 다 맡겼다는 항간의 소문입니다. 이 소문이 완전 거짓임은 대통령 시절 국정수행에 대해 쓴 <<회고록>>2권을 읽어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대통령 전두환은 국정 전반에 걸쳐 아주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탁월한 식견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 수준이 실로 경이로울 정도입니다. 그리고 전두환은 유능한 참모들에게 많은 권한을 위임하더라도 그들의 장단점을 미리 파악하고 최종 결정만큼은 늘 자신의 몫이었습니다.

 

그는 대통령의 권위를 항상 생각했습니다. 권위가 있어야 영이 서고 영이 서야 관료들이 국민을 위해 봉사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정책토론을 할 때 참모들로 하여금 자유롭게 발언하게 했고 경청을 한 다음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믿으면 참모들을 설득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럼에도 참모들이 설복이 되지 않을 경우에는 통치권 차원의 결단과 지시에 따르게 만들었습니다. 그의 이런 태도로 인해 5공은 권위주의적 정부니 독재니 하는 악평이 생겼지만 실은 그는 중요한 국가적 의제가 제기되면 여야 가리지 않고 대화를 나누었습니다.(<<회고록>>1, p.22)

 

군인 대통령 전두환은 직업 관료들이 갖지 못한 상상력을 발휘하기도 했습니다. 관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88올림픽을 유치한 것이라든가 일본으로부터 40억불의 안보협력자금을 얻어낸 것은 전적으로 그의 독창이었습니다. 그의 상상력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예는 6.29입니다. 그는 또한 어떤 자리에서나 친화력이 있고 언변이 뛰어나고 유머가 풍부했습니다. 그의 지적 능력은 이승만이나 박정희에 못지않다는 것이 <<회고록>>을 꼼꼼하게 읽어본 저의 결론입니다. 저는 제 결론이 맞는지 여부를 전두환과 함께 군대생활을 했던 몇몇 노장군님들로부터 확인한 바 있습니다.

 

대통령이 된 뒤 전두환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머슴처럼 일했다고 술회합니다. 심지어 잠자는 시간을 쪼개가며 국정을 살피느라 대통령의 자리를 즐겁다고 느껴 본적은 없었다고도 말합니다.(<<회고록>>1, pp.21-23) 나라 걱정에 밤잠을 자지 못해 오래 전에 끊은 담배를 다시 피워 골초라는 소문이 날 정도였습니다. 어떤 조직에서든 이렇게 죽어라 열심히 일하는 상관을 좋아하는 하급자들은 별로 없습니다. 전두환은 관료들에게는 무서운 대통령이었을지 모르지만 실은 그게 바로 국민 머슴이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습니다. 권위주의적 정부건 아니건 전두환 시대에 국민은 먹고살기 편했습니다. 정치보복을 일삼고 민주주의만 외치다가 IMF를 불러와 국가경제를 다 말아먹고 수많은 국민을 도탄에 빠뜨린 김영삼과는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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